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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향연 (잠 0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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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베풀어 놓으신 지혜의 향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속에의 초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본문 1절을 보세요.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하였습니다. “지혜가 집을 짓고”, 즉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향연의 장소가 어떠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향연을 베풀 곳은 임시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것은 장막 생활입니다. 임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향연을 마련하신 곳은 장만이 아니라 집입니다. 임시적이 아니라 영구적입니다. 지혜의 향연은 간단한 식사가 아니라 향연입니다. 푸짐한 잔치입니다. 잠깐의 기쁨이 아니라 언제나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향연을 마련하신 곳이 얼마나 장엄합니까? ‘일곱 기둥을 다듬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인간이 거하는 어떤 집과 비교할 수 없는 웅장함과 찬란함, 그리고 완전함을 뜻합니다. 기둥은 예나 지금이나 장엄함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고 움직이지 아니함을 표현한 낱말입니다. 그리고 일곱이란 숫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성경에서 흔히 완전 수로 말합니다. 그것은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숫자인 3과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땅의 숫자인 4를 합한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흔히 한 주일이 일곱 날이고 7을 행운의 수로 생각하는 까닭이 그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아도 소아세아의 일곱 교회를 비롯해서 7이라는 숫자가 자주 나오는데 이것도 모두가 완전 또는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령 아세아의 일곱 교회에 나오는 편지가 있는데 아세아에는 일곱 교회만 있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교회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숫자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생각할 것은 7이라는 숫자가 완전 수인 것처럼 12라는 숫자도 완전 수입니다. 7은 3과 4를 합한 것이고, 12는 3과 4를 곱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일년이 12개월 천국의 모습도 열 두 문이 있는 곳, 이 모두가 완전함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집이 얼마나 훌륭하고 견고하고 장엄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완전한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인간이 건설한 것도 굉장합니다. 아마 옛날 솔로몬왕이 건설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세계 3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옛날 애굽의 왕들이 건설했던 궁정이 얼마나 화려하였겠습니까? 미국 캘리포니아에 가면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산 언덕에 미국의 신문왕이었던 허스트가에서 건설한 허스트 성(Castle Hers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허스트가에서는 미국의 신문을 34개나 경영한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약 1,500만평 정도의 땅과 산을 사서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여름에 서너달 동안 피서하기 위한 별장을 건설하였습니다.

별장을 짓는데 28년이 걸렸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의 경기 불황이 생겨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별장을 지금은 주 정부에 기증해서 관광지로 개방을 하고 있는데 한번 다 구경하려면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5시까지 해야 합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말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모든 장식품, 조각품, 미술품은 2천년, 3천년 전의 희귀한 것들이고 야외 수영장에는 바닥을 눈같이 흰 대리석으로 깔고 주위에 둘러선 기둥은 로마에서 사다가 세우고 집 설계 자체도 희귀한 예술품들을 조화 있게 설치해서 이루어진 집니다.

실내 수영장이 우리 예배당 안만큼 넓은데 아름답게 무늬를 놓은 타일을 22금으로 하였습니다. 그 가격이 얼마가 들었는지 지금은 계산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가정 극장 시설의 놀라움, 지금으로부터 58년 전부터 시작한 집인데 집을 짓는 공사비는 빼고 세계 각국에서 사들인 물건 값만 50년간에 매년 백만불 이상 들였다고 합니다. 요사이 백만불도 큰 돈이지만 80여년 전 100만불이라고 하면 소위 백만장자로 미국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허스트가에서는 매해 100만불 이상 소비하기를 50년간 했다니 지금은 그 가격을 계산할 수도 없는 놀라운 지경입니다.

그런데 허스트도 그 집을 다 완성도 못하고 그 집에 몇 년 동안 와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이 지은 집이라는 게 아무리 굉장해 보이고 견고하다 해도 하나님이 마련하신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댁에 가셔서 요한계시록 21장에 사도 요한이 본대로 기록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한 번 읽어보세요. 그것도 인간으로는 그것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이 마련하신 향연은 아름답습니다. 완전합니다. 영구적입니다.

그리고 2절을 봅시다.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며 상을 갖추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향연이 얼마나 준비가 잘 되었나 말해 줍니다. 짐승을 잡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잘 차린 상이 있습니다. 풍부하고 부유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향연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충만합니다. 누구에게나 만족하며 좋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모든 것은 풍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주님을 믿는 사람과 주님 사이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말씀하시면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시편 23장에도 다윗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만족하도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연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윤택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3절에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하나님의 향연은 이렇게 풍성하게 배설해 놓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모습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중 높은 곳에서 부른다”는 말은 누구나 들리게 구석구석까지 초청의 음성이 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비밀리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명정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초청은 누구에게나 입니다. 지식 많은 사람에게만이 아닙니다. 무식한 사람에게도 입니다. 권세 있는 사람만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권세 없는 사람을 또한 초청합니다. 돈 많은 사람만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없는 사람도 초청합니다. 건강한 사람만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도 초청하십니다. 누구나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복스러운 초대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편히 쉬게 하리라.” 주님은 이 시간도 양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부르신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2. 주 예수 지금도 기다린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죄짐을 가지고 다 나오라 어서 주 앞에 오라

(후렴)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오라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답하고 나오는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를 통해서 이렇게 부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의 향연에 초청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4절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쓸데없습니다. 배부른 자에겐 음식이 소용없습니다. 자신들의 지식에 만족한 사람들은 거룩한 계시의 발아래 겸손히 앉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며 무지를 깨닫고 희미하게나마 빛을 더듬어 가는 사람, 심령이 굶주려 영혼을 만족하게 할 양식을 찾는 사람, 심령이 메말라 생수를 갈급해 하는 사람이라야만 하나님의 향연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신대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며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집에 모였습니다. 우리가 다 의롭고 선해서 여기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즉 주님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부족을 절감하고 기근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한 병에 걸려 있으면서도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모르는 심령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이렇게 되면 희망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지혜가 없고 심령이 메말랐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심령의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까?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려는 마음이 자세를 갖춘 사람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풍성한 비가 내린다고 하여도 엎어놓은 그릇에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어리석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주님!”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나오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만족한 축복을 주십니다.

5절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술을 마시라.” 이사야 55장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흔히 떡으로만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신명기 8장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다. 우리 몸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의 기갈을 해결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저녁 이 시간에도 우리 귀에 쟁쟁하게 들려줍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기름진 것으로 즐겁게 하세요.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통해서 기갈한 여러분의 심령에 참 만족을 주도록 하세요. 축복을 얻기 위해,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참 만족을 얻고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도 그런 은혜를 받으신 분 나와서 간증하시라고 하면 수없이 많으실 줄 믿습니다.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참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 첫 페이지에 있는 말씀은 꼭 옳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다른데서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면 물질입니다. 생리적으로 보면 짐승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이 영혼이 결국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까지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심령에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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