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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잠 2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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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봉독한 말씀의 첫 부분인 1-3절은 사치와 육욕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식욕이라는 본능이 있어서 먹는 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 마귀란 존재는 우리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마귀란 존재는 우리의 본능을 약점으로 잡아서 사람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먹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제도 먹는 일로 합니다. 먹을 때는 대개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런데 이 열리는 틈을 타서 죄가 들어오기 쉽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대로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 하였는데 무엇을 통해서 죄를 지었지요? 먹는 것을 통해서 여자를 유혹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세요!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묻기를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죽을까 하노라’하셨느니라. 그 때 뱀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알아서 그런 거야.’ 그 말을 들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먹을 것이 아니라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한마디로 “남편에게 주매 그는 먹은 지라”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여자가 하나님의 금하신 열매를 먹고나니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지 남편을 보니 너무 순진하단 말이요. 그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도 없이 그저 평안하고 자기를 보는 눈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단 말이요. 그런데 여러분, 죄라는 것은 이상합니다. 자기 혼자 죄를 짓고 마는 것이 아니라 죄 지은 후에는 다른 사람도 같이 죄짓기를 원하는 묘한 마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보!”
“왜요?”
“나 당신한테 꼭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건 뭔데요. 또 새삼스럽게.”
“말할테니 화내지 않을 꺼에요?”
“아니 화를 내다니 내가 언제 당신한테 화낸 적이 있소?”

사실 아담과 하와는 이날까지 한 번 말다툼해 본 적이 없는 그저 다정하기만한 부부였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다음 순간부터는 벌써 마음이 병이 들어 ‘남편이 나를 진정 사랑하나?’ 하는 의심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다짐합니다.

“여보, 당신 나를 사랑하지?”
“아무렴, 내가 이 세상에 여자라고야 당신밖에 더 있소? 원 별걸 다 묻는구먼.”
“아니야, 나는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아 그러면 어떻게 하면 확인이 되겠소. 내가 당신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아닌게 아니라 사랑하는 부부는 가만 보면 남편이 부인에게 꼼짝 못하고 졸졸 끌려갑니다. 사실 힘으로 말하면 여자보다 남자가 월등히 센데 여자한테 남자가 진단 말이요. 사랑 때문에 그래요. 남편의 사랑을 확인한 아내 하와는,

“여보, 고마워요. 그럼 내가 하라는 것 다 할꺼에요?”
“아무렴.”
“그래요, 이 과실 말이요” 하면서 아내가 내 놓은 것을 보니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엄히 명하신 과실이 아니겠어요? 눈이 둥그래진 남편은 거의 경련을 일으키다시피 몸이 굳어져,
“아니, 그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과실이 아니요?”
“그래요.”
“여보, 그것을 왜 땄어요? 그걸 먹으면 죽소” 하며 벌벌 떱니다.
이 때 하와는 토라져서 말합니다.

“여보, 나는 이것을 먹었어요. 당신이 보시다시피 죽지 않았어요. 당신도 들어보세요. 참 맛이 있어요. 이제야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너무 모르고 살았어요. 사람이 사는 것은 그게 아닌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당신 나 사랑한다고 했지요? 무엇이나 다 하겠다고 했지요? 이 위선자! 만일 내가 죽으면 당신 혼자 살거예요? 나 죽으면 누구하고 결혼할 거예요!”
따지고 보니 그렇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만 아담이,
“어디 먹어 볼까?” 하고 받아먹었답니다.

그런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 ‘아이쿠’ 하는데 목이 걸려서 남자의 목에는 뼈가 솟아났다고 합니다. 먹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죄가 이 먹는 것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리고, 4-5절에는 재물에 대한 경고입니다. 물욕을 경계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식욕과 아울러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돈 없이 살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필요 없다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7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을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돈을 쓰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맡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인데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내 것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다닌다고 그 새들이 자기 것으로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그 새들은 날개가 있어서 오늘은 여기에 내일은 다른 밭에 날아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뜻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본능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할 때 죄가 됩니다. 먹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먹을 때 죄가 됩니다. 물질 그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쓸 때, 그리고 지나치게 탐할 때 죄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본능대로만 살지 아니하고 이것을 제어할 줄 아는 것에 있습니다. 본능대로만 살면 짐승이지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지 생각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입니다.

까치는 50년 전이나 100년 전이나 아니 그 전에나 똑같이 집은 짓습니다. 본능대로 짓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 지으려고 생각하고 연구하기 때문에 발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특권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는데 따라서 그 사람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는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9편 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를 발하니.” 즉 깊이 생각할 때에 불이 붙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생각이나 깊이 오래하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불이 납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생각도 그렇고 나쁜 생각도 그렇습니다. 옛날부터 오늘까지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고 공헌한 분들은 다 좋은 생각을 깊이 한 분들입니다. 위대한 종교가,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과학자가 다 그렇습니다.

알키메데스 같은 분들은 같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면서도 어떻게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가벼워질까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저 유명한 “알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고 자기가 목욕하고 있는 중인 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찾았다, 내가 발견했다”하면서 벗은 몸으로 기뻐하며 거리에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뉴톤(Newton)같은 분은 사과 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악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큰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일석이조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을 오래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그런 흉악한 사람을 만들고 흉악한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통해 보셨겠지만 어떤 30대 여인이 생명보험 제도를 깊이 연구해서 (나쁜 방면으로) 결국 무서운 범죄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항상 자기의 생각을 살펴서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사람은 흔히 생각하는대로 됩니다. 생각하는 일을 합니다. 생각은 알과 같습니다. 비둘기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귀여운 비둘기를 깔 것입니다. 그러나 독사의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지막에는 독사 새끼를 깝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은 성경에 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 다른 하나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에 속하는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비록 땅에 거하지마는 결국 위에 속해 있으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골 3:2).

그러면 땅에 속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가령 분한 생각,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거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을 때 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오래 품으면 결국 나 자신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하는 생각, 이것도 땅에 속한 생각입니다. 남을 시기하는 사람은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승기자염이라고 나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그런 감정인데 이것은 실상 나 자신의 교만, 이기주의, 열등감 같은데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은 나 자신이 타락합니다(사울 왕의 경우).

또 한가지는 불결한 생각입니다. 정욕의 생각입니다. 인간에게는 역시 성적 본능이 있어서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적 충동 또는 유혹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결한 생각을 계속해서 품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품을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대로 “내 머리 위를 새가 날아다니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새가 내 머리가 앉아 둥지를 튼다면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잠깐 동안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둥지를 틀어서 음란죄를 짓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이런 요소를 다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크게 타락하는데 이르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 옛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적극적인 길은 위엣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병 속에 들어있는 공기를 내보내려면 맑은 물을 넣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기는 밀려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불가입성의 원리”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면 땅엣 것은 자연히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지혜, 사랑, 공의, 능력을 생각하라고, 산천초목을 볼 때, 오곡백과를 볼 때, 사람을 볼 때, 사귈 때, 사업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온유를, 진리의 교훈과 깨끗한 생활을,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승천과 하나님 우편의 빛나는 얼굴을, 그의 사랑과 인내와 자비와 긍휼, 능력과 성결을 생각하라고.

분한 생각이 들어올 때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기도하신 말씀을 생각하라고. “오! 하나님! 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이들이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은 순교 당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위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있습니다. 천국 생각을 늘 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보나 천국은 저보다 더 좋겠지! 생각하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 거듭났나? 그렇지 못한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무엇을 생각하나?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무엇을 생각해 왔습니까?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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