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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의 교훈과 하나님의 약속 (잠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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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교훈과 하나님의 약속(잠 3:1-10)-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잠언 3장 1-10절의 말씀은 지혜로운 교훈과 그 교훈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다섯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차례로 생각할 때에 우리 삶에 대한 지혜를 얻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축복을 다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91편 14절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이 얼마나 고마운 약속입니까!

시편 50편 14절에서 15절에는 “감사제로 하나님께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이 얼마나 고마우신 약속입니까? 주님께 나아 오기만 하면 돈 없는 자도 좋은 것을 먹을 것이고 즐거움을 얻을 뿐 아니라 영혼이 사는 축복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성경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 그 명령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고 그 법을 순종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고 특히 우리 신교에서는 말씀의 선포 시간을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여깁니까? 그렇지 아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미 들은 말씀이지만 또하고 또하고 하는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고 항상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어야 그 말씀을 언제고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어야 해요. 배워야 해요. 따로 외워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씀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힘쓰십니까?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은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어떤 복이요? 시편 1편에는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는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장수와 평강을 약속하였습니다. 장수는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구나 오래 살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동양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오복 가운데 첫째 복이 수(壽)입니다. 오래 사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그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지 이제 더 살아서 무슨 낙이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제 자식들 앞에서도 늘 ‘이젠 나는 죽어도 한이 없어. 빨리 죽어야지’하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거짓말이 셋이 있다고 하지 않아요? 장사하는 사람이 물건 팔 때 ‘이거 본전에 팝니다’ 하는 것, 처녀가 ‘나는 시집 안가요’하는 말, 노인이 자녀에게 ‘어서 빨리 죽어야지’ 하시는 말씀인데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본능적인 욕망입니다.

시편 21편 4절에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강을 아울러 주신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장수 그 자체가 복이 될 수 없을 때도 있기 때문이에요. 옛 사람이 말한대로 ‘수즉다욕(壽則多辱)’이에요. 즉 마음에 평강이 있을 때 오래 사는 것이 즐거움이 될 수 있지 마음이 괴로우면 오래 살면 살수록 욕이 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의 마음에 평강이 있어요? 하나님의 법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육신의 정욕이 세상의 생각이 그 마음을 지배하면 그 마음에 평강이 있을 수가 없어요.

3절에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하였습니다. 여기 ‘인자’란 말은 동정, 혹은 불행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또는 사람이 잘못한 것이 있을 때 그 잘못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량있는 정신을 보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말의 진실, 마음의 진실, 행위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에게 대한 자세를 말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 같이 가슴아파 할 줄 아는 마음의 자세, 동정심(Compassion)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아브라함 링컨의 노예해방 운동의 동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식없이 진실되게 하라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4장 15절에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축복을 받는다고요?

4절에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는 은총이 될 것이요 사람 앞에는 칭찬이 될 것입니다. 이 양자는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칭찬 속에 반영되지 아니한 하나님 앞에서의 명성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지표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 앞의 칭찬은 무가치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예수님께서 자랄 때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14장 18절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하였습니다. 즉 인자와 진리와 사는 인간입니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시편 62편 8절에도 “시시로 저를 의지하라” 하였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부딪치는 풀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셀 수 없는 갈림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수많은 주장들이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고통스러운 의무들이 우리를 당황케 하며 때로는 우리 인간이 불어 대는 바람 앞에 흩날리는 낙엽같이 미약한 존재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를 위해 살아야 할 줄을 알면서도 불의에 가담하기가 일쑤며, 진리를 외쳐야 할 줄 알면서도 어두운 세력에 위협을 느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처참한 모습을 우리 스스로 발견하고 한심스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햐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는지 알지 못하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음날을 대담하게 맞아야 하고 앞날을 계획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삽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분명히 알고 계실 뿐더러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범사에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불안, 초조, 긴장이 있기 마련입니다. 평강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의 마음은 평안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튼튼한 손에 붙들려 캄캄한 밤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붙들려 길을 가는 어린아이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걱정하지 아니합니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은 미래를 모르면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담대하게 걸어가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인 면으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성실한 마음으로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법으로 내 계획대로 지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대로 인도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면 먼저 내 자신을 믿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의 지성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지성을 성령께서 밝게 비쳐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육에 있어서 신뢰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합니다. 나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 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먼저 나를 의지하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면으로 “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인격 전체로 그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그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고 내게 유리하면 따르고 불리하면 따르지 않고 합리적이면 순종하고 비합리적이면 순종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가 고기잡이 하다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말이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했더니 많은 고기떼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의지하는 사람은 그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실 때 그 땅이 어딘지 알지 못하면서도 묻지도 아니하고 떠났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길을 지도하셨습니다. 인생 행로에 하나님의 지도를 받은 사람은 길을 잘못들 염려도 없었고 실족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명철따라 걸어간 사람의 대부분은 실족하여 넘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어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지 마세요. 이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세요. 그의 지도를 따르세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요셉의 성공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승리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의 값이 얼마나 무서운 것을 알기 때문에 악에서 떠납니다.

끝으로 9절, 10절을 보십시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조건적인 길이요, 다른 하나는 조건적인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한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 조건적인 축복의 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렇게 하라... 그리하면 어떻게 축복하겠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신뢰하면 그도 우리를 신뢰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영화롭게 하면 그도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재물을 드리면 그도 우리를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첫 열매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드리도록 명령을 받았고 또 이대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히 주시리라 믿었습니다(말라기 3:10-12). 구제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 19장 17절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성으로 공경합니까?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잊어버리지 않고 지키십니까?
내 생각과 생활이 인자와 진리로 떠나지 않게 합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십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우리의 재물로 처음 익은 것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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