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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모를 즐겁게 하는 자녀 (잠 2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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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즐겁게 하는 자녀(잠언 23:12-25)

오늘 저녁 봉독한 말씀은 부모와 자녀간에 곡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령 12절에 “부모의 훈계에 참석하며 지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였고 13절에는 부모로서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고 하면서 혹시 잘못이 있을 때 자식을 때리는 일이 있는데 물론 이것이 자식에게나 부모에게 괴로운 일이지마는 사실은 자식에게 큰 유익이 되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를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다 사랑합니다. 따라서 자식을 둔 부모로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선 어린이들의 예쁜 얼굴을 보는 부모의 기쁨이 있습니다. 아마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마는 어린이들의 얼굴보다는 더 아름답게 보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더구나 어머니의 생각으로는 자기 아기보다 예쁜 것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어린애들도 가만히 보면 더 예쁜 아이가 있고 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이 어머니에게는 다 예쁩니다. 자기 아이가 제일 예쁩니다.

어떤 애 어머니가 아기를 낳으면 찾아간 손님에게 아기를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자기에게는 더 이상 없이 예뻐보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그런 아기를 보고 ‘참 잘 생겼다’하고 칭찬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어요? 제 가까운 친척 가정에 결혼하고 3,4년동안 어린애가 없어서 무척 기다리다가 딸애 하나를 낳았어요.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요. 더구나 그 애를 얼마나 예뻐하는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아무리 보아도 애가 예쁜 대는 없어요. 저 뿐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도 업고 나가면 한 사람도 ‘그 애 참 예쁘다’하는 사람이 없대요. 언젠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예쁘게 생기지 않는 아이를 볼 때는 (물론 부모는 말할 수 없이 예뻐하는데) ‘야, 이 아기 참 Baby로구나’ 하라고 그래요. 하긴 거짓말로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다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남의 아이 밉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어린애 엄마에겐 자기 아이가 제일 잘 생겨 보입니다. 더구나 애가 몇 달이 되어서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면 웃는 아기 얼굴처럼 귀엽고 예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린애가 좀더 커서 뒤집게 되면 그것도 귀엽고, 배밀이를 하게 되면 그것도 자랑스럽고, 벌렁벌렁 기어다니면 그것도 예쁩니다. 어린아이들의 동작 하나 하나에서 부모들은 기쁨을 가집니다.

그러다가 이 어린애가 좀더 자라서 ‘엄마, 아빠’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얼마나 예뻐집니까? 그래서 이 때쯤 되면 엄마들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애 엄마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아이들이 말 몇 마디 하게 되면 부리나케 다른 사람에게 자랑을 합니다. ‘우리 애는 벌써 못하는 말이 없어요.’ 그저 말 몇 마디 겨우 하는 것을 본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요? 사랑스러워서 그래요. 그리고 아기가 백일만 되면 백일 잔치한다 돌이 되면 돌잔치를 정성스레 준비하는 것을 봅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저는 물론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만 말을 들으니 애 엄마가 아기에게 젖먹이는 재미도 대단히 좋다고 합니다. 또 아기 업고 다니는 기쁨도 크다고 합니다.

전에 어떤 목사님은 예배당에 나올 때 아기를 업고 오면 너무 시끄러우니까 예배당에 올 때는 아기를 업고 오지 말라고 광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광고를 들은 아기 엄마들이 불평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아기 업고 오지 말라는 광고는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아기 업고 오시는 엄마들은 예배 시간까지 업고 계시려면 너무 힘드실 것 같아서 작년부터는 탁아부를 두어서 어린애들을 탁아부에 될 수 있는대로 맡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의 어린애 엄마들은 애들을 특별히 예뻐하기 때문에 탁아부에 맡기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아서 꼭 자기가 데리고 다닙니다. 뭐 그것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땅 방에서 예배를 드렸으면 합니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지 않은 분들은 어린애의 형편이나 어린애 엄마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든요.

제가 어린애 엄마들이 어린애를 데리고 예배드리는 것을 가끔 보면 아주 명랑합니다. 어린애를 보는 엄마의 얼굴에 명랑한 기분이 가득합니다. 사실 어린애와 엄마들이 함께 예배드리는데는 강대상이 안보여도 별로 지장이 없어 보입니다. 가만 보면 어머니들은 강대상을 별로 안보고 아기 얼굴만 보려고 합니다. 좀 분주하기는 하지만 어린이 방에서 얼굴 찡그리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어린이들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그러다가 애들이 점점 커서 유치원에 가면 얼마나 예쁩니까? 유치원에 가서 그림 하나 그려 오면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까? 그래서 어떤 어머니는 미술 공부, 피아노 공부, 무용 공부, 이것저것 다 시키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너무 장해 보이고 다 잘하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초등학교가면 얼마나 예쁩니까? 혹시 상장이라도 하나 타 가지고 오면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래서 방에다 사진틀에 넣어서 걸어 둡니다.

흔히 학부모들 사이에 ‘치맛바람’이라는 말 더러 하는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해 보니까 애들이 너무 예뻐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여기저기 분주히 다니다 보니까 자연히 치마에 바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어린이는 가정에 화평을 가져옵니다. 어떤 때는 부부간에 싸움을 하고 시퍼래서 앉아 있다가도 애들이 학교에 갔다 ‘엄마, 아빠’하고 돌아오면 성났던 것도 봄동산의 눈처럼 사라집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 싸움이 심각해져서 ‘나는 이런 집에서는 못살겠다’ 하면서 보따리 싸 가지고 부인이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린애가 놀다가 ‘엄마 어디가?’ 보따리를 보면서 ‘엄마 못 가, 나하고 살아’ 매달리니 그만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린애가 이혼 방지하는 데는 가정법원 판사보다 나은 줄 압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혼하는 가정을 보면 애가 있는 가정보다 애가 없는 가정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도 부모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도 큼 기쁨이 있습니다. 취직을 하게 되면 더 기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뤄도 기쁨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많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내 아들아 만일에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제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하였습니다. 또 24-25절에는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하였습니다.
 
신약 성경 요한 3서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른 소식을 듣는 것도 다 귀하고 기쁜 일이지마는 자기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제일 기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부모도 그렇고 육신의 부모도 그렇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말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 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 하나님이 뜻을 순종하는 생활, 그 계명을 지키는 생활, 범사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생활, 성결, 겸손, 진실, 근면, 충성, 절제, 사랑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교회 봉사는 적극적으로 합니다. 복음을 전파합니다. 교육에 힘씁니다. 봉사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정성껏 일합니다. 이 얼마나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일입니까? 믿는 부모로서 제일 큰 기쁨, 목회자로서 제일 큰 기쁨이 무엇입니까? 내 아들, 내 딸이, 내가 전도해서 믿는 사람이 혹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는 것을 볼 때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왜 이것이 그처럼 큰 기쁨입니까? 기도의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사사가 될 때 어머니 한나가 얼마나 기뻐하였을까요? 사무엘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교육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교육이나 교회 학교의 교육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도를 가르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수고의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고임을 받는 자녀가 되기 위해 부모가 수고한 보람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 이것은 신앙의 계승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았을 때는 내가 십자가의 깃발을 들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십자가의 깃발, 바톤을 놓을 때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이 깃발을 놓을지라도 내 아들, 내 딸이 내가 들고 가던 그 깃발을 계승해서 나대신 잡고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기쁨이 있겠습니까?

가령 어느 장로님 댁에서 자녀 중에 대를 이어서 장로님이 되시는 것을 보게 되면 이것보다 더 기뻐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 뿐입니까? 이 기쁨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영원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모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만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 아니고 내 아들과 내 딸이 면류관을 받을 것을 생각할 때 영원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이 구절을 거꾸로, 반대로 읽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치 아니한다 하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슬픔이 없도다.” 부모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일까요? 믿는 부모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다윗의 일생을 기억하시지요?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큰 슬픈 장면이 언제입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아 자기를 반역하고 역적 행동을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네 대신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구나” 하며 대성통곡하지 않았습니까? 자녀가 진리에 행하지 아니할 때 믿는 부모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하고 공부 많이 했고 아무리 돈을 잘 번다 할지라도 진리에 행하지 않는 아들은 결국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옵니다. 진리 따라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자면 신앙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십자가의 깃발을 놓을 수밖에 없을 때가 오고 있는데 이 깃발을 나 대신 들고 갈 사람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 뿐만 아닙니다. 내 자녀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영원한 슬픔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마는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이 시간 보니 우리 가운데 젊은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우리 스스로를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떤 자녀인가? 내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인가 그렇지 않으면 슬픔을 주는 자녀인가? 내가 부모에게 언제나 웃음을 주는 자녀인가? 혹은 내 부모의 눈에서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때는 없는가? 만일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녀가 되었다면 이에서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더 할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힘써 옳은 길을 걷고 주의 일에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에 한 분이라도 그렇지 못하신 분이 혹 계십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이러한 이는 부모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불효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떠한 자녀입니까? 그렇다면 가장 큰 기쁨의 소유자인 것을 기억하세요. 그러므로 다른 것이 혹 좀 불편하시더라도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에서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렇지 못한 자녀를 가지신 부모님들이 계십니까? 이런 부모님들에게 저는 중심으로 종정을 가집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상심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낙심하시지 마세요. 계속해서 기도하고 힘쓰세요.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현세가 아니면 여러분이 천당 가신 다음에라도 꼭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시고 힘써 기도하세요. 꼭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으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입니까? 그렇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십니까? 혹 근심거리가 되는 자녀는 아닙니까?

내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나? 걱정의 대상인가?
내가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았나?
부모된 우리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었나?
이를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힘쓰고 있나?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녀인가? 믿음으로 걷습니까?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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