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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중심을 보옵소서 (욥 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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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말할 수 없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청의 기도 형식으로 된 말씀인데, 아마 그 영혼의 열정은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욥기 10장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청을 하는데 그 말의 한계를 넘어선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이해를 못하고 마구 억지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욥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말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처음에 뜻하지 아니하게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귀한 자녀가 하루 아침에 없어지게 되었을 때도 물론 말할 수 없이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하고 이 모든 감당키 어려운 자리에서도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온 몸에 창질이 생겨서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처지에 이르고 그 고통이 참을 수 있는 정도를 지나치게 되니 그 입에서 말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고통을 잊게 하는 진통제라도 있는데 그 당시는 진통제도 없었고 있다고 해도 그런 약을 사용할 만한 경제 사정도 못되는 처지였으니 그 고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세요.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욥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포자기한 것처럼 들립니다.
전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광야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했습니다. 이세벨에게 쫓기는 몸이 된 불의 선지 엘리야,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을 느끼고 이세벨의 칼에 죽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 하나님께 억지를 부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 편에서 볼 때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소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믿음이란 언제나 사람 편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 편에서 보면 불가능했습니다. 가나안에 거하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키가 크고 성곽은 견고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 들어갔던 사람의 대다수, 그러니까 열두 명 중에 열 명이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서 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육신적인 것만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앞날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 가로놓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가는 길입니다.
옛날 요나를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미끄러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광풍이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서 요나는 자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후 하나님이 준비하신 고기 뱃속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니느웨에 와서 “40일 후에 이 성이 망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왕으로부터 온 국민이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의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그 백성을 구해 주셨습니다.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요나에게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요나서 4장 첫 부분을 보십시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1-4).
여러분, 이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내 뜻에 맞게 일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섭니다.

여기 욥을 보세요.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에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이것까지 참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이 고통을 참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아마 욥이 이런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욥의 육신적인 고통도 심했겠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 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욥을 좀 보게. 하나님을 잘 믿더니 저 꼴 좀 보게. 하나님이 버리셨나봐. 하나님도 이젠 속수무책인가 보지. 한동안 잘 지내더니, 욥도 이젠 별 수 없구먼.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 있나? 욥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 값으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어?”
이런 말 저런 말로 욥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을 때 욥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원치 아니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 땅을 내려다보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새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의 권면을 들어보세요.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27-31). 여러분 이와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겸손히 탄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기도입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환난의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나를 하나님에게서 언제나 멀리하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나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하지 마옵소서. 비록 내가 아버지의 막대기로 징벌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심판자의 칼로 나를 끊지는 마옵소서.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십니다. 나는 참을 수 있는 한 그것을 견디어 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여, 나를 정죄하지는 마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비록 환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롬 8:1). 우리가 이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님께서 대신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에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기도는, “나의 친구들은 나를 정죄하나 주께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이제 본문 3절을 보십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욥은 그가 참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을 주실 정도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가혹하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풍성한 긍휼하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사람을 학대하시기를 좋아하십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하도 어려우니까 “주께서 나를 이렇게 대하시는 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 피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흔히 선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써 그의 섭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밝혀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왜요? 사람과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은 겉모양만 봅니다. 그래서 하와는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하고 탐스러워 보여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갈라서게 될 때 요단 동편을 바라보니 물이 많고 풀이 무성하니 그 곳을 택했습니다. 거기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거기 소돔과 고모라에 얼마나 죄가 많은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나만 보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국내만 보면 안됩니다. 외국도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나 겉만 보지 말고 속을 보아야 합니다. 가까운 데만 보지 말고 먼 데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택할 때, 결혼 상대를 택할 때 남자들은 흔히 여자의 외모를 중요시합니다. 속을 보아야 합니다. 서양 속담에 “Beauty is skin-deep”(미모는 가죽 한 꺼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 나라만을 봅니다. 그러나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40장 9절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고상한 영적 수준에 올라가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선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하기 전에는 자기 육신적인 모든 것이 굉장히 커 보였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베냐민의 지파인데. 내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는데 내가 누구만 못한가?”라고 생각했고 교만하고 강퍅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 난 후에는 전에 높고 크고 귀하게 보이던 모든 것, 자랑스럽던 모든 것이 분토와 같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의리나 신의나 양심보다는 세상의 지위나 권력, 물질 같은 것을 먼저 보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영적 수준이 어느 정도입니까?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많이 보게 되고 웬만한 것은 시들해 보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증거처럼 아는 것은 믿음뿐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모세의 믿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순종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정세를 볼 때 왜 정국이 이토록 혼란합니까? 왜 이 사회에 죄악의 물결이 더욱 더 많아집니까?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를 않아서 그럽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런 때에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활을 바로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십니다. 욥기 34장 21절에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94편 9절에 보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니이까?”라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은 흔히 자기가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거울이 발명되었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거울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입니다. 그 까닭은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하는 데 관심이 있어서 잘 보이기 위해 얼굴도 단장하고 좋은 옷도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하면 기뻐하고, 비난하면 화를 냅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디에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있습니다. 높은 데가 없고 깊은 데가 없습니다. 먼 데가 없고 가까운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어디서나 살피십니다. 사람의 눈은 졸 때도 있고, 잘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어두우나 밝으나, 흐릴 때나 맑을 때나, 언제나 살피십니다. 우리의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까지도 살피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습니다.”

주님의 눈은 내 개인의 생활, 공적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모든 인간의 활동을 살피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행동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 배후의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 그 야심, 그 사상, 그 심리 증상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139편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범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범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 안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후에 깨닫고 “주여,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을 행하였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눈 앞에서 짓습니다.

더구나 주님은 우리의 밖과 안을 함께 보시기 때문에 외식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예수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모든 죄가 다 가증하지만 외식하는 죄는 속에 있는 그 더러운 죄와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의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관상을 보고 그 운명까지 정합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것으로 성격을 비슷하게 알 수는 있지만, 사람의 미래를 알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군산에 갔었는데, 거기 한 분은 오래 전에 거리에서 관상을 보는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가게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밥을 먹고 살 수 없는 관상인데도 실제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붙들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하더랍니다. 그때 이 분이 “아하, 예수를 믿으면 관상하고 상관없이 사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관상 보던 것 다 집어치고 예수를 믿어 교회의 중직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지 않습니다. “주여, 내 마음을 보시옵소서. 내가 베드로처럼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우리 중심의 기도를 드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고 이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절망하지 맙시다.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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