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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경계와 책망 (잠 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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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본문 가운데서 10절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십시다.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하나님의 경계와 책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우리 인간이 잘못된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로잡아 주신다고 여러 곳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잠언 19장 29절을 봅시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 즉 거만한 자, 하나님 앞에서 거역하고 교만한 사람의 앞날에는 심판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어리석은 자는 그 등에 채찍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에요. 이거 어리석은 사람의 소치가 아닙니까? 한 번 매를 맞고 정신이 들어서 얼마 가다가는 망각이란 것이 작용해서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또 사잇길로 가다가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해서 채찍을 들면 또 정신을 차리고 이런 생활의 반복입니다.

잠언 20장 30절을 보세요.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 즉 매를 맞아도 한 번 호되게 맞아서 상처가 날 정도가 되어야 악한 길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잠언 21장 11절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 하리라.”

잠언 25장 12절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여기서 ‘슬기로운 자’를 우리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책망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사는 사람은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 같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26장 3절 “말에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말이란 짐승은 채찍을 맞고야 달려 버릇해서 채찍을 맞아야 잘 달립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란 말도 그런 뜻입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해야 더 잘 달립니다. 그러기에 말의 가죽 가운데도 엉덩이 부분이 제일 질기고 비쌉니다. 너무 채찍을 많이 맞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특별히 발달이 되었습니다. 소위 구두 만드는 집에서 ‘고도방’ 이라는 에나멜칠 한 것처럼 반짝이는 가죽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의 엉덩이 부분의 가죽입니다.

그러니 그거 얼마나 고생입니까? 그리고 말과 비슷한 짐승으로 나귀란 게 있지 않습니까? 나귀의 고집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은 나귀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나귀 입에다 자갈을 물립니다. 그래서 나귀 대가리 부분을 통계합니다. 소로 말하면 코를 꿰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한 인간은 그 등에 막대기가 마련되어 있어서 잘못 가면 잔등에 채찍이 내려 그때에야 또 정신을 차리곤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의 엉덩이처럼 인생의 잔등에 채찍 자리로 반들반들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어떤 경우에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잔등에 막대기가 떠나지 아니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마는 모든 인간은 다 어리석기 때문에 언제나 잔등에 채찍이 있습니다.

전에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 몸에 찌르는 가시(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누구도 분명히 모르지마는)가 있었습니다. 매우 괴롭고 아팠기 때문에 가시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은 바울의 간구와는 달랐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요? 네가 약한데서 강하게 되는 사실을 알리고 가시를 제거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면 너무 자고할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인간이 다 약하고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도 어떤 의미의 가시는 하나씩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요? 사잇길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에 아예 상관하지 않습니다. 베어 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73편의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은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이 시인의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였습니다.

그 대답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성경이 대답합니다. 시편 37편을 보세요. 시간이 있으면 다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같이 몇 절 교독해 보십시다(시편 37편 1-16절, 23-33절, 35-40절).

우리를 왜 고생시켜요?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고생이 아니라 훈련, 단련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히브리서 12장 5-13절을 읽어봅시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우리를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아니하고 슬퍼 보이지마는 나중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사람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곧 사랑입니다.

잠언 27장 5-6절을 보세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그런데 우리 인간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책망하고 충고하면 보통으로는 싫어하고 칭찬해 주면 거짓말 인줄 알면서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제일 걱정되는 것이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특히 이 잠언서에서는 지혜있는 사람이 되라고 거듭거듭 권면합니다.

잠언 27장 22절에 보면 미련한 사람이 어떠한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나지 아니하느니라.” 서울서 사는 분들은 절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시지 못한 분도 많으실 것예요. 돌이나 나무에 우묵한 구멍을 파고 나무로 공이를 만들어서 구멍 안에 넣은 곡물을 찧으면 그 껍질이 벗겨지는, 말하자면 가내 정미기입니다. 곡식이 말을 하지 못해서 그러지만 절구로 찧을 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는 동안에 그냥 먹을 수 없는 껍질이 벗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웬만한 사람은 절구에 곡식을 찧듯이 얻어맞으면 정신을 차리고 바른 생활을 하게 되는데 정말 미련한 사람은 벗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친구나 이웃을 대할 때 바른 말을 해줄지언정 아첨하는 일은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미궁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28장 23절을 보세요.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려주어 잘못을 고치고 바른 길을 가제 합니다. 물론 충고가 달콤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충고를 잘 받아 드릴 때 바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인간이 아닙니까?

다른 이의 충고를 잘 받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귀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왕으로써 더구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써 가히 상상 못할 죄를 범했습니다. 그의 충복 우리아의 아내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나단이 찾아와 비유적으로 말할 때 자신에 대한 것을 모르고 의분심에서 당장 보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요.” 할 때 다윗은 거꾸러졌습니다. 그의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옛 글에도 인유무과리오 하였습니다. 사람 치고 잘못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회개하고 잘못을 고치면 됩니다. 매를 맞고 정신을 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전에 헤롯은 죄를 지은 다음 세례 요한의 바른 충고를 받고 화가 나서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두고 종래는 헤로디아가 데리고 온 딸이 자기 생일에 춤을 추는데 흥이 나서 결국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말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헤롯이 어떻게 죽은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다. 아합왕이 이세벨의 충동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이방신 바알을 섬기다가 엘리야의 충고를 받고도 종래 돌이키지 않고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살다 그들의 종말이 어떻게 된 것을 기억하시지요? 전에 우리 나라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를 보세요. 그분이 얼마나 유능한 정치가였습니까? 얼마나 나라를 사랑하신 분이셨습니까? 그러나 올바른 충고를 듣기보다는 “지당하십니다.”하는 사람들의 말만 달콤하게 듣다가 나라도 곤경에 빠졌고, 많은 희생을 내었고 결국 자신의 말로(末路)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 정부가 이 나라의 중흥과 경제 성장을 위해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하는 일은 모두가 잘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마음의 아량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권력을 잡은 분들이 해야지 전에 4·19 때와 같은 일은 다시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우리 나라는 특수한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국민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소 불편해도 잘 참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일은 잘못을 좀 지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으면 합니다. 귀에 좀 거슬린다고 어디 데려다가 혼을 낸다든지 법을 빙자해서 감옥에 가두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면 이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음입니다.

잠언 29장 1-2절에 보면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백성이 탄식하는 나라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고 채찍에 맞는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아직도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매 맞을 때 정신을 차립시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지만 매를 잘 맞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매 맞을 때 잘못했다고 눈물 흘리며 채찍을 들고 계시는 아버지 품에 바싹 다가서는 것입니다(시편 119:67, 71). 멀리 도망가면 도망갈 수도 없으려니와 더 심하게 얻어맞습니다. 매를 맞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매를 안 맞으려고 미리미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며 사는 사람은 더욱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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