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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와 인내 (잠 12: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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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인내(잠 12:15-28)-박조준 목사
 
오늘 저녁은 본문 가운데서 16절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즉 걸핏하면 성을 잘 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아닌가? 쉽게 말하면 성 잘 내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 성내는 일에 대해서 잠언이 어떻게 교훈하는가 우리 한 번 보십시다. 여러분의 성경을 가지고 한 번 찾아서 같이 읽으십시다.

잠언 14장 17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14장 29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15장 1절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15장 18절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16장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17장 12절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여러분! 본래 곰은 짐승 가운데 가장 미련한데 속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새끼를 빼앗겼다면 얼마나 미련을 부리겠어요? 아마 굉장히 무서울 거예요. 미련한 사람은 그보다 더하니 아예 접근하지 않아야 손해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19장 11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9장 19절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건져 주게 되리라.”
22장 24-25절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

영어에 ‘성난다’는 것을angry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과하게 성이 난 것 즉 격노한 것을 mad라는 말을 쓰는데 그 뜻은 ‘미친 사람’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사실 과격하게 성난 사람을 보세요. 거의 미친 사람 같아요. 그런 미친 사람하고 사귀지도 말고 동행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25장 15절에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 중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그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유한 것이 약해 보이지마는 실상은 강한 것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대조적인 것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입 속의 혀와 이빨입니다. 혀는 부드러운 지체요 반면에 이는 아주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혀가 억울한 일도 많이 당합니다. 같은 지체이면서도 어떻게 잘못해서 혀가 씹히고 피를 흘립니다. 혀는 매우 약해 보입니다.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어느 것이 오래 갑니까? 강한 이빨이 오래 갑니까? 부드러운 혀가 오래 갑니까?

강한 이빨은 20세가 지나면서부터 고장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40내지 50세, 한 60세쯤 되면 실상 다 고장이 나고 빠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나이 많은 분 가운데 80세가 되어도 자기 치아를 그대로 가지고 계신 분이 천에 하나 혹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의치를 하고 다닙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이 많은 분이라도 의설(남의 혀) 달고 다닌다는 것은 아직 못 봤어요. 부드러운 것은 단단한 것보다 오히려 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5장 28절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26장 21절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
29장 22절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구약 창세기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는데 이들이 다 성장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때 가인이 심히 분해서 안색이 변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의 잘못이 어디 있는가 생각해 보려고 하지는 아니하고 화를 냈습니다. 분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였어요.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결국 어떻게 되었어요? 분해하고 안색이 변했던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살인의 참극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니라”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육체의 열매를 말하면서 분냄이 그 중에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4장 31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내는 것, 분노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여 드린 일은 없습니까?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27절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분한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세요. 자기에게 대해서 분한 생각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곧 잊어버리고 풀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분한 생각을 품으면 그것을 오래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해서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도 손해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사람이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한 생각은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라는 알을 품고 있으면 무엇을 까게 되는지 아십니까? 죄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동안 마귀가 제일 많이 활동을 합니다.

전에 사울 왕이 얼마나 훌륭하였습니까? 얼마나 겸손했고, 능하게 나라를 치리(治理)하였습니까? 그런데 블레셋 나라 골리앗이 도전해 오는 때 이스라엘 나라 군대에는 도저히 그와 나가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골리앗이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싸움을 걸어오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였지마는 이스라엘 군대는 골리앗만 나서면 도무지 꼼짝하지 못하고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 때 형들의 안부를 알려고 심부름을 왔던 소년 다윗이 이 광경을 보고 자기가 나가서 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 사울 왕의 허락을 받았고 왕이 주는 칼과 갑옷도 사양하고 목자 생활하던 그대로 물맷돌만 다섯 개 가지고 나가서 거인 골리앗을 단번에 물맷돌로 쳐죽여 이겼습니다.

그때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이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숙적을 물리치게 된 것이 통쾌해서 다윗을 중심으로 환영하며 외쳤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말이 사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워하는 생각이 나고 분해서 어쩔 줄 모르게 되고 결국은 사울이 마귀에 틈을 주어서 미치게 되었고, 다윗을 죽이려고 좇아 다니게 되었고, 인간의 모든 추태를 드러내다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분을 내는 것은 마귀로 틈타게 하는 일입니다. 분을 내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분을 내지 않을 뿐더러 적극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는다”고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7장 13-14절을 함께 보실까요.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에 떠나지 아니하리라.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이유는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싸움은 맞부딪쳐야 생기고,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생기기 전에 한편에서 이유는 있지만 참아서 화평을 이루는 것이 덕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22절에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잠언 24장 29절에는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하였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품격 가운데 인내는 귀한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사도 베드로는 권면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7-21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니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전의 독일의 철학자 가운데 니체라는 사람은 이와같은 성경의 교훈을 읽고 기독교 도덕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이 ‘기독교 도덕은 노예 도덕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독교의 도덕은 소극적이고, 약자의 도덕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이고 강자의 도덕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하였습니다. 보세요! 상대방이 내 오른편 뺨을 치려면 왼손으로가 아니면 오른편 손잔등으로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왼편 뺨은 상대방에게 오른편 손으로 맞는 것입니다. 피해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마주 나가 맞아 주는, 약하게가 아니라 더욱 강하게 맞는 자세입니다. 이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내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여유있는 자세가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지마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참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장 35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으리라”고 하면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권면하신 말씀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그러면서 우리가 어려운 일 당하여 피곤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이처럼 자기에게 거역한 것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고’ 하였는데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생애의 특색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내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시는 순간부터 가난을 참으셨습니다(나신 곳이 마굿간, 피난살이, 목수일). 주님 친히 말씀하신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것이 없다”고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는 순간부터 세상을 떠나시는 때까지 갖은 육신의 빈곤과 질고를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참으셨습니다. 공생애(公生涯)가 시작되면서 심리적인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친척들이 미쳤다고 오해하고 붙들어 왔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를 낭떠러지에 밀쳐서 떨어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참았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를 중상하고 모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은 중상과 모략과 역선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마음 상하게 한 일이 얼마나 됩니까? 뿐만 아니라 제자 둥 한 사람의 손을 빌어 팔리게 되는 기막힌 일을 당하셨지만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도 참으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주님은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인내로써 너희가 너희 영혼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과 화평과 희락 그 다음이 인내입니다 야고보 장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우리 신앙 생활이 온전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육신의 노고에 어찌할 수 없어서 허덕이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빈곤한 생활에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짐을 지고 계신 분도 있을 줄 압니다. 다른 사람의 오해로 인해서 상심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모략과 중상으로 가슴 아파하시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고독한 가운데 외로와 하시는 분, 여러 가지 세상의 어려운 짐을 지고 안타까워하시는 분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인내의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이제 앞으로 우리 앞에 또 어떤 어려움이 닥칠는지 누구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며 바라보심으로 피곤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승리하는 생활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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