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통의 날에 낙심치 말라 (잠 12:1-14)

첨부 1



고통의 날에 낙심치 말라(잠 12:1-14)-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 읽을 말씀 가운데서 1절 말씀을 보십시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리라.” 뜻이 통하는 다른 곳의 말씀을 같이 읽읍시다.

3장 11절-12절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5장 11절-14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그 종말이 비참하게 된 사람이 후회 막심해서 울부짖을 것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두렵건데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에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

9장 7절-8절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리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10장 17절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 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13장 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15장 5절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

15장 12절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19장 18절 “네가 내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라.” 소망있는 아들을 징계해야 바로 되지, 소망없는 자식은 징계하면 오히려 빗나갑니다.

23장 13절-14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 찌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여기 우리가 같이 읽는 잠언서 가운데 징계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징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무사르(musar)인데 그 뜻은 과실을 범한 자에 대한 처리이지 형법은 아닙니다.

그저 쉽게 말하면 사랑하는 아이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혹은 나갈까 봐서 부모가 훈계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매를 드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어떤 때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고통을 당하는 분이나 그런 고통 속에서 지나온 분이 ‘에, 이번에 하나님께 되게 맞았습니다’ 하는 말씀을 들을 때 어딘지 모르게 어진 아들이 아버지한테 불려 들어가서 굉장히 심한 꾸지람을 받고 얼굴이 벌개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매맞은 자리를 툭툭 털면서 그 형제들에게 ‘에, 아버지한테 혼났어! 내 다신 안 그럴테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곤 합니다. 믿음 있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징계란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아픈 일입니다. 눈물나는 일입니다. 손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통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데 따라서 징계가 축복이 될 수 있고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시인들 가운데도 어려움을 당할 때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가령 시편 73편 같은데 보면 성도의 고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사람은 오히려 건강하고, 살이 찌고,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고, 그들이 소원했던 것보다 오히려 더 얻고, 재물은 더 해 가고, 그래서 교만하고 세상에 높은 사람 없이 살다가 죽을 때도 고통이 없는데 오히려 신앙을 따라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당하니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의문을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73편 16절에 보면 “내가 어찌하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러면서 21절 이하에 “내 마음이 산란하여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 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이 시인은 고통 속에서 낙심할 뻔 하였으나 하나님의 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극심한 속에서 주를 가까이 하면서 주님의 능력의 오른팔이 붙드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어린이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아버지를 신뢰하면 아버지가 매를 때리면 때릴수록 도망가지 아니하고 아버지께로 가까이 가면서 아버지 품에 매달리면서 ‘아버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도 품에 안기는 아들을 더 이상 때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혹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지 말고,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주님 품에 꼭 안겨야 합니다. 그러기에 시편 32편 9절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의에 의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령한 의미로 볼 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였습니다. 욥기 5장 17-20절을 보세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희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매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에가드(Egard)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탄의 애무와 사랑보다 오히려 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징계하시고, 사탄은 우리를 죽게 하려고 애무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그 자체가 우리에게 괴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해석이 히브리서 12장 5절-13절에 있습니다. 같이 찾아서 교독하실까요? “5절: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 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절: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절: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절: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절: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절: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절: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절: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트라프(Trapp)이란 분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는지 의심할 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징계의 동기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입니다. 우리에게 소원과 기대가 있어서 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5절 이하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나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해를 하는데요 예수를 믿으면 이 모든 고통이나 환난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렇게 말씀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받으나” 즉 우리 믿는 사람도 세상에서 환난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물론 불의한 사람들과 같이 자기가 잘못해서 오는 여러 가지 곤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사람은 불신자들보다 이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을 바로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내신 도덕의 법칙을 바로 배워서 그대로 살 때 많은 불필요한 고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유전적으로, 사회적으로 질병이나 사고나 실패나 슬픔의 고난을 같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은 참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고난을 받지마는 그 미치는 영향이나 그 결과가 아주 다릅니다.

꼭 같은 용광로이지마는 나무가 들어가면 다 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금광석이 들어가면 금이 아닌 부분이나 성분은 타 버리고 순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당한 경험을 생각해 보세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불쌍한 계집종의 병을 고쳐준 죄로 억울하게 관청에 잡혀가서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힘을 당하고, 착고에 채워 부자유한 가운데 그 날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닙니까? 분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정도가 아닙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 그런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바울과 실라가 높은 테너 음으로 찬송을 불렀더니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통해서 낮은 베이스 음으로 화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여간 이런 가운데서 자결하려던 간수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고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기초가 튼튼히 서게 된 것입니다. 같은 고통이지마는 바울과 실라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결과를 맺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바울은 오랫동안 로마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지 않았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옥중 생활이란 평안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나이 많을 때에 옥중 생활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쓴 편지를 보면 그의 간증대로 ‘내가 오히려 이렇게 매임으로 말미암아 온 시위대와 가이사의 식구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신앙의 자세입니까?

이런 가운데 쓴 편지인데도 오히려 자유롭게 평안히 사는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한 것입니다. 가령 빌립보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였습니다. 이런 옥고 가운데서도 참된 신앙으로 사는 사도 바울에게는 이와같은 기쁨이 있었고, 이와 같은 불후의 글을 써서 오늘까지도 성경으로 우리가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실라의 경험만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고통 고난을 받지마는 신앙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타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고난을 이용해서 더 높이 비약합니다 더 큰 일을 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도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간신히가 아니라 거뜬히, 넉넉히 이깁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합니다. 그래서 같은 슬픔, 병, 고난, 실패를 통해서 새로운 비젼(Vision)을 얻고, 새로운 용기를 얻고, 새로운 능력을 얻어서 실패를 승리로 바꾸고 탄식을 찬성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였습니다. 시편 107편 4-7절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여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야고보서 1장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일년 동안 살아갈 때, 아니 여러분의 평생을 지내실 때 어려움을 당하시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혹시 당한대도 낙심하거나 상심되고, 좌절되고, 실망하지 말고 오히려 담대하여 믿음으로 이 어려움을 잘 이겨 오히려 여러분의 삶에 큰 축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