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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아는 축복 (잠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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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세 번째로 잠언이 우리에게 주시는 충고 적인 말씀입니다. 첫 시간에는 ‘악한 자를 좇지 말라’ 고 경고하였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여호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를 경외함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번 1장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지혜의 필요성과 가치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어떻게 지혜를 찾으며 얻을 것인가’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대로 지혜를 찾고 얻는 것이 약한 표현법에서 강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28장 12절, 20절에 보아도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의 곳은 어딘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23절에 ‘하나님이 그 길을 깨달으시며 있는 곳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1절에서 4절에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마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찾으면”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를 찾는 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은 우선 ‘나의 말을 받으며’ 하였습니다. 즉 참된 사상,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자유의지입니다. 혹 어떤 학생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 선악과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으시고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할 기회를 주셨을까요? 아,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여 타락하게 하고 또 예수를 보내서 구원하신다고 애쓰시고, 뭐 그럴 필요가 있어요? 아, 그저 에덴 동산에는 생명 과실만 열게 해서 그것 따먹으며 살고 아예 범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이런 복잡한 일이 없었을 것 아녜요?”

얼른 들을 때 그럴 듯한 이론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이 말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왜 기계로 만들지 않고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하는 말과 같습니다. 기계는 범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스위치를 누르면 움직이고 끄면 서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내가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스스로 결정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적은 것이나 큰 것이나 여러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 인간에게 부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귀한 것입니다. 이 자유가 조금이라도 침해를 당하려고 할 때는 생명을 내걸고 항거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전에 미국의 패트릭 헨리(Patric Henry)의 말은 참 유명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오.’ 자유는 생명을 주고 바꾸리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짐승들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밖에 있는 다른 짐승보다 행복스러워 보입니다. 우선 먹을 걱정이 없습니다. 때를 따라서 영양을 고려해서 먹을 것을 줍니다. 거처의 불편도 없습니다. 이미 마련된 집이 있어서 걱정 없이 서식할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피해의 위험도 없습니다. 얼른 볼 때 얼마나 편해 보입니까? 그러나 짐승이 말을 못해서 그렇지 만일에 말을 한다면 ‘너 살기에 편하지?’하고 물으면 ‘편한 게 뭡니까? 죽지 못해 삽니다. 이게 사는 겁니까?’ 할 것입니다. 왜요? 짐승도 갇혀서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하는 것을 원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겠습니까? 북한의 경우를 보면 인간의 기본권인 이 자유가 말살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에게 옷이 없고 집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의식주 외에 필요한 자유가 없습니다. 말하고 싶어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이거 사람 사는 맛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라는 귀한 특권이 있는데 이것이 조금이라도 침해를 당하면 못살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홀만 헌트(Holman Hunt)라는 사람이 그린 ‘문 두드리는 예수님’이라는 그림을 여러분은 아마 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이 안으로부터 굳게 조그만 빈틈도 없이 단단히 잠근 어떤 집 문 앞에 예수님께서 바싹 다가서서 계십니다. 마치 그 모습은 안의 동정이라도 살피기 위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기울이고 계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굳게 닫혀진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것도 조용히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끈기 있게 문을 열 것을 기다리시며 두드리십니다. 문을 자세히 보니까 밖에는 손잡이도 없습니다.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문안에 있는 사람에게 달렸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물론 여기의 ‘나’는 주님 또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은 우리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모습을 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사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축복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어떤 때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혹은 친구의 간곡한 권면을 통해서 때로는 우리의 환경이나 내 신상의 질병을 통해서 두드리십니다. 때로는 신령한 노래나 찬송을 통해서 또는 영감이 넘치는 위대한 예술 작품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사실 어떤 때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겠다. 내가 기도해야겠다. 내가 누구를 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나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인간 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예”하는 대답입니다.

믿음은 작정입니다. 정한대로 하는 것이 작정입니다. 문을 열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믿어야겠다고 하기는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믿음의 작정,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나의 말을 받으며’ 했는데 ‘받는다’는 말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과연 주님을 내 마음의 주빈으로 영접합니다’ 하는 영접, 받아들이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귀한 손님 오시면 자연히 방안을 깨끗이 치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을 모시면 자연히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이 같이 있게 됩니다. 한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습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회개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여러분 마음 중심에 받아들였습니까? 삶의 지혜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하였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 말씀을 간직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라야 간직합니다. 싫은 것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도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였습니다. 참된 삶의 지혜를 얻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지혜로운 학생은 배운 것을 연습하면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트를 잘 합니다. 그래서 잊어버렸을 때는 곧 노트를 펴 보아서 지식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꼭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명을 저축하고 모아 두고 정돈하고 소화시켜 나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감명 깊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아니해서 잊어버려 결국 ‘한 귀로 들어와서 다른 귀로 흘러 나가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절에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이 말씀은 우리의 능동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3절에는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다른 번역에 보면 “한편으로는 지각을 불러 구하며 한편으로는 사려심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하였습니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였습니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분들은 다 삶의 지혜를 얻어서 산 사람들입니다. 지식 많은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그 연구실에서, 상인은 그 장사터에서, 군인은 초소에서, 가정 주부는 가정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가 집무하기 전에 두 시간씩 꼭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너무도 유명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니엘이 그처럼 어려운 처지에서도 지혜있게 나라를 다스려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적인 생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에 세번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어 놓고 기도한 때문이었습니다. 지혜를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 4절을 보세요.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하였습니다. 지혜를 얻는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기 있고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광부가 광석을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헤매이고 광맥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은이나 금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 애쓰는데 하물며 은이나 금으로 살 수 없는 지혜를 얻는데 애쓰지 않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지고 잡았다가 놓치고 마는, 그러면서도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세상의 물질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길거리에 앉아서 이것 저것 벌여 놓고 장사하는 노점상을 비롯해서 수천억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합니까?

그런데 값으로 다질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위하여 그만한 노력을 합니까? 저는 저 스스로를 가끔 반성해 보곤 합니다. 내가 주를 위해 책임 맡아 감당하는 것이 장사하는 사람만큼이나 한가?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사도행전 20장 22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것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요기지 아니하노라.” 생명을 내걸고 맡은 사명을 감당하려고 나선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어려움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이것저것 세상에 있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무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지 생명 내놓고 하는데 무서운 것이 무엇이 있고 힘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위대한 일치고 쉽게 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쉽게 무엇을 할 수 있다면 위대하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간직해서 그대로 살려 힘쓰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생명을 걸고 지혜를 찾으면 어떻게 됩니까?

5절에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며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축복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므로 배워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야다’를 헬라어로 ‘기노스코’라 말했는데 이것은 동양적인 표현으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욥도 “내 주는 살아 계신 것을 내가 안다”고 하였습니다(요한 복음 17:3). 하나님을 알게 되는 축복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어떤 훌륭한 사람을 하난 알아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사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 하나님은 6절 말씀처럼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시는 분’ 이십니다. 고대인들이 섬기던 사람들에게 계시하지 않을 만큼 인색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알고 그 앎을 통해서 그를 소유하도록 자기를 계시하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7절 말씀대로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속하시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모든 건강과 행복으로 채워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보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방패가 되십니다. 언제나 전쟁을 경험해 온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방패로 표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시편 18편 2절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33편 20절 “...여호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여러분의 방패가 되십니까? 이 하나님은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십니다’

오늘 저녁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축복을 얻기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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