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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가지 길 (잠 0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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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길(잠 4:10-27)-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은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봅니다. 이것은 성경의 주된 사상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두 길이 있습니다. 시편 1편을 보면 복있는 사람의 길과 악인의 길을 말하면서 복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겠다고 하였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0장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물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택하라”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여기도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의 마지막은 생명이고 넓은 길의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아니하든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결국 두 가지 길 뿐입니다. 생명의 길 아니면 사망의 길, 축복의 길이 아니면 저주의 길, 좁은 길이 아니면 넓은 길, 의인의 길이 아니면 악의 길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 노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적은 데서부터 큰 데까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사사건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가령 오늘 저녁 예배당에 나오시면서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여러분 자신이 선택합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교를 진학할 때 어느 학교를 택하고 어느 과목을 전공하는가 하는 것도 여러분 자신이 정해야 합니다.

청년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결혼 상대를 택하는 것도 본인들이 해야 합니다. 어제 밤에 어느 가정을 심방 갔는데 맏딸이 지금 이화여대를 다니는데 지금 졸업반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있다고 해요. 이야기 끝에 그 학생 결혼 이야기가 나왔어요. 요사이 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수줍어하는 것도 전혀 없고 신이 나서 그러더군요. 같이 가셨던 목사님께서 “학생은 지금 누구 정한 사람 있어요?” 물으니까, “아직 없어요”라고 대답해요. “그러면 어머니가 정해 주시는 분이면 누구나 좋습니까?” 했더니 눈을 똑바로 뜨면서 “아니요, 내 맘에 들어야지요.” 또박또박 대답해요. 그래 한참 웃었어요. 그런데 사실 그 학생의 말이 옳아요. 자기가 같이 살 것인데 자기 마음에 들어야지요.

그런데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대학생들의 결혼관을 조사하는 중에 상대자의 직업을 조사해서 통계를 냈는데 가장 많은 것이 사업가 그 다음이 외교관 이것이 대부분이라면서 그 분의 평가가 여학생의 경우 돈과 허영에 들뜬 현상을 지적하였습니다. 어쨌든 청년기에 배우자를 바로 택해야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사회를 위해서 큰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 번 잘못하면 크게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선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택 뒤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선택할 때는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알고 택해야 합니다.

전에 에서 같은 사람은 배고픈 김에 시장한 것을 못 이겨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전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눈에 보이는 것, 당장 유리해 보이는 것만 택했다가 나중에 큰 망신하지 않았어요? 이것은 롯 뿐만 아닙니다. 오늘도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항상 유리한 면만 택했다가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 방면에 꼭 옳은 선택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청년 요셉은 육신을 택하느냐 하나님을 택하느냐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애매한 고생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하지 않았습니까?

청년 모세를 보세요.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자리를 택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인가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겨 이스라엘 민족 편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상주시는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청년 다니엘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을 때, 그 나라의 유능한 청년들을 3년동안 훈련(합숙)시키는데 포로되어온 사람 중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특별히 선발되어서 훈련받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거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포로로서 학대받아야 할 처지인데 바벨론의 우수한 청년들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훈련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느부갓네살왕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먹는 식사에도 왕이 간섭하면서 잘 대접하게 하여 몸이 조금도 축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이 지정하여 자기가 먹는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세에 그 나라에서 먹는 고기나 마시는 포도주는 우상 앞에 놓았던 것이므로 이것으로 몸이 더럽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아니 본국이라면 모르지만 포로되어 온 신세에 이렇게 왕으로부터 특별히 선발되어 훈련받은 것만도 다행 한 일인데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그럴 것이 있나? 더구나 이 나라에서 우상 앞에 그러면 고기는 전연 안 먹고 포도주는 아예 마시지 말고 살아야 하나? 그저 당분간 적당히 해 나가다가 기회를 봐서 해야지 공연히 왕의 마음만 건들면 우리만 손해날텐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저희를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어려운 편을 택했습니다. 결국은 그가 승리하였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다른 선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적인 견지에서 내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길, 의인의 길을 택하라”고.

11-13절 “내가 지혜로운 길로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첩경으로 너를 인도하였은즉 다닐 때에 네 걸음이 곤란하지 아니하겠고 달려갈 때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이, 그리고 강하게 도전하여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길, 정직한 첩경, 의인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은 당시 눈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보이는 것,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유혹할 때 이미 택했던 길, 잡았던 것도 자신도 모르게 놓쳐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3장 12-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의인의 길은 어떠합니까?

18절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해는 빛을 의미합니다. 빛은 진리와 순결, 희락과 생명을 뜻합니다. 즉 주된 사상은 거룩한 기쁨일 것입니다. 더구나 의인은 언제나 빛 가운데서 행하지만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들의 행위가 들어날까봐서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전에 로마의 케트(cate)장군은 이웃 사람이 자기의 정원을 들여다보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나 공개할 만큼(이것은 자랑이나 위선도 아니라) 여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의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주신 말씀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는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는 말씀은 성장을 의미합니다. 해가 뜨기 전에 해는 보이지 않으나 온 누리가 훤히 밝아 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뭐라고 분명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은 마음도 평안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다른 이를 돕고 싶고 한단 말이오. 그러나 그 단계가 지나면 아침해가 먼동에 떠오르는 것처럼 점점 더 밝아지고 대낮이 되는 것처럼 원만하게 아주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인의 경건이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은혜에 성장이 있습니다. 점점 더 깊은 은혜, 풍성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지식의 성장이 있습니다. 진리의 빛은 성장하는 빛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지나는 동안에 점점 더 밝히 알게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하였습니다.

기쁨과 평안에도 성장이 있습니다. 점점 더 큰 기쁨,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찬송가에 있듯이(예수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사랑하는 부부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신혼 때가 제일 사랑이 큰 것 같지만 원만한 가정은 10년, 20년 지나는 동안에 원만한 사랑으로 익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의 은혜 많이 받아서 좋습니까? 주님을 알게 되어 감격스럽습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앞으로 점점 더 풍성한 은혜, 저 많은 지식, 더 큰 기쁨, 더 깊은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끝으로 생명의 길, 지혜의 길을 걷는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였습니다.

마음은 생활의 중심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육신의 주인인 이 영혼이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집주인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병 고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돈 들여 집수리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생활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심령의 심각한 병은 생각지 않고 육신의 조그만 병 때문에 고민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눈물 흘리는 사람 없습니까? 내 심령의 병 때문에 눈물을 흘려 본 적 있습니까? 속사람 새롭게 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천막처럼 낡아빠질 육신, 겉사람 다듬느라 얼마나 애쓰고 물질을 낭비합니까?

우리의 마음, 이 심령을 바로 지켜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심장이 왕성한지 약한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에 따라 모든 기관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 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깨끗한 피가 흘러 나와 원리의 대정맥을 지나 행실의 모세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지킬까요?

1. 깨끗이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씻음 받아 깨끗하게,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에서 씻음 받을 수 있습니다.

2. 진실되게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성은 진실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충성과 통하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진실한 마음으로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충성되게 해야 합니다.

3. 부드럽게 지켜야 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피부는 거칠어도 부드러운 마음씨를 가지라.”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와 반대입니다. 마음은 상관하지 아니하고 피부만 부드럽게 하려고 기름을 바릅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들으십니까?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타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의 기름을 발라 부드럽게 하십시다.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거칠어지지 않았습니까? 강퍅해지지 않았습니까? 신경질만 남지 않았습니까? 부드럽게 간수합시다.

① 24절에 입을 지키라. 왜냐하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말에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야고보에는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② 25절에 눈을 바로 보라고 하였습니다. 현실의 득실보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만을 응시하는 눈이 되라고. 위엣 것을 바라보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높은데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향상합니다.

③ 26, 27절에 발의 첩경을 평탄케 하고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청년 시절은 인생의 분기점입니다.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요, 넓은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말하자면 좁은 길입니다. 절제, 극기, 훈련의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길이 싫어서 보통 넓은 길, 절제도 극기도 필요 없고 걷기 쉬운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걷습니까?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의 올바른 방향을 정했습니까? 생명의 길을 택했습니까? 아직 머뭇거리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온전한 생명의 길을 택하기로 결단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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