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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히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2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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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히 여호와를 경외하라(잠언 22:1-16)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권면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잠언에도 여러 곳이 있습니다.

잠언 3장 34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언 11장 2절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5장 3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16장 19절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리라.”
잠언 18장 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언 29장 23절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그밖에 구약 시편에도 겸손한 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10편 17절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시편 22편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편 147편 6절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시편 149편 4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야고보서 4장 10절 “왕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미가서 6장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우리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여덟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말하자면 겸손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1절에도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마음은 낮추는 자 즉 겸손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로마서 1장-11장까지는 교리적인 것을 다뤘고 12장 이하는 윤리적인 것을 다뤘는데 여기 그리스도인의 윤리편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즉 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습니다.

가령 에베소서도 1장에서 3장까지는 교리편이고 4장 이하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교훈인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했습니다.

여기에 뜻이 있습니다. 성경은 겸손을 제일 먼저 가르칩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줍니다. 동양에서는 흔히 삼덕을 지(知), 인(仁), 용(勇)입니다. 지혜롭고, 어질고, 용감한 것입니다. 겸손이란 말은 별로 없습니다. 헬라 사상에서는 한 가지 더 해서 절제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칠 뿐더러 예수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식사(食事)하시기 위해서 어느 곳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성육신의 지상 생활 전체가 즉 예수님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지상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5장 2절을 읽을 때 들어보세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겸손을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옛날 파사나라 재상 하만이 교만해서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인사를 잘 안한다고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 뿐만 아니라 온 유대 사람을 학살하려는 음모를 세웠습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다 세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기가 모르드개를 매어 달려던 기둥에 매어 달려 죽은 이야기를 에스더서에서 여러분이 다 읽어보았을 줄 압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이 교만해서 자기 궁전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 궁전을 내려다보면서 “내 능력과 지혜로 이 모든 성을 건설한 것이 아니냐?”고 호언장담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을 한지 얼마 안가서 느부갓네살왕의 정신이 나가서 그만 미쳐 버렸고, 들로 나가서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그 머리털이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어요? 교만해서요.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벨사살왕을 보세요. 그가 교만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던 거룩한 기명을 내다가 술을 마셨습니다. 천여 명의 고관대작들을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면서 이런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바로 그날 저녁 메데와 파사의 연합군이 쳐들어와 벨사살왕은 죽고 온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왜요? 벨사살왕이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요 그 때의 왕 헤롯이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게 거짓 영광을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압니까? “주님의 사자가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교만하여 하나님에게 이런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보면 교만한 사람치고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적하셨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초인간 사상은 기독교는 노예 종교라고 비웃더니 정신이상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를 보세요. 게르만 민족은 초인간적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적게 교만한 자를 적게 대적하시고 크게 교만한 사람은 크게 대적하십니다. 이것은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이는 것은 자연현상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입니다. 병은 비어야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 빈 마음의 병에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넣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7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자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같이 해서 소성케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는 대로 위대한 인물들은 겸손했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그들은 다 겸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겸손한 과학자가 새로운 진리와 사실을 발견합니다. 뉴우톤의 유명한 이야기를 여러분은 다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지식보다 더 적을 것이라”고. 위대한 과학자는 진실로 겸손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고.

어떤 나이 많은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과 신학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교종교학을 배우고 성경비판학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이제는 성경을 그대로 믿습니다.”

사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여러분, 농촌에 가 보세요. 열매 없는 이삭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많은 이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습니다. 고개가 푹 수그러질 만큼 공부해야 합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한 번은 연옥에 가서 구경을 하는데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잔등에다 무거운 돌을 가득 지고 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 안내자가 하는 말이 “예, 저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 때에 너무 교만해서 허리를 한 번도 굽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낙원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므로 지금 허리 굽히는 연습을 하느라고 저 모양입니다.”

아, 미리 좀 허리 굽히는 법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사실 어떤 분은 너무 교만해서 예수 믿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면 겸손한 사람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1. 소극적인 방면부터 생각하십시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너무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합니다.
불평이나 원망하지 아니합니다(하나님께나 사람에게).

2. 적극적인 방면으로는
순복을 잘 합니다. 법을 잘 지킵니다.
어디에 가나 봉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남이 알든 모르든 언제나 마음이 평안합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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