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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잠 0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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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잠언 7장은 6장의 내용과 비슷한 것이므로 오늘 저녁은 8장을 생각하여 합니다. 잠언서 전체가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지만 특별히 8장은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1절에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잠언 1장 20절에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며 가로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나 다 들을 수 있게 알려진 지혜입니다. 즉 드러낸 비밀입니다. 문제는 듣는 이의 마음의 자세입니다. 지혜를 보기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생각한대로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크게 부르고 소리를 높여도 듣지도 아니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생각한대로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크게 부르고 소리를 높여도 듣지도 아니하고 받아들이지도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사의 소리에 관심이 더 있을 때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내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이 예배당 안에서 뒤에 앉아 계신 분까지 분명히 들리라고 이런 확성기 시설을 해서 이 시간 성경을 강해하고 있고 열심히 강해하느라고 하는데, 물론 거의 전부가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혹 이 자리에는 친구의 권면에 못이겨서 이 자리에 나오신 분,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분은 아마 제 음성보다는 저 밖에서 나는 소리에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어떤 청년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자 편에서는 교회 출석을 매우 열심히 하고 신앙이 독실합니다. 그래서 사귀는 남자더러 그냥 교회에 나오라면 말을 안들으니까 “나를 만나고 싶으면 이 예배당에 나오셨다가 예배 후에 만나요” 그러니 이 남자는 예배드리러 예배당에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다. 이런 청년에겐 기도회로 모이는 이 한시간이 얼마나 지루할는지 모릅니다. 왜요? 그 청년의 관심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가 빨리 끝나고 약속한 여자와 만나는 것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시계만 한시간 동안에 열 번 이상 들여다봅니다.

혹 이런 분은 그런 말씀을 저한테 해요. “왜 예배당 안에 있는 시계를 앞에 걸지 않고 뒤에 걸었습니까?”고. 그거 이유가 있어요. 그 시계는 예배 인도하는 사람이 보라는 것이지 회중이 보라는 것이 아니에요. 예배 인도하는 분이 예배 도중에 팔목을 자주 들여다보면 좋지 않거든요. 뒤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고 예배 시간을 지켜 가는 거예요. 만일 앞에 걸려 있으면 예배 인도하는 사람은 안보고 시계에 시선이 자꾸 가면 예배 인도하는 사람이 맥이 빠지거든요.

아무튼 우리의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에 관심이 있어야 우리를 부르고 소리를 높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골고루 내립니다. 그러나 그릇이 엎어져 있으면 아무리 비가 많이 쏟아져도 한 방울의 비도 그 그릇에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보세요.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사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가로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무슨 말씀이에요? 이 지혜는 긴급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 전파는 긴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혜는 긴급한 것입니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하고, 이 주간에 안하면 다음 주간에 하고 이렇게 미루어 나가도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가 말한 것처럼 “지금 막 불구덩이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것이 죽음의 길인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저희를 영 죽어 버릴 수밖에 없는 불구덩이 밖으로 밀쳐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만큼 긴급한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전세계 만민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명철할지어다 미련한 자들아, 너희는 마음이 밝을지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황인종이나 흑인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도덕적인 인간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나,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호소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 가신 어떤 목사님이 한국에 계실 때 봉사도 잘하고 교회에 헌신하며 신앙 생활하던 어느 권사님을 만났는데 ‘어느 교회에 나가시는가?’고 물었더니 미국에 간 이래 근 3년이 되어 오도록 교회엘 나가지 않았다고 하더래요. 그래서 ‘아, 그러면 교회엘 나가셔야죠. 권사님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랬더니 그 권사님 대답이 재미있어요. “아니, 목사님도, 미국에까지 와서도 교회에 다녀야 되요? 아마 이 권사님은 미국엘 가서 한국에선 생각도 못할 정도로 살게 되니까 무던히 좋았던 모양이죠. ‘천국에 가 봐야 이보다 더 나을게 있겠나?’하고 말입니다. 한심하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합니다. 왜요? 이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 보세요! 우리에게 들여오는 어떤 소리는 인간 본성의 가장 저급한 것에 호소해서 인간을 타락시킵니다. 요사이 소위 유행 음악 같은 것들이 대개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인간의 가장 높고 좋은 것이 호소하여 인간의 감정을 순화하고 인격을 성숙한 자리로 이끌 뿐더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듬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밝힐지니라.’ 우리 마음에 어두운 면이 없습니까?

본문 6,7절에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선하고, 가장 정직하고,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황금보다도, 진주보다 나을 뿐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귀하고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혜의 구체적인 길을 말씀합니다.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1장 2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잠언서의 일반적인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종종 위험한 궤변에 의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종교가 신조의 정확무오함에나 혹은 예배의 열심에 핵심이 있는 줄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도덕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종교는 하나님 보실 때에 무가치 한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0-17절까지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형식적인 절기와 제사는 잘 드렸지만 그들의 행위가 그 뒷받침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절기를 지키며, 제사 드리는 것이 매게는 짐이다. 내가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 왜요? 형식은 굉장했지만 내용과 생명력이 없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빛도 사랑하고 어두움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빛이 아니면 어두움입니다. 하나님 아니면 마귀입니다. 하나님 편에도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귀 편에 서서 마귀의 종노릇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악의 세력에 눌려서 종노릇하며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진리 편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의 특성은 그 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빚지는 것을 무서워 할 줄 알아야 빚을 지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거짓말하지 아니합니다. 악을 미워하는 감정이 없이는 와전한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싱가포르에서 모이는 교회 지도자 세미나에서 교회 성장의 원리에 대해서 말하면서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한국에서 얼마나 전도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가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목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 교회 성장에서 전도의 필요성을 말씀하셨는데 저도 절대적으로 동조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 성장은 놀라운 것을 봅니다. 그런데 저희 나라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민의 75% 이상이 모슬렘교도(회교도)인데 모슬렘에서는 법적으로 다섯 내지 일곱의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일곱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매일 한 아내를 돌아가며 한 주일에 한 번 꼴로 집에 와서 살게 합니다.”

“돈이 좀 있는 사람은 한 500불 정도의 위자료를 주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부자는 7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25번 결혼을 했고 그 자녀가 83명입니다. 세상을 떠나지 직전에 결혼한 부인은 13세였습니다. 모슬렘교의 사회가 이러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감을 보러 갔다가 마음에 들면 자기가 결혼에 버리고 어떤 때는 아버지는 언니를 부인으로 맞고, 아들은 그 집 동생을 부인으로 맞는 생활을 합니다. 문자 그대로 완전히 도덕의 질서가 무너진 사회 짐승의 사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 집 아내를 몇 명씩 데리고 나옵니다. 그것이 당연한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 후에도 문제의 해결은 그리 쉽지 아니합니다.”

저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그런 모슬렘의 영향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나 전도하기가 어렵고 문제가 많았을까? 이 세상에는 이런 어두움의 세력에 매어 있으면서 빛을 향해 나오고 싶으면서도 나오지 못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거 얼마나 엄한, 그리고 철저한 명령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악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미워할 뿐더러 교만, 거만, 악한 행실, 패역한 입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요셉의 생활(시험을 이김)과 다니엘과 세 친구의 생활을 기억합시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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