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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를 기다리라 (잠 20: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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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1장 11-12절을 읽습니다.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선지야 이사야 때 북방에 강대국 앗수리아가 일어나서 중동 일대를 침략하여 약탈하며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국제적인 대혼란기에 역사의 망대에 서서 파숫군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두마는 에돔을 의미한 것이고, 세일산은 에돔의 산입니다. 그 당시의 사정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이 예언은 세계를 통해서 인간의 깊은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신령한 가운데 역사의 높은 망대 위에 서 있습니다. 신령한 귀를 열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밥은 깊습니다. 멀리 유다 남방 나라인 에돔의 세일산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 옵니다.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습니까?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환난의 밤은 깊습니다. 이 밤이 얼마나 더 계속되겠습니까? 이 밤이 지금 이경입니까? 삼경입니까? 아니 거의 삼경이 되었습니까? 여기 환난의 밤에 해방과 자유의 아침을 기다리는 영혼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신령한 망대에서 이 부르짖음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 부르짖음은 옛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 있었고 오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밤 공기를 흔들고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를 잃고 환난 속에서 허덕이는 민족들의 부르짖음이 얼마나 얼마나 비참합니까?

“파숫군이여, 이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얼마나 더 기다리면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겠습니까?” 이 핍박, 이 억울, 이 포악, 이 노예 생활을 얼마나 더 참고 견뎌야 합니까? 벌서 30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런 부르짖음은 북한에서 오는 것만 아닙니다. 중국 본토에서도 들립니다. 아시아의 밤은 깊었습니다. 사실은 아시아 뿐만이 아닙니다. 소위 동편 유럽의 보든 위성 국가와 소련 전체 앞에서 가련한 국민들의 부르짖음과 애원의 소리가 세계의 밤 공기를 흔들고 있습니다. 세계의 밤은 깊었습니다.
우리가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까? 국가나 민족적으로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 생활 하나 하나를 살펴 볼 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또한 깊은 밤에 헤매이는 외로운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환난의 밤, 질병의 밤, 슬픔의 밤, 고통의 밤에 부르짖는 소리를 우리가 또한 듣습니다. 혹은 재난과 실패, 고독과 빈곤, 근심과 유혹의 밤에 부르짖는 음성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와 같은 부르짖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우리의 신령한 귀가 듣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저녁 이사야처럼 밤중에 부르짖는 음성을 먼저 들어야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도 들어야겠습니다. “아침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캄캄한 밤에 부르짖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아침이 정녕 온다”고. 압박과 억울한 가운데서 신음하는 민족들에게 외칩니다. “오래지 않아 자유의 아침이 옵니다. 해방의 아침이 옵니다”고.

사실 어떤 의미에선 우리 나라도 밤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들으세요! 우리가 언제나 이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아침이 옵니다. 오랜 질병의 밤에 부르짖는 이들에게 건강의 아침이 온다고 선포하십니다. 어제 어느 권찰님이 관절염으로 많이 고생하신다고 해서 심방을 갔더니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빨리 데려가 주세요”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까지 기도하겠습니까? 밤은 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고통의 밤이 지나고 건강의 아침이 올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실패의 밤에 부르짖는 이들에게 성공의 아침도 올 것입니다. 번영의 아침이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슬피 울며 눈물을 흘리지마는 기쁨의 아침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승리의 아침이 옵니다. 그러므로 기다려야 합니다. 아침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시대에 큰 민족의 밤을 지나오면서 얼마나 얼마나 부르짖었습니까?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8.15 해방의 아침이 왔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기까지 많은 약소국들이 압박의 깊은 밤에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많은 약소 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된 것입니다. 흑암의 대륙이라 불리우던 아프리카도 수없이 많은 새 나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밤이 깊으면 반드시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날 동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 가운데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 것을 다 하면 단 것이 온다고 했습니다. 지금 미국에 가 계신 지관순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실 때 가정 심방을 하시다가 아주 가난해서 고생하시는 가정에 가서 위로하실 때 “이 집은 부자될 집입니다”하셨다는 말씀을 제가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니 더 가난해질 수 없는 가정에서는 앞으로는 점점 더 나아지면 나아졌지 못해질 수 없이 가난하단 말입니다. 성경에도 ‘저녁에는 눈물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밤이 깊으면 반드시 아침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깊은 밤중에 있을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계속 싸우고, 계속 분발하고, 계속해서 용기를 내고 내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합니다. 왜요? 아침이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을 지날 때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새벽 직전이 제일 어둡다는 것입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워진 증거입니다.

우리가 일제시대에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해방되기 바로 얼마전 얼마나 우리 민족의 편에서 보면 캄캄했습니까? 우리의 말을 일본 사람들이 금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성을 갈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한국 민족에 대한 말살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해방의 아침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어두울수록 그 밤이 거의 지나간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참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특히 여기 보니 “너는 악을 갚겠다 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네가 악을 갚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 이와 같은 권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잠언 24장 29절 “너는 그가 내게 행함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정신을 되받아서 로마서 12장 17절, 19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에도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세요! 그가 얼마나 참고 기다렸습니까? 하나도 변명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억울한 일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두운 밤이 지나고 광명한 아침이 오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말하자면 그의 원수들과 같은 존재인 형들에게 대해서도 원수 갚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요셉은 그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창세기 50장 19절을 기억하시지요?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였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요셉의 형들입니까? 요셉입니까? 요셉은 문자 그대로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사람의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0장 18절에 “무릇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8장 17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노라”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기다린다는 것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군인이 지원군을 기다림같이 가물어 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림같이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연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간절히 사모합니까?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사모합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을 아는 포수들은 시냇가에 숨어 있다가 사슴이 시냇가에 나올 때 잡는다고 합니다. 즉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다는 것은 생명이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으므로 생명을 내걸고 시냇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간절하십니까?

뿐만 아닙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준비된 사람이라야 기다립니다. 시험 준비가 된 학생이라야 자기의 실력을 나타낼 수 있는 시험 날짜를 기다립니다. 손님 맞을 준비를 다한 가정이라야 손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준비 못한 사람은 손님이 와도 걱정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과 약혼한 신부인데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십니까? 신랑 맞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 저녁 주님이 오신대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면서 반가이 나아가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하박국 2장 3절 “이 묵시는 전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사도행전 1장 4절에 예수님도 제자들을 향하여 분부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시편 130편 5-6절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가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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