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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성한 감사 (시 13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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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감사 (시 136:10-16)

세계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문화’라고 합니다.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듯이, 각국의 문화도 다릅니다. 가장 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나라의 환경이나 조건, 그리고 삶의 터전과 방식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 음식문화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한국의 음식 문화가 참 독특하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한반도의 기후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전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山)으로 되어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식생활에 그대로 반영되어 한국음식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한국음식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먹는 것에 무척이나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잘 먹지 못했고, 역사적으로 그리 잘 살지 못한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인사할 때에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요? 우리는 먹는 것에 마치 무슨 ‘한’을 푸는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먹고 죽은 귀신은 색깔도 좋더라....’ 또한 우리 음식은 대단히 맵고 짠것이 특징입니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암 사망률이 세계 1위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풍성함’에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인 식탁문화의 차이는 음식을 한꺼번에 먹느냐, 아니면 단계적으로 먹느냐의 차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시간전개형’과 ‘공간전개형’이라고 부릅니다. 서양식탁은 시간전개형입니다. 그러나 동양은 공간전개형입니다.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일본만 해도 음식의 가짓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에 그릇이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많습니다. 아마 세계적으로 우리만큼 식탁에 그릇이 많이 올라오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 하면 늘 풍성한 것을 연상합니다. 풍성한 식탁이 한국 음식의 큰 특징입니다.

우리 신앙과 열매에 있어서 ‘감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감사는 풍성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풍성한 감사로 나가는 날입니다. 은혜와 축복이 풍성하기에 감사가 풍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주일을 주신 목적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담는 그릇이다” 감사하는 만큼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기를 원하면서도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감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입니다. 무엇을 감사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미 받은 것이 많고, 앞으로 주실 것도 풍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을 인하여 감사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것을 살펴보면서 주시는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시편 136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시는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시의 탁월함과 문체를 비교하여 ‘다윗의 시’라고 말합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창조주의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 마지막까지 ‘구원자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본문이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 가운데 10절부터 12절까지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출애굽은 가장 큰 사건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지 400년이 지난 뒤, 그들은 그들의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오기를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일이 모세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을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출애굽이 이루어졌는가를 압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마음이 강퍅하여 도무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앙이 애굽에 있었음에도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에서 항복하고 만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넘어가고, 그 피가 없는 집에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죽음의 사건이 있은 뒤, 이스라엘은 극적으로 애굽을 탈출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정만 60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200만이 넘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우리의 ‘해방과 자유’를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억압과 압제에서 출애굽을 시키신 것과 같이 우리를 억압과 고통에서 해방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억압에서 해방시키실 분이십니다. 이것이 먼저 감사할 제목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나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죄입니까? 그렇다면 죄에서 자유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종노릇해야 할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죄의 목을 치신 것입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예수 안에서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사망에서 모두 풀어진 사람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오늘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 구원의 기쁨이 무엇보다도 가장 커야 합니다.

또 무엇을 우리를 억압하고 있습니까? 근심과 걱정입니까? 우리가 염려한들 우리의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고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건강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물질입니까? 인간관계입니까? 어떤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 해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맡기면서, 이제 얽매이는 것에서 자유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 시의 저자는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가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역시 출애굽기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통과한 뒤에 홍해를 만났지만,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그 가운데로 건너게 하셨고, 뒤따라오는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빠뜨리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출애굽을 통해 해방의 감격을 주시더니 이제는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고 흥분된 마음, 벅찬 감동을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며 노래했던 것입니다.

‘홍해’는 종종 믿는 자의 삶에 나타나는 난관, 문제, 장애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도 난관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지 않습니다. 전도서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 삶에 형통한 날도 있고, 곤고한 날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삶에 홍해와 같은 장애물을 만날 때의 내 믿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할 때 잘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의 자세요, 삶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에 그런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 만난 여리고가 그렇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곧 바로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난공불락인 여리고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리고가 어떻게 무너졌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무너트리신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발에 착고를 채우고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을 상황입니다. 바울의 인생에 그야말로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 앞에 바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찬송과 기도뿐이었습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이 하늘을 향하여 찬송과 기도를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착고가 풀어졌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여리고가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난관을 만나고 문제에 봉착합니다. 지난 한해가 특히 그런 한해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정말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어려운 한해였습니다. 그 어려움의 여파가 우리 성도들의 삶에 구석구석 미쳤습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내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사업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울 기력도 없이 정말 지치고 피곤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는 홍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갈 수 없고, 뒤로 물러갈 수 없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저 위에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문제를 풀어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믿음이 난관을 극복하고, 믿음이 여리고와 홍해를 가르게 합니다.

어렵고 힘든 한 해였지만, 이제 우리 앞에 있는 홍해를 가르실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보면서 감사합시다!
바울처럼 찬양하고 기도합시다! 분명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을 잃지 않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광야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저자는 16절에서 이것을 노래합니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출애굽을 하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곧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곧 바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않고 광야에 머물게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압니다. 그러나 광야는 어떤 이유를 떠나 꼭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광야가 있었기에 가나안이 돋보이는 것이고, 광야에서 살았기에 가나안의 삶이 풍성했던 것입니다. 광야가 있었기에 그들이 가나안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가나안 가기 위해 꼭 거치고 통과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바로 여기에 광야를 주신 하나님의 중요한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고, 인생의 존재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죽고, 뱀에 물려 죽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죽고, 병으로 죽고, 늙어서 죽었습니다. 많은 죽음이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내가 숨쉬고 호흡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이것이 광야의 삶이었습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종종 우리의 인생 길에 비유됩니다. 광야는 그 자체가 우리의 인생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광야를 통과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광야의 인생 길을 통과해야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처럼 우리의 인생 길에 소중한 것을 배우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생명의 소중함, 내 존재의 가치성, 인생의 아름다움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귀하게 보십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 호흡하고, 살아 있다는 것, 변함없이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인생이 결코 비관적이지 않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도 그것이 모두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부터 그것을 심어주셨습니다. 생명이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자기 삶의 비관하고, 자기의 소중한 존재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죄입니다. 지금도 온 천하보다 귀한 소중한 생명이 죽어갑니다. 이것이 정말 현대를 향한 무서운 사탄의 공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까지, 이제는 청소년까지도 이 문제가 깊숙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인터넷에 자살사이트가 생겼고, 여기에 현혹된 학생들이 자기생명을 함부로 내 팽개쳐 버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 사람의 자살이 사회적인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제는 하도 많으니까 잘 보도도 하지 않습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정말 생명의 가치가 소중함을 알았다면,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냥 버려 두시겠습니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공급해주십니다. 우리가 욕심만 버리면 됩니다.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날마다 이 진리를 경험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안 것이 진정으로 감사할 조건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출애굽을 통해,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배웁니다. 홍해를 통해, 난관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광야를 통해, 인생의 소중함과 존재 가치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고, 참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며, 정말 부자는 자신의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풍성한 은혜 앞에, 풍성한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을 품고,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2005-06-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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