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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있는 사람의 길 (잠 0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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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있는 사람의 길(잠 2:10-22)-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지난 시간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세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부터 지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10절, 11절을 봅시다.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모든 악에서부터 지켜 주시는데 그 조건이 있어요. 10절 상반절에 있는 말씀대로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하였습니다. 지혜가 우리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무엇을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을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생활이 하나님의 명령권 안에 있을 때 즉 내 마음의 보좌에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있을 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면 지식이 우리의 영혼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우리 마음 중심에 모시고 그의 명령 따라 사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신앙생활인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의에 의한 마지못해 하는 일이 아니라 자의에 의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마음에 없는 사람이 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괴롭고 힘이 들고 모든 것이 아깝고 마음이 불편하겠어요? 주님을 우리 마음에 억지로 보실 수는 없지만 만일 억지로 모셨다면 얼마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고역이겠어요? 아, 다른 것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야 되고 어떤 단체에 가입하려면 거기에 또 시간과 물질을 허비해야 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회 다니는 것은 시간 허비요 금전 낭비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없을 때는 모든 것이 공연한 수고를 하는 것처럼만 느껴지고 그 마음속에 즐거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내 마음 중심에 기쁜 마음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영혼이 얼마나 즐겁습니까? 반가운 사람이 짐에 오면 왜 그다지도 기쁩니까? 그를 대접하고 그와 시간을 같이 하며 지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왜요?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신앙생활이 즐거운 일이지마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겐 신앙생활이 즐거움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펴보십시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겐 노예적이고 모두가 의무적이지마는 사랑이 있는 사람에겐 자유와 기쁨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에겐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하다고 하더라도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기쁜 일이 될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의 영혼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난 시간에도 생각했읍니다마는 8절 말씀대로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 말씀 안에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부터 건져 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왜요? 주님은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나.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얼마나 분명한 보장입니까?

2.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험과 유혹에서 우리를 지키며 보호해 주십니다.

전도서 9장 16절에는 “지혜가 힘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병 안에 물이 가득 담겨 있으면 공기는 다 빠져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그 병에서 물이 쏟아지면 그 순간 공기가 가득히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말하자면 두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 광명과 암흑, 의와 죄, 그런데 우리는 이 중에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게 마련입니다. 마음의 집이 비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내리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사랑으로, 광명으로,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과 미움과 암흑의 세력이 우리를 점령하여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다가 12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와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 하였습니다. 유혹의 올무가 많습니다. 남자, 여자, 청년, 장년, 노년,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행로를 살펴보면 이 시험으로 말미암아 넘어진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많고 죽어 냄새나는 사람도 많고 시험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생의 비극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떠했던지 오늘 저녁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이 앞으로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험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마태복음 4장이나 누가복음 4장을 읽어보면 시험하는 자가 우리 주님에게도 와서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실 때 시험했습니다. 하와도, 아담도, 모든 선지자들도, 모든 성도들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이나 본능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악한 영, 즉 사탄이 있어서 우리를 시험에서 넘어뜨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엄히 경계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귀란 놈은 기쁠 때는 기쁨을 통해서 슬플 때는 슬픔을 통해서 불안할 때, 괴로울 때를 이용해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이란 밖에서도 들어오지만 내 마음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조카 롯은 푸른 풀밭에 유혹 받아 소돔과 고모라로 갔었습니다. 말하자면 물욕에 시험을 받았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식욕에 그만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 미혹이 되어 충복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그는 정욕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선생님 예수를 팔았습니다. 금욕에 빠졌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지위욕에 미혹이 되어 주님께 잘못 구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안목의 정욕에 끌려 그만 시험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7-10절을 읽어보세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애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위 전쟁 술어로 전격전을 써야 합니다. 시험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이기신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탄의 말에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였습니다. 즉시 물리쳐야 합니다. 우물우물 하다가는 넘어집니다.
인도 속담에 ‘코끼리는 코가 들어오면 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꼭 그렇습니다. 처음에 우리의 마음을 두드릴 때 그때 우리 마음에서 물리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12절에는 ‘악한 자의 길’ 이라고 단수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13절에는 ‘이 무리는’즉 복수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 하나인 것 같지만 나중에는 큰 무리가 됩니다. 죄라는 것 병균과 같아서 처음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무시해도 될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커져서 생명을 빼앗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언제 침입할 지 모르는 북괴와 대항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방위세를 지출해서 시설을 확보하고 군인들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국력을 키워야 합니다. 병을 예방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위생에 조심해서 건강을 잘 지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병균이 침입합니다. 모든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철저히 해서 우리의 심령이 튼튼하고 우리의 믿음이 건전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시험이 들어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 때 하루의 일을 준비하는 아침 시간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꼭 얼마씩이라도 읽어 우리의 심령을 튼튼히 무장한 후에 세상에 나아가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로마서 12:11) 그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거기에 열심히 일하고 충성되면 시험에 들 사이가 없습니다. 왜 시험에 듭니까? 대개의 경우 자기의 할 일은 안하고 한가히 지내다가 시험에 듭니다. 학생이 공부 안하면, 군인이 직무 수행 안하면, 공무원이 책임 감당 안하면, 가정주부가 가정의 일 등 안하면 시험에 듭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시험에 들 여가가 없습니다. 한가히 예수 믿는 사람 시험도 많습니다.

전에 어떤 나라 젊은 재상이 지혜 있는 나이 많은 왕에게 시험이 들지 않는 교훈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이 많은 지혜로운 왕은 젊은 재상에게 잔에 가득한 기름을 주면서 이것을 들고 지시하는 거리를 한시간 안에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름은 쏟아 뜨려도 안되고 시간이 늦어도 안되고 만일 어기면 당장 칼이 목에 내린다고 엄히 명령했습니다. 뒤에는 군인이 칼을 뽑아 들고 따라갔습니다. 이 젊은 재상은 지시한대로 하느라고 땀을 흐리며 다녀왔습니다.

그때 그 왕이 웃으면서 수고했다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묻는 말이 ‘아무 거리의 구두가게, 쌀파는 집, 생선가게, 가구점 등을 보았느냐?’ 그때 이 젊은 재상 하는 말이 ‘못 봤습니다. 볼 새가 있어야지요?’ 했다고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사명 부지런히 하고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나 내 직장에서나 내 가정에서나 내가 맡은 책임을 충성되게 부지런히 전 정력을 다해서 하는 가운데 자연히 시험을 받을 새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공격은 언제나 최선의 방비’라는 전법이 있습니다.

3. 끝으로,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아는 법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 안에 산다고 하면 그것이 밖으로도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즉 모든 악한 일에서 떠나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철은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악한 자의 길, 패역을 말하는 자, 어두운 길, 행악하기를 기뻐하는 악인, 구부러진 길, 행위가 패역한 자, 사람을 호리는 음녀에게서 건지십시다. 어떻게 요셉이 어려운 시험 속에서도 바로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얻은 지혜와 명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바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어두운 사회에서 혜성과 같이 빛나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로 승리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사실 햇빛이 있을 때는 별빛이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해가 서산에 지고 온 누리가 어두워질 때 별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과연 우리가 처해 있는 그곳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참빛을 발합니까? 빛의 열매를 맺습니까? 우리의 행위만 보아도 빛의 자녀로 인정받을만 합니까?

여기 마지막 부분의 말씀을 분명히 들으세요. 20절에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궤휼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 이 말씀은 2장 전체의 요약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땅에 거하며’ 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땅에서 끊어지리라’ 하였습니다. 시편 1편에는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느 길을 걷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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