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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즐거움 (잠 15: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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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오늘 저녁 본문 가운데서 13절 말씀을 중심하여 생각하고 기도하십시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의 몸보다도 마음을 더 중요시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가 지키고, 우리의 혀를 지키고, 우리의 말을 지켜야겠지마는 그보다 더욱 잘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집을 지키는 일보다 사무실을 지키고, 상점을 지키고, 돈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도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이나 그렇지 못하게 부조화를 이루는 것, 이것이 내 마음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평안하게 사는 것이나 실상 외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4절에서 35절에 보면 예수님의 외식하는 무리를 향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을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밖으로 나오는 말은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 품고 있는 것을 내놓는 것입니다. 술주정하는 사람을 볼 때 평시에는 아주 얌전하고 선한 것 같은데 술 먹으면 행패를 부리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것도 정신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속이 멀쩡해서 평시에 품고 있던 것을 술이 들어간 다음 흥분이 되어서 내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우리가 힘쓰지 아니하면 형식주의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본래 유대교도 형식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강조하다 보니까 외식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외식하는 신앙생활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우리 마음을 깨끗이 새롭게 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8절에 보아도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라는 것이요 씻지 않는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사람의 생활은 그 마음 속의 생각 여하에 따라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생활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즐거움과 근심에 대해서 언급한 성경을 잠언을 중심 해서 몇 곳 같이 찾아 읽어보십시다.

잠언 12장 25절에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하였습니다. 근심이 마음에 있으면 그것 때문에 번뇌하게 됩니다. 느헤미야 2장 2-8절까지의 이런 기사가 있어요. “왕이 느헤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병이 없는데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그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까 왕이 느헤미야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느헤미야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목도하고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 하시고 종의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땅 나의 열조의 묘실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야는 고국에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습니다(외국에 가 있는 우리 교포들의 생각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번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힘있게 활발하게 일하려면 먼저 마음에 근심과 걱정을 덜어 버려야 합니다. 성경은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떠나신 것을 들은 다음 근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잠언 14장 10절을 봅시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예하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 쓰라림을 알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오히려 마음이 더 괴로웠습니다. 이것은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을 거예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민을 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12장 27절에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오...” 마가복음 14장 33절에서 34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하시고 나아가 피땀 흘리는 기도를 드리고 돌아와보니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들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내 고통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우리 고통을 아시고 동정하시는 분은 예수님 뿐이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셨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잠언 14장 13절에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이것은 아마 육신적으로 사는 사람의 경우를 말한 것 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이 있고 기쁘게 사는 것 같으나 실상 마음에는 슬픔이 있단 말이에요. 밖으로는 웃으나 속으로는 눈물을 흘린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2장 1절에서 2절에 보세요.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기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육신적인 즐거움, 웃음 모두가 헛된 것을 의미합니다. 왕년의 희극배우 채플린의 고백은 너무 유명합니다. 그가 평생을 세계적인 희극배우로 숫한 사람을 웃겼지만 죽을 때 한 말이 ‘나는 평생을 많은 사람을 웃기는 배우 노릇을 하였지만 실상 나 자신은 하루도 정말 기뻐서 마음속으로부터 웃어 본적이 없다’ 여러분, 우리는 배우가 아닙니다. 육신적인 즐거움이 순간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근심, 허무, 고독이 뒤따릅니다. 여러분, 밤새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나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무슨 힘이 있어 보입니까? 그들의 눈에 무슨 희망이 빛납니까? 육신적으로 죄를 범합니까? 훔쳐먹는 떡 같아서 재미가 있고 일시적으로 즐거울 지 모르나 그 뒤에는 근심이 뒤따릅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잠언 17장 22절을 보세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4장 30절에는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18장 14절에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거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육신과 병을 고치는데 물론 약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 마음에 신념이 강해야 그 병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하게 되면, 마음이 병이 들어 버리면 그 병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잠언 25장 20절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잠언 25장 25절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의 즐거움을 원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즐거움을 원하는 세상에 즐거움보다는 슬픔과 근심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면 즐거운 마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저 흔히 생각하는대로 돈을 많이 모으면 즐겁고 만족할까요? 사실 이 세상에서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이면 좋은 집도 살 수 있습니다. 차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가구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옷도 해 입을 수 있습니다.

요사이는 그런 일이 별로 없을 줄 압니다만 전에 제가 어릴 때 시골서 자랐는데 임산부가 해산을 할 때 간호원도 없고 집에서 그냥 해산하는데 그 수고는 말로 할 수 없고 고생하는데 할머니들이 애가 빨리 안 나오면 그 앞에다 돈을 한 뭉치 갖다 놓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 애가 돈을 보고 빨리 나오라고요. 세상에 돈이 얼마나 좋으면 그럴까요?

세상에서는 돈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돈 없이 살 수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돈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면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황금만능은 아닙니다. 돈으로도 못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즐거움을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는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중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면 물질이요, 육신적으로만 생각하면 짐승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속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심령은 물질적인 것이나 지식이나 명예 육신적인 본능의 충족만 가지고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참된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번영은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옳습니다. 사람들은 다 목이 말라 있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만족할까, 저렇게 하면 즐거울까 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 봅니다. 그러나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한 결과 밖에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더 말라 오는 법입니다. 세상의 것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심령이 갈한 사람이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지 결코 거기에 참 즐거움, 참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어디에서도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 안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마음에 평안과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자연히 마음에 불안이 오고 즐거움이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윤리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훌륭한 생활의 모범만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홀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사죄함을 입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 마음 속에 주님께로부터 임하는 즐거움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마음에 즐거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것처럼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즐거움을 원하십니까? 먼저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해야 합니다. 원수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즐거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랑하는 범위만큼 즐거움이 클 것이다’고. 나만 사랑하면 그 범위가 내게 그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큼 넓어질 것입니다.

끝으로 마음이 즐거우면 어떤 축복이 됩니까? 우선 육신적인 건강에 좋습니다(즐거운 마음은 양약입니다). 소화도, 혈액순환도, 신경도 풀어 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는 일에 능률도 오릅니다. 공부를 해도, 일을 해도, 사무를 봐도, 운전을 해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입니다. 장사를 해도 잘 됩니다. 더구나 마음이 즐거우면 유혹과 시험을 이깁니다. 미워하는 생각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 청년들이 빠나 댄스홀에 갑니까? 내 마음 속에 즐거움이 없어서 그럽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자연히 부흥합니다. 천국은 즐거운 곳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그림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이 인생 길이 과히 고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 즐거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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