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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잠 01: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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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잠 1:20-33)-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잠언 1장 하반부를 읽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것을 말씀하면서 지혜 있는 자는 악한 자의 길에 함께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지혜의 호소를 거부할 때 멸망을 면치 못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지혜를 말하자면 인격화해서 말했습니다. 물론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지혜로서 하나님을 대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지혜로운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또한 얼마나 위험한 사실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무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 훤화하는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며 가로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베소서 3장 10절에 있는 말씀처럼 모든 종류의 지혜로써 인간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음성이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영어로 conscience라고 하는데 본래는 라틴에서 온 말로 con-scientia 즉 ‘같이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마음의 등불이기도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착한 양심은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은 착한 양심에서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15절에는 양심은 ‘우리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마음속에 이미 기록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 보면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분간할 수 없습니다.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양심은 말하자면 우리 마음 속의 하나님의 지혜와 음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에게 말씀하고 싶으실 때 이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양심이 우리 인간 생활에서 하는 역할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 생활에 말하자면 지나침과 같은 역할을 양심이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해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 것을 우리의 양심이 말해 줍니다.

지나침은 언제나 남과 북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면 ‘착한 양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바른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의 양심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경고합니다. 위험 신호를 보여 줍니다. 전에 하와가 유혹을 받을 때 양심의 경고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할 때도 양심이 그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범죄할 때에 양심이 경고가 전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할 때 경고할 뿐만 아니라 잘못되면 범죄한 그 다음에는 그 마음에 가책을 줍니다. 책망합니다.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오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범했을 때 왜 숨었습니까?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왜 숨었습니까? 그 마음 속의 하나님의 지혜, 곧 양심이 책망하고 하나님을 무섭게 하였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습니다.

이조 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는 세조가 그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입니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조카 단종을 그냥 두고 왕의 행세를 하려니까 마음이 편안치를 못해서 종래는 죽어 버렸습니다. 조카를 죽인 세조의 마음이 평안했습니까? 아니요, 평안치를 못했습니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매일 밤 같이 잠이 들려고 하면 단종의 어머니 그러니까 세조의 형수가 나타나서 무섭고 괴로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밤마다 나타나서 “너 이놈! 어린 조카 죽이고 왕이 되니 좋으냐?” 꿈에 나타나는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고 하도 무서워 깨고 나면 온몸에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다고 합니다. 하루는 잠이 들려는데 또 형수가 나타나 칼을 입에 물고 다가와 무서워서 돌아눕는데 ‘네 이 더러운 놈아!’ 하면서 침을 뱉는데 등 뒤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세조가 등창이 생겨서(바로 침 떨어진 데) 고생하다가 그 등창 때문에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맥베드의 내용도 그와 비슷한 것 아닙니까? 맥베드가 장군을 죽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왕좌에 앉으려면 죽은 벵코우 장군이 칼을 물고 의자에 앉아 있어서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치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요?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그와 반면에 우리가 양심을 순복해서 바른 생활을 할 때에는 우리에게 격려하고 칭찬을 해줍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을 때 그로 말미암아 일시적이 누명을 쓰게 되었고 애굽 감옥에까지 들어가는 고생을 하게 되었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몸은 감옥에 있었지마는 그 마음만은 화평하였습니다.

옛날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서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화형을 당하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담대하고 기뻤던 까닭은 그 양심이 칭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의 양심은 우리가 가는 길의 선악을 분별해 주고, 잘못할 때 경고해 주고, 가책하고, 잘 할 때 칭찬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양심도 잘못하면 타락할 수 있습니다. 병들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이 경고하는 데도, 책망하는 데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아니하고 죄악된 길로 그대로 행하면 결국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이렇게 되면 양심의 판단이 희미해집니다. 불분명해 집니다. 양심의 기능이 약해지고 맙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양심의 소리, 하나님의 지시가 있을 때 거부할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부하면 그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더러워 질 뿐 아니라 그대로 계속해서 범죄하면 그 양심이 타락하고 말하자면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말하자면 인면수심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아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요한 1장 8절에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셨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하였고 사도행전 2장 38절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어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하였습니다. 물이나 기름을 붓듯이 부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성령을 부어 주심과 함께 지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실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도 세상의 지식 많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라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하나님께서 양심을 통해서 아무리 부르고 외쳐도 듣기를 거절하고 끝내 항거하면 비극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4절에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여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은 사람의 결국아 무엇입니까? 결국 심판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동정 받지 못한 심판과 형벌이 따를 뿐이었습니다.

26절에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이것 이상하지요?

이사야 41장 10절 같은 데를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에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하였고, 이사야 43장에는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하셨는데 왜 하나님이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을 보시며 비웃겠다고, 찾아도 만나지 못하며 불러도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이런 사람을 향해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의를 행한 사람아, 내게서 물러가라”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길 수 있습니다.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12장 14절에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리라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의 열조를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존중히 여기면 내가 너희를 존중히 여기고 너희가 나를 경멸히 여기면 내가 너희를 경멸히 여기리라”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경멸하다가 저희의 종말이 그렇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1장 11절에 형식에 치우치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소위 종교적인 사람들을 향해서 경고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의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행하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31절에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는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였습니다. 심는대로 거두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콩 심었으며 콩 거두고, 벼를 심었으면 벼를 거둘 것입니다. 선을 심었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었으면 악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심었으면 화평을 거두고, 미움을 심었으면 싸움을 거둘 것입니다.

자기 행위의 열매를 자기가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꾀에 배가 부르리라’하였습니다. 수확에는 소위 증수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를 심었으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가운데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는 퍽 교훈적입니다. 흥부는 사랑과 동정의 박씨를 심었더니 축복의 박을 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놀부는 시기와 탐욕의 박씨를 심었더니 문자 그대로 자기 꾀에 배가 부를 정도로 화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결론이 33절에 있습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시편 128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하였습니다. 이런 축복을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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