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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덕률의 제 1 조 (잠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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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률의 제 1 조(잠 10:1-10)-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봉독한 잠언 10장 1절에서 22장 16절까지는 잠언의 중심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몰러(Maurer)씨는 이 부분을 가리켜서 “인간 생활의 전부를 조작하며 형성함에 적당한 금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잠언 강해 첫 시간에도 말씀드린대로 서로 내용의 연락이 없는 짧은 잠언들로써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가장 오랜 잠언집으로써 376개 또는 375개(학자에 따라서)의 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4장 32절에 보면 솔로몬은 3,000잠언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기에 수록된 잠언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이제 우리가 읽어 내려가면서 느끼게 되겠습니다마는 이 부분에서는 조직적으로 전집이 된 것이 아니므로 대개 논리적인 연결은 바랄 수 없으나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가 강조되고 이 땅 위에서 의인에 대한 보응과 악인에 대한 형벌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부터는 잠언서 매장을 차례대로 읽고 생각하기보다는 주제별로 말씀을 읽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반복되는 내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 헨리(Matthew Henry)의 분해대로 하면 잠언 10장에서 29장까지를 77개의 주제로 분해하였습니다.

부모는 그 자식들의 지혜로움을 인해서 기뻐하고 반면에 그들의 어리석음을 인해서 슬퍼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절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하였습니다. 15장 20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하였으며 17장 21절에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25절에도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장절 첫 머리에 효도에 대한 잠언이 놓여진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효도는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 특히 우리 기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이상 윤리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윤리를 떠난 기독교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 기독교의 강령이라고 볼 수 있는 십계명을 보세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낸 계명이 먼저 4계명까지고 그 다음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인데 그 첫째가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 6장 1절에도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하였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야 할 계명 중에 첫 계명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솔로몬의 잠언의 첫마디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말씀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생활 양식이 달라집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은 면하지 아니합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의 법칙도 변하지 아니합니다. 말하자면 부모에게 자녀가 순종하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도덕의 법칙 가운데 첫째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나서 제일 먼저 맺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면 형제를 만나기 전에, 자매를 만나기 전에, 친구나 선생을 만나기 전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형제와 이웃과 나아가서는 나라와의 관계도 옳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충신을 찾으려면 효자의 문에서 찾으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임금님도 잘 모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동양의 도덕을 간추려 말하면 삼강오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에 대학을 가는 학생들도 삼강오륜을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졸업반) 삼강오륜이 무엇인가? 고 물었더니 삼강은 압록강, 한강, 낙동강이고 오륜은 올림픽을 한문으로 표시한 것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실입니다.

삼강은 제일 먼저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륜에서도 제일 먼저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친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다른 것을 가르쳤습니다.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효도는 도덕법칙의 제일조입니다. 모든 도덕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계명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즉 부모 뿐만 아니라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 문답에서도 제 5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제 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히고 행할 일을 행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사회질서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을 때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요사이 비극적인 사실 가운데 하나는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점점 못해가고 있습니다. 가령 학생들의 말을 옆에서 들어보면 선생님을 존경하는 말을 별로 들어보기가 힘듭니다. 이것처럼 비극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에게 순복할 때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의 말씀을 순복하고 선생님을 학생이 존경할 때 그 학교의 질서가 섭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책임자를 존경하고 그 지시에 따를 때 그 기관이나 단체의 질서가 잡힙니다. 모든 국민이 국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 법에 순종할 때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자녀라야 학교에 가서는 상사에게, 관청에 가서는 상관에게, 사회에서는 좋은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으면 그런 사회는 자연히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얼른 볼 때 요사이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도덕 질서가 아주 무너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크게 부각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구는 기독교의 깊은 영향을 받아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상한 것들이 소란을 피우고 있지만 그것은 소수이고 소위 조용한 대중(Silent majority)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서구 사회가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이 깊이 가정과 사회에 뿌리 박고 있는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참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면에서도 나아야지 못하면 안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습니까? 종종 아들이 아버지를 때렸다는 기사가 나고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기사를 봅니다. 험악한 시대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어떤 아버지, 어머니는 얼굴이 몹시 상해서 왜 그런가 하고 이유를 알아보면 그 아들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서 저렇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합니다.

젊은이 여러분!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게 못해 줄 망정 속을 썩히는 일을 하지는 않는지? 나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몰래 눈물 흘리게 하지는 않았는지? 물론 이 자리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계시리라 믿습니다. 또 그런 분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대접하는 일에서 구체적으로 자주 편지하는 것, 신식 음식 대접하는 것, 용돈 드리는 것은 어떠한지요?

잠언 23장 15절에서 16절에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매 속이 유쾌하리라”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부모의 기쁨입니다. 어떤 아들이 지혜로운 아들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녀입니다. 요한 3서 3절에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개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믿는 부모의 기쁨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24절에서 25절에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도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나, 계획을 하나, 실제로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즉 내가 이것을 믿음으로 하나?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대로 하나를 살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시면서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서 비취게하여 저희로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비추게 되면 결국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반면에 우리가 빛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 대신 욕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주님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그대로 살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고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가 주님의 제자 된다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가 어디가서 무엇을 하나 바로 살아 칭찬이 돌아오면 그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반면에 잘 못해서 욕이 돌아가면 그 수치도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할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십시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세상은 공허하여 인생에게 민족을 주지 못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인생에게 참 만족을 준다고 합니다. 잠언 11장 4절에도 “재물은 진노하시는 날에 무익하나 의리는 죽음을 면케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얼른 들을 때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 환경에서 잘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재물 제일주의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돈이면 다’라고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돈을 무시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돈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돈이 궁극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물질이 살아가는데 필요하나 그 것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진노하시는 날에는 “롯의 때와 같을 터인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누가복음 17:28) 그러면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기 전에 천사의 손에 끌려 나오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도 듣지 않고 뒤돌아보다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물질을 더 사랑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맙시다. 세상에 미련 두지 맙시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할 이는 주님의 의밖엔 없습니다.

그리고 의를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영혼이 주리지 않게 하십니다. 그 영혼을 윤택하게 하십니다. 시편 37편 16절에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게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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