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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 참 감사합니다 (시 1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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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참 감사합니다 (시 16:9-11)

사람이 산다는 것. 행복일까요? 불행일까요?
생각지도 않게 고난당한 욥.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탄식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이런 고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늘 염려하고, 조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고……. 바동거리며 살지만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언제 또 무슨 일 당할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행복일 겁니다.
그래요?
차라리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행복이 뭔지 불행이 뭔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격어 본 사람만이 행복이 뭔지 불행이 뭔지 아는 겁니다. 우리가 감사 할 수 있느냐 없느냐도 마찬가지 경험해 본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란? 어느 한 쪽만이 아닙니다. 계속 불행만 경험한 사람이 무슨 감사가 있을까?
계속 행복만 경험한 사람은 또 무슨 감사가 있을까? 뭐든 성공하는 사람은 그 성공이 얼만 대단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 했다면 그 성공의 가치와 그 대단함을 비로소 알게 되고. 그럴 때 감사가 있게 됩니다.

감사에 대한 설교가 나오면 으레 듣는 것이, “.... 때문에 감사” 혹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잘 아는 하박국 3장 17-18절. “할지라도 나는 기뻐하련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럴지라도 나는 기뻐하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그래요.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때문에’ 감사하는 자들은 아니에요.
건강하기 때문에. 성공했기 때문에. 물론 감사해야지요. 그러나 병들어도, 실패해도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던가요?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어요. 그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그를 찾아가서 “그래도 감사하세요.”라고 말 할 수 있겠어요? 믿음이 좋다는 사람은, “말할 수 있다.” 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남의 일이니까 그렇지요. 자신이 암에 걸렸는데 누가 와서 그런 소리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어떨까?
정신박약아를 키우는 집사님이 있어요. 찾아간 믿음이 좋으신 분이 “그래도 감사 하세요. 하나님께서 그래도 집사님이 이 아이를 책임지고 키울 만 하니까 맡기신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시겠어요? 만약 내 아이가 그렇다면?
그래도 그렇게 또 남이나 불치병에 걸릴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하면서, 거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감기 걸렸을 때, 여러분 감사해 본 적 있으세요? 감기 걸려서 “하나님 암이 아니라 감기여서 감사 합니다.” 그래 본적 있으세요?
왜 안 되던가요? 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는 병원 가서 침 한대 맞거나 약 좀 사다 먹으면 낳는 거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남강 다리 걸어 다니면서 그 다리 놓아준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 적 있으세요? 만약 어쩌다 다리를 공사하느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그러면 불평들 하지요. 왜 다리가 이 모양이냐? 왜 빨리 고쳐 놓지 않느냐? 그 동안 그 다리 때문에 편안히 다닌 거 감사해 보셨어요?
그리스도인들은 ‘때문에’ 감사하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문에’가 없이 감사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한 믿음 좋은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왜입니까? 실패했기 때문에? 아닙니다. 실패함으로서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실패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주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 여러분!
이 ‘때문에’를 많이 찾으십시오.
하박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없을지라도’ 그래도 그가 기뻐했던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거기 18-19저에, “없을지라도 나는 주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오늘 읽은 본문 9-10절,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이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 까닭은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그것은 ... 하셨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감사가 아닙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자기가 왜 감사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추수감사 주일을 지키고 있는 여러분!!
무엇 때문에 감사하셨습니까? 무엇이 감사해서 감사헌금 하셨습니까? 그냥 추수감사주일이니까? 으레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내가 교회의 뭐니까? 그래서 기쁜 마음보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수위를 조정하고 그런 것 아닙니까?
바라기는 한 분도 그리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조건 때문에만 감사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조건 없이 감사할 수도 없는 겁니다.

오늘 읽은 시편기자 (다윗의 시라고 되어있습니다만)의 감사를 보십시오.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그는 주께서 보호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막연히 감사하는 것 아닙니다. 그는 주께서 그를 보호해 주심을 경험 했습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기쁜 겁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한 것입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요, 막강한 부와 권력과 명예를 한 몸에 지닌 자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늘 감사했습니다.
“내가 누구 길래 주께서 나를 이같이 생각해 주십니까? 종의 집이 뭐 대단하다고 이같이 높여 주십니까?”
그럼요. 그런 하나님이신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는 여러분도 그렇기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무엇을 하든 성공하고 승리 하십시오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명예도 얻으십시오. 그래서 늘 감사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십시다.
만약 그런 것 때문에만 감사한다면 우린 오히려 더 불평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것들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같이,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만 있을게 아니라,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절대 권력을 가졌다고 행복했습니까? 오히려 왕권 때문에 사울로부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수많은 대적과 심지어 그 아들 압살롬의 반란까지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가 목동에서 왕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감사 이유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그 너머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내 영광을 즐거워하며”
지금 다윗은 왕으로서 자기에게 씌어진 왕관이나 신하와 백성들의 칭송들로 인하여 즐거워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즐거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는 그 보다도 주님의 보호하심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어떻게 그런 영광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주님께서 보호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이미 죽음의 세력에 그의 생명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의 영혼은 오래전에 죽음의 세계에 버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감사해서 마음껏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왕이지만 늘 목동의 때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다윗과 같이 여러분의 어려웠던 때를 기억 하십시오. 힘들었던 때를 기억 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여기 내가 있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굽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광을 받으셔야 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가난한자 병든 자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셨는데도 그들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셔야만 했습니까?
죽음의 세력이 우리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셨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하게 하시고, 내 영혼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영원히 썩지 않는 자로 있게 하시려는 그분의 은혜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 입니다.
그런데 그걸 믿으면서도 감사할 수 없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 놓으심으로 내가 생명 얻었다고 믿으면서도 생명만도 못한 것조차 주님께 드려 마음껏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다윗이라고 언제나 편안했습니까? 그는 많은 고난과 죽음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께 생명의 길 곧 사는 길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스테반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곧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외곽에 떨어진 바울 참수 터에 갔습니다. 거기 양쪽에 커다란 그림 두개가 걸려있는데, 하나는 사도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의 목을 참수 대에 얹고 그 목을 자르는 순간의 그림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죽었습니까?
베드로성당 어마어마하더라고요. 그렇다고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생명의 길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한 눈 팔지 마십시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림도 그분이 생명의 길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고, 그래서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의 생명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라고 망설이지 않았겠습니까? 왜 그들이라고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생명의 길 곧 생명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찬양합니다. 감사의 외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아멘.
세상 눈으로 보면 신앙생활이 결코 기쁨의 일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길을 좁고 험한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비상구가 화재가 나거나 하면, 이 비상구 좁고 불편하지만 그것이 사는 길이 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이심을 경험했습니다.
항상 보존 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고, 언제나 곁에 계셔서 큰 즐거움을 영원히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습니다.
1절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께로 피합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나의 보호자가 되시며,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 되시며, 주님만이 언제나 나의 곁에 계셔서 큰 즐거움이 되시며, 또한 주님만이 나의 행복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절에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다.”고 찬송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 했습니다. 무지개……. 파랑새……. 그들은 행복을 찾으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래서 터덜거리며 돌아와 보니, 거기에 행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돌아와 보니” 거기가 바로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이신 주님, 그분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 그 어디에 행복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육신의 편안함도, 영혼의 기쁨도, 살아갈 길도 그 어디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와 아버지 품 안에서 찾던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께 행복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께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보호자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그분께 피난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기쁨을 얻고 감사하게 됩니다. 다른 신 또는 다른 것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눈 팔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그런 생각 듭니다.
“예수 믿는다는 게 뭔가?”
나 보다 돈 더 많이 버는 사람도 사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데, 그 사람만큼도 못 벌면서 십일조 내고 주일헌금, 속회헌금하고 감사헌금하고……. 나도 내 집이 없으면서 교회 짓는다고 건축헌금도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해 보면 나을 거 별로 없어요. 교회 다닌다는 것 외에는 거의 비슷해요. 못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땅에 있지만, 그래서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별로 다를 바 없지만, 여러분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땅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 손 안에 있습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받는 것이 없다구요?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아들 그분을 여러분이 받으셨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을 부하케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해 지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살리시려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습니다.
다들 예수 믿으면 그런 거 다 공짜고 주는 줄 알아요. 그래서 그것이 은혜인줄 모른다구요.
결혼하고 이때까지 아내가 해 주는 밥 먹었어요. 그런데 늘 그것이 감사하고 고맙던가요? 잊고 살지요. 오히려 반찬이 입에 안 맞는다고 투정하지요?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고 살아요. 오히려 내 마음에 안 들면 불평해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의 분깃 곧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유산임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 곧 존귀한 자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명 얻었고, 또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비록 이 땅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구원의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기에 그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우리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조차도 주님의 영광조차도 세상의 기치로 결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늘 강조합니다만, 감사는 입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감사는 감사절에 한 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는 삶입니다. 어쩌다 한 번 감사가 아니라 매 순간순간 감사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렇게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감사 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이 환경은 주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땅 입니다. 그렇기에 환경 때문에 불평할 것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주신 땅, 주님께서 주신 환경이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쩌다 돌아보시는 것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해도 늘 순간마다 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여러분을 돌보아 주십니다.
본문 7-8절, “주께서 날마다 좋은 생각을 주시며, 밤마다 나의 마음에 교훈을 주시니, 내가 그를 찬양한다. 주님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가 나의 곁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아멘.
“날마다” 심지어 “밤마다” 그리고 “언제나”
그분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시편 121편 3-8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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