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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하면 안됩니다 (욥 0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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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그가 얼마나 고통 중에 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나의 분한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내가 당하는 고통은 누구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다 모래보다도 더 무거울 것이다”라는 말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 속으로 참 안 됐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동정도 하게 되지만 그 고통의 천분의 일도 알기 어렵습니다.

엘리바스는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웠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면 참을성 있게 끝까지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욥이 답변을 했는데 매우 실감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솔직한 말인지 모릅니다.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의 고통이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워서 무게를 달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 욥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표현하기 어렵고 참기 힘든 이런 고통 속에서 욥은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되는 대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것을 뉘우칩니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이 말은 “나도 모르게끔 이런 말이 흘러 나와 버렸구나. 내 말이 너무 심했었구나”하는 말입니다.
욥은 처음에 이런 일을 당할 때는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온유함과 인내로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니고 너무 오랫동안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니 마귀의 시험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가 당하는 고난이 실제보다 더욱 커 보이게 되었습니다.

욥의 외적인 고난도 컸지만 내적인 고난 역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서 당하는 무자비한 고난으로 여겨졌습니다. 4절을 보세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이 구속 사업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육신의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사실 육신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아픈 고통입니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단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육신밖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으셨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인간이나 천사의 그 어떤 힘도 전능자의 화살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 이외에는 그 어떤 방패도 이 화살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 이외에 그 어떤 손도 그 화살을 뽑아 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이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진통제도 우리의 불타는 듯한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 한 분 이외에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 나 슬픈 일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 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합소서 오 주여
(후렴)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사람의 백 마디 위로의 말을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전능자의 화살들은 재산이나 자녀들의 손실보다도, 육체적인 괴로움보다도 훨씬 더 무섭습니다. 이 화살은 욥의 외적인 고통을 훨씬 더 심화시켰습니다.

욥은 그가 형통할 때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5-6절을 보세요.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이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제 욥이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보다도 못한 목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전에 신학사조 중에 대조적인 두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큐리안파인데,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하자고 하며 육신적인 만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토익파였는데, 지나친 육신의 극기를 주장해서 육신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절제와 극기에 주력했습니다. 아파도 아픈 것을 나타내지 말고, 화가 나도 화가 난 것을 나타내지 말고 다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스토익파에 골몰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도를 닦았나 보려고 그 사람의 한 친구가 와서 팔을 비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스토익파 사람이 “여보게, 그 팔 그냥 비틀면 부러질 걸세”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계속 그 팔을 비트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만 그 팔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팔이 부러진 스토익파 사람이 그 팔을 비튼 친구에게 “내가 뭐라던가. 그냥 팔을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어?” 하더랍니다.
이것은 만든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프면 “아야”하고 소리지르고 아파하는 것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어요? 사람은 목석이 아닙니다. 목석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욥은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음식에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할 만한 소금도 없었습니다. 욥의 형편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했던 보잘것없는 식물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소식이 감식”이란 말이 있고 “배고픔이 반찬”이란 말이 있습니다. 음식이 많아서 배가 부르면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 놓아도 별로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 적은 음식은 맛이 있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이런 찬 저런 찬 가릴 것이 없습니다.

전에 한국동란 때 피난 다니던 일을 저는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배가 고픈데 쌀이 있어서 밥까지는 지어 놓았으나 반찬거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장, 된장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소금이 조금 있어서 밥에다 소금을 조금씩 섞어 먹는데 어쩌면 그렇게 맛이 있는지요. 맨 밥에 소금 넣어 먹던 생각을 하면 반찬 없다고 투정할 수가 있겠어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까다로우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제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이제 8-9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우리의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책망과 저지를 당하면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이 더욱 격렬해지게 마련입니다. 강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무서운 세력을 내며 갈라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3장에서 욥은 이처럼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는 생명이 끝나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생각해서 세상에 난 날을 저주하고 사는 날을 원망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엄히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욥은 더욱 격렬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마치 이 세상에서 다시는 좋은 날들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은혜와 믿음의 일을 통해서도 이 지극한 환난의 날이 좋은 날로 변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그는 여전히 죽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처지에 처했다고 해도 거기에 소망이 있을 때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소망이 없을 때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고 절망하여 죽기를 원하며, 믿지 않는 사람인 경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전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바알신 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위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의 표독스러운 앙갚음이 무서워 멀리멀리 도망했습니다. 그처럼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던 엘리야, 바알 선지와 대결하여 승리한 용감한 엘리야였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나고 마음이 약해져서 로뎀나무 밑에 누워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약해지기 쉽고 낙심하기 쉽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망을 대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비참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체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이 가로막히게 마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그런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또 다른 길을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도록 하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빅톨 유고는 48세 때 불행하게도 게르세이 섬으로 추방이 되어 20년 동안을 고독한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형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빅톨 유고는 오히려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세계적인 명작 ‘레미제라블’(쟝발장)을 저술하였습니다. 빅톨 유고에게 게르세이 섬의 귀양살이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명작을 남겼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의 감옥 생활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운명을 저주하고 간수들을 욕하며 비난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향하고 오히려 그의 갇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절망적인 환경을 선용하지 못하고 곧 잘 좌절해 버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침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더구나 상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새로운 고통을 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때 우리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에게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는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일로 인하여 마음이 감옥에 갇힌 것과도 같이 낙심되고 절망 상태에 빠진 분은 안 계십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가도록 최선을 다 합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했는데도 실패한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를 부둥켜 안고 있을 때, 우리의 실패는 정말 수치스러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새 힘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오히려 사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죽기를 소망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새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죽을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때 죽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빠져 들어가는 우리의 팔을 잡아당기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끝으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곤고한 자는 불쌍히 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가혹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14-16절).
환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했습니다. 환난을 당해 보아야 참된 우정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환난 당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누구이며 가면과 같은 친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색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판단하고 정죄할 줄은 알았지만 사랑과 동정 그리고 자비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의 티는 볼 줄 알았지만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어려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말이 나올 수가 있는데 조심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주님께 구합시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악의 때를 선의 기회로 바꾸십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동정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언제 그런 자리에 들어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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