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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잠 06: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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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자연계를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은 가장 작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때는 하늘을 바라보며 수억의 별들이 자기의 궤도를 지키며 충돌 없이 운행하고 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우주를 주장하시는 놀라운 역사와 질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기도 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주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온 우주 만물을 바라볼 때 인간의 존재가 지극히 희미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의 손으로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것을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시편 121편에는 시인이 눈을 들어 산을 바라봅니다. 그는 푸른 나무들과 우람찬 바위들만 본 것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도와주시는 사실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낮의 해가 밤의 달이 해치지 못하게 우리 우편에서 나무 그늘처럼 지켜 주신다고, 바위가 변하지 아니하고 우뚝 솟아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금만 아니라 영원토록 그의 출입을 지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자연의 큰 것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을 통해서도 교훈하고 계십니다. 사실 자연계의 모든 것 하나 하나를 자세히 보면 심오한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고 자연 과학자가 과학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읽은 말씀은 미물의 곤충인 개미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큰 데에서도 작은 데에서도, 높은 데에서도 낮은 데에서도, 넓은 데에서도 좁은 데에서도, 강한 데에서도 약한 데에서도, 오랜 데서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데서도, 보이는 데서도 안보이는 데서도, 들리는 데서도 안들리는 데서도 귀한 진리를 배우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합니다. ‘나는 이제 다 배웠다. 배울 것이 없다’ 하는 사람은 그 때부터 성장이 정지되고 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만 배울 것이 아니라 나이 많은 사람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개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입니까?

6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하였습니다. 게으른 자를 향해 말씀한 것을 보니까 우선 개미의 부지런함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개미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부지런한 것의 상징적인 곤충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도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근면을 나타내는 독일어는 amessi인데 이것이 개미의 이름에서 왔다고 합니다. 개미는 힘이 없어 보이는 곤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센지 모릅니다. 여러분, 개미가 먹이를 운반하는 것을 보셨어요? 자기 몸보다 몇 배, 아니 때로는 몇십배 되는 것을 물고 가는 것을 보면 장관입니다. 더구나 그 부지런함을 모세요 새벽이 되어 동녘이 훤히 밝아오면 그때부터 활동하기를 시작하는데 저년 해가 져서 온 누리가 어두워질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일을 합니다.

더구나 개미는 예비성있는 부지런함이 있습니다.

개미는 비오는 날을 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합니다. 추워 일 할 수 없는 겨울을 위해서 부지런히 준비를 합니다. 물론 개미는 본능적으로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본능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앞을 내다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의로 장래를 준비할 의무가 있습니다. 혹 어떤 분들 중 성경을 오해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 산상보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하셨는데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내일도 이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는 퍽 교훈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해의 농사가 잘 되어서 그 동안 사용하던 창고가 좁으니 어떻게 할까 하다가 큰 창고를 다시 짓자 하고 새 창고를 지은 후에 곡식을 거기에다 저장하고 그의 영혼을 행해 말했다고 합니다. ‘내 영혼아, 잘먹고 마음껏 즐겨라 먹고 쓸 것을 넉넉히 저장해 놓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창고에 저장해 둔 것이 자기 때문인 줄로만 생각한 것이 어리석음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떻게 도울까 하는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았으니 내일도 의례히 살고, 금년 살았으니 내년도 당연히 살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살기는 하루만 사는 것처럼 살고, 일은 영원히 살 것처럼 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내일 죽는데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우리의 수입을 하루살이로 쓰지 아니하고 장래를 준비하는 것은 지혜 있는 말입니다. 물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분에게는 퍽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저축할 수만 있으면 힘서 저축할 줄 아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미 작고하신 숭전대학 교수로 계시던 김 양선 목사님한테 이런 말씀을 들은 기억이 있어요. 김 목사님은 결혼 주례를 할 때 꼭 하시는 말씀이 하나 있는데, 가정을 이루면 그날부터 수입의 25%는 저금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권면하신다고 합니다. 전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는 우리 국민들을 향해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은 수입의 30%는 저축하자고 하셨다고 합니다. 저축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장래성이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도 그러합니다. 현세적인 준비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준비입니다. 자연의 겨울을 위해 준비하는 생활의 지혜가 필요한 것처럼 영적인 겨울은 보다 무섭고 추운 겨울인데 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겨울이 온다고 월동준비는 서두르면서도 언제 올지 모르는 그러나 반드시 오고야 마는 죽음의 겨울을 위해 준비를 잘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에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속히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이 나에게 마지막 저녁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의 겨울을 위해 여름 동안에 잘 해야 합니다. 언제나 여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미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는 생활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개미는 자기 재능만큼 일 합니다. 개미가 이런 예배당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개미집은 만듭니다. 옛날 격언에 ‘네 손으로 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부여된 재능, 바로 그것을 가지고 일하라고 하십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봉사하면 됩니다.

그리고 개미는 위험 중에서도 부지런히 일합니다.

사람이 부주의해서 한 번 잘못 밟으면 개미 온 동네가 파괴되고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개미가 죽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 속에서도 부지런히 일합니다.

개미는 끈질기게 일합니다. 자기보다 큰 무거운 짐을 가지고 허우적거리며 포기하지 아니하고 운반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인생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어쩌다 개미집이 무너지면 낙심하지 아니하고 즉시 집을 다시 만들기 시작합니다. 개미의 끈질김은 배울 만 합니다.

더구나 개미는 협동해서 일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지만 협동은 아주 잘합니다. 교회도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잘 협동해서 일하므로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은혜스럽게 지내는 것은 어느 한사람 때문이 아니라 온 교회가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협동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가령 지금 우리 교회가 근 7,000대의 식구를 거느리고 있는데 우리 교역자 몇 사람이 도저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1,500명의 구역 책임자 여러분이 그때그때 잘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온 교우들이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기 때문에 이처럼 부흥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지런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내일을 위해, 후손을 위해 준비해야겠습니다. 각자가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일해야겠습니다. 어떤 위험,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두려워 말고, 낙심 말고 끈질기게 일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고 큰 힘을 모두 모아서 협동해서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게으른 자는 오래오래 잠자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9절에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하였습니다.

게으른 자는 아무리 쉬어도 쉰 줄을 모릅니다. 10절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윌링톤은 “나는 더 자고 싶을 때 그 때에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게으른 자에게는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절도같이 몰래 오는 것이 아니고 강도같이 분명히 무섭게 빈궁이 오고 준비 없는 사람에게 군대가 침입하면 속수무책으로 손을 들고 마는 것처럼 곤핍이 다가온다고 하는 뜻입니다. 게을러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를 싫어하십니다. 개미에게서 부지런함을 배웁시다.

그리고 16절에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율 칠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대로 보면 일곱 가지입니다. 아주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흔히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추상적이기 쉬운데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유전성을 인정치 않는 증거입니다. 흔히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자신이 불쌍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가 있습니다. 사실 이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른 회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보통 유대 사람들이 만수(滿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열거된 일곱 가지 죄는 모든 죄를 다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눈으로 짓는 죄, 발로 짓는 죄, 생활로 짓는 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에 일곱 가지 죄를 하나씩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 반성해 보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뭐예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은 하나의 과잉입니다. 그것은 건전한 자기 평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교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하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보통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된 줄로 생각합니다. 재물(물질적 우월감), 지식(정신적 우월감), 권세(사회적), 인물(신체적) 모두가 따지고 보면 자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 둘째는 무엇입니까? 거짓된 혀입니다.

거짓말 하는 것,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은 진실함에 있습니다. 거짓이 뭐예요?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입니다.

즉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손으로는 부지런히 일하라고 만든 것입니다.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을 이 손으로 만들고, 글을 쓰고, 수술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손을 들어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서 이웃과 겨레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긴한 손으로 남을 돕는데 쓰지 못하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그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우리의 마음을 ‘사상의 대장간’이라 하였습니다. 이 대장간에서 좋은 것을 베려하면 선인이 될 것이고 나쁜 것을 베려하면 나쁜 사람, 악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대장간에서는 무슨 기구를 만들어 내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구를 만들어 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기구를 만드십니까?

다섯째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입니다.

남을 돕고 봉사하는 일에는 발이 천근 만근 된 것처럼 무거워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남을 해하는 일이 있으면 그 발이 얼마나 빠른지 도시락 싸 가지고 이집 저집 다니는 사람, 이거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거예요.

여섯째는 거짓 증인을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출애굽기 20장 16절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제 9계명을 주셨습니다. 잠언 25장 18절에도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보통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합니다. 큰 마음 가진 사람은 흔히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보통 마음을 가진 이들은 흔히 시사(時事)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작은 마음을 가진 이들은 흔히 남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 남의 말하면서 그 것이 잘못인 줄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출애굽기 23장 1절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이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간시키는 것은 마귀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화평을 원하십니다. 반면에 마귀는 언제나 이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어느 편입니까? 스스로 반성해 봅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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