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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를 배웁시다 (잠 30: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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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서 30장 24-30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세상에 가장 약해 보이는 곤충 내지 짐승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9절 이하에 기록된 짐승들은 그 반대로 위풍당당하고 강한 짐승들입니다. 사자로 말하면 짐승이 왕입니다. 사자 앞에서는 어느 짐승이 가히 도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자는 다음에 나오는 토끼보다 많지 못합니다.

사냥개도 그렇습니다. 포수가 뒤에 따르는 사냥개는 의기양양합니다. 포수가 짐승을 일으켜 놓으면 훈련된 사냥개는 놓치는 법 없이 따라가서 덮쳐 물고 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수렵의 대상이 된 짐승들 그것이 꿩이든지 토끼든지 심지어 힘이 센 멧돼지라도 쫓아오는 것을 느꼈을 때는 기가 죽어 도망에 여념이 없고 자기의 힘도 다 발휘해 보지 못하고 잡히고 맙니다.

숫염소는 어떻습니까? 염소라는 짐승은 얼른 보면 양과 비슷하지만 그 성품은 그저 온순한 짐승인 반면에 염소는 그 성품이 매우 사납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할아버지께서 염소젖이 좋다고 새끼 염소를 사 오셨는데 그것을 기르는 것은 제가 책임을 졌습니다. 시골이기 때문에 특히 대동간 가에는 넓은 초원이 많이 있기 때문에 동리 사람들은 긴 고삐를 만들어서 풀이 좋은데다 말뚝을 박아 놓으면 2,30m반경으로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기 때문에 낮에 점심이 끝나면 빨리 가서 데려 오기만 하면 됩니다. 풀밭이 너무 좋기 때문에 짐승들이 잘 자랍니다.

그런데 이 염소가 말이에요. 처음 새끼 떼는 귀엽고 또 힘도 약하니까 잘 끌려 다니는데 점점 자라니까 힘도 강해지고 고집이 생깁니다. 소 같으면 힘이 세질 때 코를 꿰면 그만인데 염소는 뾰족해서 소처럼 꿸 수도 없고 그저 목을 끌고 다니는데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자기 마음이 내키면 잘하지만 조금 비위에 거슬리면 그저 마구 달아납니다. 그러니까 초등 학생인 저는 한참씩 끌려가곤 했습니다. 그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아 그래서 어린 제 마음에 화가 나서 회초리로 때리면 어린아이를 의식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매를 맞는 게 아니라 덤벼듭니다. 막 받습니다. 염소는 받는 선수입니다.

제가 듣는대로 목장에서 양을 키우는 사람들이 양을 수백, 수천 마리를 키우는데 양의 성품은 그저 온순하기만 하고 자기들끼리 뭉치기만 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면 더운 여름에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뭉치고 또 뭉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의 숫자에 비례해서 양 백 마리에 염소 한 마리 정도를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함께 풀을 뜯어먹고 지나는데 한가지 다른 것은 이 염소는 돌아가면서 양들이 한 곳에 뭉친 것을 보면 쫓아가서 뿌리로 받아 헤쳐 놓는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도 그런 것 같아요. 교회는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 그의 기르시는 양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꼭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소도 간혹 있습니다. 우리 양들은 어리석고 순해서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도 양인지 염소인지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에 비취어 볼 때 내가 양인가 염소인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염소 같다면 거듭나서 염소의 성품, 염소의 성품, 염소의 생활을 버리고 양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를 한 번 읽어보실까요?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자기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했습니까? 양은 온순합니다. 반대로 염소는 강퍅합니다. 양은 모이기를 힘씁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아까 읽은 말씀대로 하면 염소와 양을 세상에서는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주님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에야 구분이 되는데 이상한 것은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염소의 무리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염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비쳐가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자, 그리고 또 하나가 무엇입니까? “당할 수 없는 왕”이라 했어요. 옛날에는 왕의 제도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아마 오늘 같으면 다르게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가령 민주주의제도 하에 있는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라고 했을 거예요. 왕의 제도가 있으면서도 실권이 수상에게 있는 데서는 “당할 수 없는 수상”이라고 했을 거예요. 중공 같은 데서는 “당할 수 없는 주석”이라고 했을 것이고, 소련 같은 데서는 “당할 수 없는 당서기”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지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의 대표 주권자를 의미한 것일 것입니다.

여기 “당할 수 없다”는 말은 물론 당당한 세력도 의미하지마는 아무의 권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고집투성이요 독재적인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비극의 하나입니다. 권력자 가운데는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잘못이 있을 때 곧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치는 사람입니다. 가령 다윗을 보세요. 그가 그만 실수로 그의 충복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 이 사실을 당사자들 외에는 누구도 몰랐고 우리아 장군이 최일선에 나가서 죽게 한 것도 사실이 누설될 염려가 조금도 없는 일급 군사 비밀에 속했었습니다.

사람의 눈은 가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가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를 시켜서 강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나단 선지 앞에 거꾸러져서 회개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저는 다윗을 존경합니다. 옛 글에도 인유무과리오? 했는데 사람 치고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를 죄로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평범한 일 같지만 사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은 알아주지만 세상에서야 누가 알아줍니까? 그런데 그래도 나단 선지가 왕 다윗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왕의 잘못을 솔직히 지적할 수 있었던 용기가 나단에게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왕의 기분이 나빠서 “이 놈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했으면 그 말 한마디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는 생명을 내걸고 바른 말을 했고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한 권력자가 이렇게 되기가 여간 어렵지 아니합니다. 다윗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위대합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이 승만 박사께서 대통령으로 계실 때 얼마나 부정과 부패가 심했고 독재가 자행되었습니까? 아마 이 박사님 마음 속에는 자기가 가장 애국자요 자기 아니면 대통령 할 위인이 한국에는 없는 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또 밑에서는 인의 장막을 쳐 놓고 “각하, 각하 모든 것이 잘 되어 갑니다. 잘 되어 갑니다.” “지당합니다. 각하.” 이러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이 참다 참다 더 참을 수 없을 때 목숨을 내걸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4.19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박사께서는 학생들이 지금 총칼에 피를 흘린다는 소식을 듣자 그것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조건 하야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말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민족에겐 희망이 있다”고. 이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말씀드린 대로 옛 글에 “지족상종이면 종신불욕하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라”하였습니다. 만족할 줄 알아서 항상 만족하게 여기면 종신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그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것이 쉽지 아니합니다. 왕의 자리, 수상의 자리, 대통령의 자리에 한 번 오르면 내놓기가 무던히 싫은 모양입니다. 미국 같은 데서는 200년 민주주의 전통이 있으니까 할 수 없어서 헌법의 규정대로 기껏해서 8년하고는 내려앉아야 하지만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데서야 그게 쉽습니까? 사사오입을 해서라도 헌법을 고치고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기회가 있어서 대통령이 되면 다 그렇게 될 거예요.

오늘로 우리 대한민국 국회 의경 30주년을 맞는다고 하는데 30년 역사에 국회가 국회다운 역할을 한 적이 얼마나 됩니까? 어떤 때는 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고 거수 기계 노릇이나 하는 소위 선량들, 불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왕이 되면 이것이 사실 불쌍한 일입니다. 최고의 권력자일수록 힘없는 사람들의 의견이 무엇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수한 백성들의 의견이 무엇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민의 소리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너무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헤롯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가진 사실이 부당한 일이라고 충고하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고 종래는 목을 잘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어요? 바른 목소리 한다고 옥에 가두고 목잘라 버리던 헤롯이 충이 먹어 죽어 버렸습니다. 그가 아무리 큰 권세를 가졌었다 해도 누가 오늘 그를 훌륭하게 봅니까? 누가 그를 존경합니까?

사람에 대한 참된 판단은 그가 죽은 후입니다. 오늘은 옛날 헤롯같고 아합왕 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역사는 바로 증거합니다. 누구도 당할 수 없는 고집투성이 어리석은 왕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잠언 기자는 30장 24절에 자고도 지혜있는 것 네 가지를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그 지혜와 행동, 근면과 열성 면에서 사람을 관찰하고 평가하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큰 동물에만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미약한 곤충에게까지 관심을 가지시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약한 것들을 절대로 멸시하지 말 것입니다. “땅에서 작고” 세상에서 가난하여 보잘 것 없어도 극히 지혜로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령 개미를 보세요. 개미는 아주 작고 매우 약한 곤충이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양식을 모으는 데는 개미 이상 부지런한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여름철 적절한 시기를 잡아서 양식을 거둬들이는 신기한 슬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잠언 6장 6절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하였습니다.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준비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서로 돕는 곤충이 개미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개미의 역사하는 것을 보세요. 한 마리의 개미가 운반하기에 너무 큰 낟알을 물게 되면 다른 개미들이 도우러 옵니다. 서로 협력하는 곤충입니다. 더구나 저희는 기회를 활용합니다.

여름에 일합니다. 일 할 수 없는 밤, 인생의 겨울이 오는데 빛이 있을 동안에, 여름철에 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시간을 속량하라”고 하였습니다.

화살이 지나가듯 제트기가 지나가듯 세월은 빨리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내일 내일”하다가 평생을 지내 버립니다. 로마서 12장 11절에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반(토끼)을 보세요. 토끼는 약하고 겁이 많기로 유명한 동물입니다. 토끼를 키울 때 귀를 잡아야지 허리를 쥐면 허리뼈가 부러져 죽습니다. 그만큼 약한 짐승입니다. 그러므로 토끼는 스스로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 잘 보호 할 수 있도록 “바위 사이에 집을 지을”만큼 지혜가 많은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몸을 피하면 세상의 풍파와 환난이 아무리 심해도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할 바위가 되신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습니다. 또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의 도움이시오 너의 방패시로다”하였습니다.

시편 46편 1절 이하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 손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굳세게 하고 우리를 도와주시마 약속하셨습니다(사 41:10).
요한 복음 10장 28-29절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토끼는 자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바위 사이에 집을 지어 안전하게 사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바위와 그리스도의 바위 사이에 집을 지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이중 보호입니다. 이 얼마나 안전합니까? 여러분 이것을 꼭 믿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그 다음은 “메뚜기를 보라”고 합니다. 임금이 없지만 전투대형을 벌인 군대처럼 “다 떼를 지어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질서 정연함을 배우라는 뜻인 줄 압니다. 구약 요엘서 2장 25절에 보면 메뚜기를 하나님의 큰 군대라고 말했습니다. 메뚜기 하나 하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뭉칠 때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 영락 교회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사회가 왜 우리 교회를 바라봅니까? 하나로 뭉쳐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 하나로 뭉쳐 일하며 봉사할 때 사회에 큰 빛을 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빛은 작습니다. 그러나 뭉치면 큰 빛을 이룹니다.

끝으로 손에 잡힐 만 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라고 하였는데 원 뜻은 “거미”입니다. 거미는 재간이 보통이 아닙니다. 자기 뱃속에서 나오는 줄을 자기 발로 척척 갖다 붙여서 어느 기하 선생도 그런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망을 쳐 놓습니다. 거미줄을 쓸어버리면 아무 원망도 하지 아니하고 반항도 하지 아니하고 다시 또 집을 짓습니다. 곤란 속에서도 좌절 할 줄 모르는 그 끈기여! 오 놀랍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거미에게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개미의 부지런함과 준비성, 그리고 협동심을 배웁시다. 토기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만세반석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메뚜기처럼 우리 하나님이 자녀들은 하나로 뭉칩시다. 그리고 거미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되지 말고 다시 일어납시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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