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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 말이 없습니다 (욥 0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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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난 시간 생각한 대로 욥의 친구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이 욥에게 와서 한 말은, 욥을 동정하고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고난 중에 있는 욥의 감정을 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욥은 그 말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빌닷이 욥에게 말한 대로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굽게 하시지 않는다”는 이론에 동의합니다. 흔히 우리는 논쟁의 상대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반박하기 쉬운데 욥은 아무리 적수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바른 말을 할 때는 그 말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욥의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빌닷, 당신의 말이 옳소.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있겠소?”하는 말입니다.
시편 143편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또한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의 사악한 것에 대한, 내심으로부터의 경건한 고백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범죄한 대로 벌하신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 이 자리에 나오실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이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에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더불어 쟁변하고 그의 처사를 규탄하는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천 개의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셨을 때 큰 질문을 많이 내놓으셨습니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네가 그것을 알 수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욥은 대답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것이 이제 앞으로 생각하게 될 38장과 39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앞에서 지혜로운 체 하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책망 당할 수밖에 없는 천 가지의 잘못을 내놓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규탄할 천 가지의 항목을 열거할 수가 있으십니다. 그때 우리는 그 잘못을 다른 것에 전가시킬 수가 없으며, 아무 소리하지 못하고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승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일이 우리에게 내놓으신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닌데요. 저것은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데요”하고 핑계하고 돌려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항의할 수도 없으며,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욥기 40장 4-5절에 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한 일을 제시하신다면 “내가 범죄하였나이다”고 외쳐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할 때는 살인을 하고도 하지 않았다고 잡아떼면 그만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심증을 굳히기 위해서 미개한 방법이지만 고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고문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을 보세요.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책에 기록이 됩니다. 요사이 말로 말하면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비디오 테이프에 녹화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돌리게 되면 밖으로는 사랑하는 체하였으나 미워한 것,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체했으나 더럽게 산 것, 진실한 체하였으나 거짓됐던 것, 부지런한 것같이 보이려 했으나 게을렀던 것, 남이 보이지 않는 데서 행한 모든 추한 것이 그대로 다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어두운 데서 행한 것이 밝은 데 드러나게 될 것인데”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망하고 싶지만 도망도 갈 수 없고 눈을 감고 싶지만 눈을 감을 수도 없고 “옳습니다. 내가 바로 저런 죄인입니다”하고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욥기 9장 4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위에 계란을 던져 보아야 별 수 있습니까? 가시를 발뒤꿈치로 차 봐야 피밖에 더 납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온갖 재주와 힘을 써서 그의 창조주 하나님과 겨루어 무엇을 얻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모든 반항은 활활 타는 불 앞에 질려와 가시덤불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시도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으며, 그것은 무익하고, 멸망을 초래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사야 27장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했습니다.

배신한 천사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으나 형통하지 못했습니다. 욥이 싸우나 쫓김을 당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지혜를 논박하고 그의 율법에 순종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범죄한 것을 옹호하며 환난 중에서도 마음을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영과의 싸움을 계속 고집합니다. 그래서 종내는 다 망하고 맙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극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애굽에서 나왔으면서도 감사와 순종의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죄를 범하다가 그만 멸망하고만 사실을 들어 말하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2-11).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진노의 날에 임할 진노를 그들 스스로에게 쌓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원리에 대해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힘이 강하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대항해서 끝까지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욥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할 것이라고 스스로 장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매우 비참하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는 원망하는 것을 잊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자연계를 예로 들어 말했습니다. 5절에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신다”고 했습니다. 산은 견고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산이라도 무너뜨리시며 옮기신다고 했습니다.
6절에는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다”고 했습니다. 땅보다 견고한 것은 없는데 그것도 하나님은 밀어붙이신다고 했습니다.
7절에는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했는데 떠오르는 해보다 견실한 것은 없습니다. 해는 변함없이 동편에서 떠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면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해를 정지시킬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물러가라는 명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이것은 해도 창조주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위대하십니다.
8절에는 그가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했습니다.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바다 물결이 밟고 계시기 때문에 넘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12절에는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했습니다.

우리는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으면 무엇합니까? “이젠 오너라”하고 부르시면 누구나 다 “예”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했어도, 아무리 좋은 집을 지었어도,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있었어도, 아무리 좋은 홈 세트를 장만하고 있어도, 아무리 좋은 옷을 쌓아 놓고 있어도, 그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시는 때, 그가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의 육체적인 쾌락과 의지하던 것을 빼앗으시며 건강과 재산, 친척과 친구, 그리고 생명까지도 빼앗으십니다. 어떠한 일이 있든 그것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 그것이 제거되든지 간에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를 쫓아 낼 수 있습니까? 누가 그를 말리거나 그의 뜻을 바꿀 수 있습니까? 누가 그를 거역하거나, 그의 움직임을 대적할 수 있습니까? 누가 그를 제어하거나 그의 해명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어떤 행위로 그를 대적할 수 있습니까? 누가 “무엇을 하시나이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까? 또는 “왜 그것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따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에게 일일이 왜 그렇게 하신다는 이유를 밝힐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럴 의무도 없으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그가 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지만 장래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가장 훌륭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너희가 지금은 모르나 나중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되고 감격하게 될 때가 올 것을 믿습니다.

욥은 오늘 본문 1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욥은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대적하여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했습니다. 만일 내가 그와 더불어 변론하려 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매우 엄하게 다스리실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천한 그릇을 만들거나 그가 만든 그릇이 마음에 안 들어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다고 해서 진흙이나 그 깨어진 그릇이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하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여 대답하거나 하나님께 어떤 일을 철저히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오히려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자기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이 그들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실보다 더 선하다 할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15절에 말했습니다. “가령, 내가 내 생각에 의로울지라도 그리고 내 마음이 정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의 마음보다 더 크시며 내가 알지도 못하며 알 수도 없는 나의 은밀한 잘못과 실수들을 알고 계시므로 그것으로 나를 책망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감히 대답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라며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사악함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내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하나님께서 내가 내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나도 감히 자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그 탄원을 철회하고 그를 심판하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맡기고, 그 자신의 공적에 의해 성공을 꾀하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기 전에 대답하시며 우리의 기도가 훌륭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은혜롭게 응답하십니다. 16절 말씀을 보세요.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가령 내가 하나님을 부르므로 하나님이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청한 것을 주셨다 할지라도, 나의 최선의 기도마저 매우 연약하고 결점 투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 그것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아들이 말을 하도 잘해서 아버지의 마음이 감동되어 아들에게 줍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의롭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재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17-18절을 보세요.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했습니다. 환난의 폭풍은 누구에게나 붑니다. 갑자기 불어닥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마음에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22절 이하에 보면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했습니다.
욥이 친구들과 생각이 다른 것이 이것입니다. 그의 친구들은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고, 욥은 환난이란 누구나 다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욥의 주장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일시적인 심판이 내려질 때 그것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함께 내립니다.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 예배당은 타지 않고 다른 집만 타 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이 타 버렸습니다. 믿는 사람은 죽지 않고 안 믿는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다 같이 죽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똑같이 불 가운데 들어가도 나무는 타 버리고 말지만, 금은 더욱 순수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똑같이 바람이 불지만 쭉정이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알곡은 남아 창고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자녀를 유익하게 하고 영예롭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시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뢰한 자의 고난을 비웃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인은 세상을 얻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을 얻습니다. 세상 없는 하늘과 하늘 없는 세상 중에 여러분은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마련된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줄 믿습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부끄럼 뿐이라 죄송하나
아버지의 사랑이 날 용납하시니
생명의 면류관 내 것이라.”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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