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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족을 모르는 생활 (잠 3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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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을 모르는 생활(잠언 30:15-16, 18-20)

오늘 저녁 우리는 얻으면서도, 누리면서도 만족을 모르는 생활에 대해서 기록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저 “다고 다고”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족을 모르고 언제나 불평 불만인 사람의 생활이 그러할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이렇게 5,6월이 되면 논에서 모를 하였습니다. 나마 여기도 그런 게 있을 줄 압니다마는 논에 모를 심을 때 제일 싫은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거머리가 붙는 것입니다. 이 거머리는 피를 좋아하는 벌레여서 한 번 붙으면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처음에는 조그만 벌레가 점점 피를 많이 빨아먹으면 새끼손가락만큼 배가 불러서 축 늘어집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집어 뜯어버리기 전에는 스스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일곱 마리 여덟 마리가 붙어서 피를 빨아먹습니다. 제가 듣는대로 요 사이는 시골서 나일론 양말을 신고 논 모를 하면 괜찮다고 합니다. 거머리는 만족할 줄 모르는 생활을 하는 것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잠언 기자가 왜 이런 말을 썼을까 생각해 보셨어요? 우리 인간 사회에도 이런 일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훈으로 주신 거예요.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에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하였습니다.

스스로 만족해하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자족이란 말의 반대되는 말은 불만이란 말일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도 어떤 경우에는 필요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보다 나은 자리로 나아가려는 노령이 따르기 때문에 자연히 발전하고 향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무식한 사람이 그 무식한데 대한 불만이 있을 때 승부할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이 빈곤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 가정 생활의 향상과 수입의 증대를 위해서 좀 더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정치에서도 불의, 부정, 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있을 때 사회의 정의 구현을 위해서 그 국민은 좀더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밤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지내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전기를 발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갈 때 옛날처럼 말이나 소를 타고 가는 것으로 만족해 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훌륭한 교통기관이 발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옷을 지어 입을 때 고작 짐승을 잡아 짐승의 가죽으로 해 입었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였다면 오늘과 같이 아름답고 편한 옷을 만들어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이 상태가 어떤 것이든지 그것으로 만족하다면 아무런 성장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성장해야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서 보다 나은 자리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 이하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범사에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향상할 것은 향상하도록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누구나 때로는 내 자신이 고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당 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불치의 병이라든지 불구의 몸이라든지 부득이 당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때 계속해서 이런 자리에서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하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 이런 간증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 본 일이 있는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사람의 말로 가히 표현 할 수 없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대로 하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것을 가시라고 표현하였겠습니까? 우리는 그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에 말씀하지 않은 진리를 억지로 추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그 몸에 괴로움을 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괴로워서 이 가시가 떠나가기 위하여 주님께 세 번 간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오히려 인간 편에서 볼 때 약한데서, 부족한 것 같은데서 온전하여 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려 합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원망한다고 그 짐이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쓴 잔이 달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악한 영향만 더할 뿐입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하나라도 더 생기고 머리카락은 하나라도 더 세기 마련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자신에게만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악한 영향만 줍니다.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결국 온 가족이 불행해 집니다. 가령 가정 주부가 이런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이 밖에 나갔다가 집안에 들어오기를 싫어합니다.

가정 살림이 넉넉하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 가정이 화평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하였습니다. 15장 16절에는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고 그 다음 절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인간의 임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는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행복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원망하는 죄입니다. 그들은 부득이 광야를 지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면 광야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에는 물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불만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애굽에서 떠나서 이런 고생을 하는가? 애굽에서 떠나지 않고 그래도 고기 가마 옆에 있었을 것인데 거기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좋을 뻔했지! 마실 물도 없으니 어떻게 살란 말인가? 지도자 모세를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약속한 땅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신앙 생활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스스로 만족한 생활을 할 때 영혼이 가나안 땅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옛날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우리에게 이 교훈을 주었습니다. 가령 옛날 경행록이란 책에는 지족가락이요 무탐즉우라(知足可樂 無貪卽優)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말면 가히 즐거워 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말도 있어요. “지족자는 비천하여도 영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이라”하였습니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비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고 했어요. 이런 말도 또 있어요. “지족상족이면 종신불욕하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라.” ‘만족할 줄 알아서 항상 만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그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서양의 철학자들을 보면 동양의 철학자보다 더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특히 헬라의 철학 가운데 스토익파에서는 자족이란 말을 썼는데 바로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우타” 혹은 “아우타케이”란 말인데 마음 속으로는 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사실 스토익파 윤리의 최고 목적은 자족한 생활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스토익파에서는 자족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네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 하였습니다. 만족한 생활이란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줄이는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뜻이 있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명한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세상에서 가장 부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이 때 노철인 소크라테스가 얼른 대답하는 말이 “가장 적은 것에도 만족해하는 사람이 가장 부한 사람이지” 하더랍니다.

전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스토익파의 유명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토록 자기의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자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헬라의 왕이 유명하다고 소문이 퍼진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에 이 성자의 가난한 형편을 본 왕이 “선생께서는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엇이든지 원하시면 제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선생께 해 드릴 터이니 말씀해 주십시오.”하고 말하니까 이 철인 디오게네스는 “예, 감사합니다. 저는 대왕께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대왕께서 제 앞에 계시니까 햇빛이 가리워서 그러니 다만 좀 비켜만 주십시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 이것이 헬라의 철학자들이 가르치던 것입니다. 감정을 제거하라. 애정의 감정까지 제거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만족한 생활을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요?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인간은 감정이 없는 목석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 마디로 말해서 목이 말라 있습니다. 이 갈한 목을 적시려고 무엇을 찾아 헤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 본능을 억누른다고 눌러지는 것도 아니요, 없애 버리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목마른 인생, 배고픈 인생이 마실 물을 찾아서 헤매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분주히 다닙니다. 어떤 때는 물질이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 같아 돈을 찾아 헤매입니다. 의리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이 보인다면 돈만 보고 좇아 다닙니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깊은 곳에서 안타까워하는 갈증을 해갈시킬 수가 없습니다.

짐승은 물질로 만족합니다. 배고파하는 짐승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목말라 하는 짐승에게 마실 물을 주면 그것으로 만족해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본능을 충족시키면 그것으로 다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참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요? 사람에게는 겉으로 보면 짐승과 별로 다른 것이 없지만 이 속에는 영원히 변함없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이 만족을 얻기까지는 육신적인 것을 아무리 채워 준다고 해도 거기에서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의 고백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그는 사람으로 가질 수 있는 재물, 지식, a명예, 권세를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부족한 사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최고 영화를 말씀하실 때 “솔로몬의 영화”라고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헉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을 다 누려 보고 한 말입니다. 여기서 진리가 있습니다. 영혼의 기갈을 세상의 것으로 만족시킬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다고 다고”합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탑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참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1절, 2절을 보세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몸이 마실 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영혼의 갈급함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을 기름진 것으로 즐겁게 하세요.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통해서 갈급한 여러분의 영혼에 참 만족을 주도록 하세요.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 7:37-38) 하였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만족한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주님을 영접할 때 비로소 참 만족을 얻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젓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이 더 할 뿐입니다.

참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옛 시인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만족하도다. 이것은 옛 시인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나아 오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만족을 얻기 원하십니까? 주님께 나아오세요.

1. 자비한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부르신다.
사랑의 햇빛을 왜 버리고 점점 더 멀리 가나
(후렴) 지금 오라, 지금 오라, 자비한 주께로 지금 곧 나아 오라.
2. 고달파 지친 자 쉬라신다, 쉬라신다, 쉬라신다.
무거운 짐을 다 가져오라 다 벗겨 주시리라.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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