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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를 얻은 사람의 의무 (잠 03: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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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얻은 사람의 의무(잠 3:27-35)-박조준 목사
 
오늘은 우리나라의 가장 즐거운 명절 가운데 하나로 온 국민이 흥겹게 지내는 추석입니다. 추석 때는 우리나라의 기후로 보아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아마 1년 중 가장 날씨가 졸고 살기에 알맞은 계절이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추수하는 때이므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잠시나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음력으로 8월 15일을 한가위 즉 8월의 가운데라고 하는 중추절이라고도 하는데 계절로 보아 가을의 한 중간쯤 되기 때문에 맑은 하늘에서 유난히도 밝은 달을 몰 수 있으므로 추석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자란 평안도에서는 추석 달을 제일 먼저 보면 처녀가 시집가서 첫아들 낳고 잘산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왔었습니다. 그래서 동리의 처녀들이 시집가서 맏아들 낳고 싶은 생각은 있고 그렇다고 내놓고 달구경 먼저 하겠다고 나서기는 쑥스럽고 해서 처녀들이 일찍 저녁을 지어먹고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그머니 어딜 가는데 동산 꼭대기 나무숲에 몰래 숨어서 달맞이 먼저하고 내려오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어요. 온 동리 처녀들이 다 그렇게 슬그머니 올라가서 달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구경을 하는데 아마 속으로는 ‘내가 제일 먼저 보았다’하며 흐뭇해서 집으로 내려오겠지만 사실은 다같이 보았을 거예요(오늘은 6시 25분에 달이 뜨고 9시 52에 만월이 된다고 합니다. 처녀는 시집가서 아들 낳고 싶으면 오늘 밤 9시 52분 정각에 살그머니 숨어서 달을 보세요).

옛날 신라 시대에는 추석때 부녀자들이 두편으로 갈라서 길쌈내기를 해서 지는 편에서는 음식을 잘 만들어 이기는 편을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유리왕 9년(주후 32년)에 길쌈내기가 시작되었는데 이 길쌈내기에는 왕비들까지 가담해서 양편 부녀자들의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고 합니다. 추석이 되면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노래와 춤의 재주를 겨루었으므로 이 놀이를 가배(嘉俳)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추석을 가배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석 8월 한가위는 옛날부터 우리 겨레가 지켜 내려오던 건실한 국민적인 즐거움과 감사의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하루를 즐겁게 지내는 것입니다. 추석은 조상의 은덕을 추모하는 계절입니다. 감사와 환희의 계절입니다. 그리고 근로 정신을 고취하는 명절입니다. 명절의 뜻을 잘 알고 지키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지혜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을 생각했고 그 지혜를 얻은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지혜를 얻은 사람은 장수과 부귀, 기쁨과 영생, 생명 나무와 평화, 그리고 형통의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참 지혜를 얻은 사람이 이행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언서의 여섯 번째 충고적인 강화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중요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27-30절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지혜를 얻은 자의 행해야 할 의무라고 말씀하였고,
31-35절은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 행위를 좇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데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해 내려오다가 요한 1서 4장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경고하면서 마지막 때에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형제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말로 사랑하면 됩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됩니까?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해야 합니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거짓말이 되고 행함은 있으나 진실함이 없으면 형식적이 되기 때문에 행함과 진실함이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7절에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하였습니다. D.L.무디는 “많은 사랑은 혀 끝에 있고 참 사랑은 손 끝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하라고 하지도 아니하십니다. 내게 없는 것 내놓으라고 하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모세가 할 수 없는 것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하셨습니다. 내 손에 주어져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것으로 이웃에게 주면 됩니다.

베데스다 광야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해는 저물어 오나 먹을 것이 없이 있을 때 민망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가’,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야? 200데나리온 가지고도 모자랄 정도인데 호주머니에 없는 돈을 어디 가서 구해오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름 모를 소년의 손에 있었던 보리떡 다섯, 생선 두 마리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서 내놓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습니다.

“네 손이 베풀 힘이 있거든,” 힘이 있을 때 일하란 말씀이고 힘이 있을 때 선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즉 여기서 말하는 힘은 돈일 수도 있고, 권세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은 모든 종류의 선, 모든 성행, 모든 자비스런 행동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청지기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그렇습니다. ‘돈’이란 ‘돈다’는 데서 나온 말 같습니다.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경제 순환, 자금 순환이 잘 되어야 경제가 잘 성장합니다. 어느 한 곳에 사장되어 있으면 그만큼 사회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돈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돌고 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있을 때, 힘이 있을 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신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요. “제가 예수 믿기는 하면서도 이 진리를 모르고 살 때는 그저 바칠 줄도 모르고 남을 도울 줄도 모르고 그저 내게 있는 것으로 나만 잘 살면 될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 때는 돈이 좀 넉넉히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육신을 즐겁게 하나 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 다 없어졌는데 뒤늦게야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선한 사업을 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 가슴 아픕니다.” 그렇습니다. 힘있을 때 선을 행해야 합니다. 힘이 없을 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28절을 보세요.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네게 힘이 있을 때 선한 일을 행하기를 연기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3절과 신명기 24장 14-15절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옛날부터 “주인의 배가 부르면 조의 배가 고픈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많이 나아졌습니다마는 소위 악덕 기업인들은 고용인들의 임금을 잘라먹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으로, 기독교 윤리적으로 볼 때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것도 기업주 자신이 자산을 다 빛으로 갚아 먹을 것이 없어졌다면 모르나, 동정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게 재산 도피를 시키고 고용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입니다. 그들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값을 사모합니다. 요사이 말로 월급 생활을 하는 사람 월급날이 가까워 오면 얼마나 그 날을 기다리는지 아십니까? 더구나 ‘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9절 “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네 이웃을 모해하지 말라.”악을 조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는 ‘모해한다’의 히브리어는 ‘경작한다’는 뜻인데 거짓을 밭가는 것, 악을 뿌리는 것과 비교가 되는 말입니다. 악을 밭가는 것은 선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에와드(Eward)나 델리쥐(Delitch) 같은 분은 ‘악을 고안해 내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즉 “그가 너를 믿으면서 살고 있거든”(벌게이트역, 70인역). 친구가 믿고 있고 전혀 의심도 갖고 있지 않는 때 그를 해치는 것은 가장 큰 배반 행위입니다. 잠언 16장 29절에는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죄의 성질은 이상합니다. 자기 혼자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춰서 꾀어서 자기와 함께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하려고 합니다. 워드로우(Wardlaw)가 말한 것처럼 “마귀가 하와를 그렇게 속여서 범죄하게 하고 하와가 아담을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30절에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이 말씀은 29절 말씀을 분명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먼저 나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과 다투거나 싸워서는 안됩니다. 이 훈계의 악의와 시기, 그 밖의 다른 이유로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는 사람들과 종일토록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에 사도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색은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퍽 소극적인,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신약적인 사상은 적극적입니다. 가령 오늘 본문처럼 “사람이 네게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까닭없이 다투지 말라”했는데 신약적인 사상은 이보다 적극적입니다.

로마서 12장 20-21절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기독교 정신입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레위기 24:20, 신명기 19:21)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 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져가게 하며...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이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세입니다.

그리고 31-35절까지는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 행위를 좇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얼른 생각할 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겠는가?”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의를 위해 살며 정직하게 행해 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죄악을 행하기를 떡 먹듯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권세도 누리고 재물도 늘어나고 건강하게 살아간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우주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장하신다고 하면 어떻게 이런 것을 보시면서도 묵인하고 계실까?” 의심을 하게도 됩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나 이는 애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이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공감이 갑니다.

여러분! 그런데 성경 말씀 몇 곳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잠언 23장 17, 18절에 “마음으로 죄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악인에게는 장래가 없습니다.

잠언 24장 1절에는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지어다” 하였습니다.
 
19-20절에는 “너는 행악자의 득위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하였습니다.

시편 37편 전편을 읽어보세요. 우리에게 시원한 대답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32절 이하의 말씀은 죄인의 상태와 성도의 상태를 비교해서 말씀했습니다.

패역한 자는 여호와가 미워하고 정직한 자는 그와 교통이 있습니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고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습니다.
거만한 자는 하나님이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미련한 자의 현달은 욕이 되고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네 가지 성도의 소중한 덕

1. 지불 기간 엄수. 품꾼의 임금. 계약을 한 상인의 빚. 친구, 친척의 약속한 돈.
2. 이웃에 대해 양심적임.
3. 평화를 좋아하는 정신.
4. 부러워함으로 안달치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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