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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욥 2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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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동안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의 논쟁을 생각했습니다. 욥은 정말 뜻하지 않은 때에 고난이 겹쳐 와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와서 욥이 당하는 어려움을 보고 그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의 당하는 고난은 그가 지은 죄의 대가라고 하면서 욥의 마음을 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에게 변명도 해 보았습니다. 어려움은 날로 더 심해 가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으므로 그는 하나님을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육신적인 고통도 컸지만 마음의 아픔이 더했습니다.

옛날 시인들의 고민처럼 악한 사람이 세상에서 오히려 번성하고 의를 위해서 살겠다고 애쓰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니 한정된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네가 의롭게 산다고 해도 그저 그 모양이니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면서 악인들은 오히려 조롱합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해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온 적도 있었으나 곧 회개하면서 그 고통을 하나님이 결국은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 단련시키는 과정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23장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요 순종이요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나에게 손해 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강한 신념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고난이 그에게 어렵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고난의 역사와 과정에 하나님이 관여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그에게는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한 반드시 나중에 그를 영광되고 복되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고난을 믿음으로 참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제 그의 친구들과 더 이상 논쟁을 벌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사를 들어 말합니다. 비사(Parable)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교훈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다스린다,” “주권을 가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낱말입니다.
욥은 이제 그의 세 반대자(친구)를 물리치고서 어려움 속에서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오히려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습니다. 욥은 여기서 그 자신의 결백함을 지지하기 위해 그가 말했던 것들을 엄숙히 맹세하면서 논쟁을 그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자신이 모든 책망을 받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기서 욥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지극히 높여 부르며 하나님을 유일하신 심판자로 여기고 그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신다고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엘리후는 이 말에 대해서 욥을 책망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판단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불평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행사를 미쳐 이해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부족하고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기는 하면서도 우리에게 즉시 은총을 보이지 않을 때는 쉽게 실망하고 풀이 죽고 기다리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괴롭게 하였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욥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에게 나타나서 격려라도 해 주었으면 힘이 되었을 터인데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도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지 않으니 하나님이 욥을 대적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무거운 고통을 그에게 가하시므로 그의 생명과 그의 모든 위안을 상하게 했다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성품이 조급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영혼을 괴롭게 하며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괴롭게 하셨다고 불평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주장과 하나님의 뜻이 선한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노하신 것 같이 보이고 그를 대적하시는 것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고소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어린애가 자기에게 하는 아버지의 처사가 마음이 안 들어 “아버지 미워”하며 돌아앉았다가 한 시간도 못되어 “아버지”하면서 품에 안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 3-4절에 욥이 맹세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에서도 그가 생각한 대로 말했지 거짓말을 하거나 그의 양심을 그르치는 일은 결코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이론을 주장하거나 어떤 사실을 단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실이라고 믿는 대로 말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말하는 것이 그에게 불리하다 하더라도 그는 그 진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다”고 하는 말은 그의 신념이 확고 부동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라는 다짐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5-6절에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니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겠다는 마음의 결단입니다.

이 선언은 마치 선지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신을 섬기는 사람들과의 대전에서 모든 백성들 앞에 나서며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가면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이때 온 백성이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코 하지 아니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의 결단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욥이 죽어 가고 있으며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비록 이 세상에서 가졌던 것을 모두 잃었을지라도 절대로 그의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는,” 다시 말하면 “비록 내가 이 환난으로 인해서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하나님과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은 버리지 않겠습니다”는 말입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믿겠습니다. 내 믿음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만들어 세운 우상에게 온 국민이 절하게 했는데,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느브갓네살이 화가 나서 그들을 불러다 알아보니 정말로 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느브갓네살 왕은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입니까? 포도의 소출이 많고 외양간에 소가 넉넉해서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업이 여지없이 실패하고 내 몸에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고 포도원의 소출이 없고 외양간의 소가 한 마리도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비난이 빗발치듯 몰려들고 있어도 담대하게 견디며 거기에 위축당하지도 않습니다.

욥은 그의 친구들의 책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마음에 책망 받을 일이 없이 악의 없는 양심을 지킬 것이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하는 바울의 선언과 같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지키며 살 때 우리 마음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는 것은 악한 영의 계획을 좌절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거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7절 이하에서는 악한 사람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세요.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했습니다.
악인의 마지막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종말은 절망이요 저주입니다. 그러나 요한 계시록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행한 일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곡한 자는 착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익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며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종말이 닥칠 때 그의 바라던 모든 세상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되고 허무와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비참하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한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의 밭에는 풍년이 되어 소출이 많아져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창고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새로 창고를 짓고 곡식을 가득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배불리 먹고 즐기자. 네가 먹을 수 있는 것을 가득가득 채워 놓았다”고 했습니다.
곡식이 풍작이 되고 창고를 신축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을 세상에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향하여 “만일에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 쌓아 놓은 것들이 뉘 것이 되겠느냐?” 했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두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이 벌어 놓고 아무리 저금을 많이 했고 아무리 좋은 집을 장만했으며, 아무리 철철이 입고도 남을 만큼 옷을 많이 준비해 놓았으면 무엇합니까? 오늘 밤 내 영혼을 오라고 부르시면 그 준비해 놓고 쌓아 놓은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됩니까? 그 사람의 소망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헛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가 소망을 두었던 세상의 재물도 그 뒤에 두고 떠나야만 합니다.
시편 49편 17절 말씀을 보세요.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했습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그가 바라던 저 세상의 행복도 분명 사라질 것입니다. 그는 하늘 나라에 가기를 원하나 부끄럽게도 좌절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서는 세력을 가지 있었고 어디 가나 통했고 누구나 알아주었고 힘을 썼지만 하늘에서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실 때 쫓겨나는 초라한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므로 사곡한 사람의 종말이 비참한 것입니다. 반면에 “성도의 죽은 것은 귀하게 보십니다.”

여기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왜 사곡한 자가 비참해집니까? 마지막 때 임하는 환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기도해도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청종치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으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시편 66편 18절을 보세요.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다. 에스겔 14장 4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했습니다.
그리고 귀를 돌이켜 율법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의 기도도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잠언 28장 9절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십니까? 악하게 산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십니다. 사사기 10장 14절에 보면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라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서글픈 탄식은 아무런 동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재앙을 비웃으리라” 했습니다. “그가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형통할 때는 하나님께 불러 아뢰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경 속에서는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고 그를 오히려 저주할 것입니다.
또한 필요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한구석에 밀어 놓은 자도 결국 하나님 앞에 사곡한 자입니다.
그러면 악인의 산업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3절 이하에 있습니다. “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강포자가 전능자에게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하면서 이 세상에서 그들이 얻을 분깃은 재물과 출세가 될 수도 있으나, 하나님에게서 얻을 분깃은 멸망과 비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떤 세상적인 능력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자들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그 자손이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 후예는 식물에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했습니다. 그들은 칼과 기근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녀를 위해서 많은 것을 쌓아 두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의 자손들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까지도 얻지 못할 정도로, 편하게 살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질 것을 말씀했습니다. 두 가지 면인데 너무 궁핍해서 필요한 식량이 없는 것도 되고 너무 탐욕이 심하기 때문에 만족이 없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불행한 모습입니다. 학개 1장 6절에 보면 “너희가…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15절에 “그 남은 자는 염병으로 묻히리니” 했습니다. 그래서 죽자마자 정식 절차도 밟을 새 없이 몰래 그리고 급히 서둘러 “나귀의 장례식”으로 묻힐 것이고 “그의 과부들이 울지도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죽은 사람을 위해서 슬퍼할 기회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사람들은 살았을 때 너무 악하게 그랬기 때문에, 별 호감을 얻지 못했으므로 죽었을 때에도 애도함을 얻지 못하며 그 과부들까지도 그들이 사라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가 비록 은을 티끌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같이 예비할지라도 그 예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 은은 무죄자가 나눌 것이며 그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상직군의 초막 같을 것이며 부자로 누우나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했습니다.
잠언 13장 22절에 보면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했습니다. 전도서 2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돈은 마치 비료와 같아서 골고루 분산되어 있지 않으면 유익이 없고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지기인 것을 깨닫고 무엇을 맡았든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돈으로 저택을 구할 수는 있어도 행복한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천만 원 이상 가는 비싼 침대는 살 수 있어도 잠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 자랑하지 맙시다.

악인에게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는 그의 재물을 즐길 만한 마음의 평정을 얻지 못할 것이며 안정과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안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는 누워도 그의 배부름으로 자지 못할 것이며 노동자의 잠처럼 결코 단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라고 전도서 5장 12절에 말씀했습니다. 누워서도 새벽까지 깊은 잠을 못 자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게 되니 이것이 곧 저주입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뜬즉 없어졌으리라” 했습니다. 눈 깜짝할 동안에 모든 것이 없어졌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죽음은 하늘 나라로 데려다 주는 일진 광풍과도 같으나 악인에게는 혼돈과 경악 속에서 그를 파멸로 몰아 넣는 폭풍과도 같은 것입니다.

더구나 악인이 죽을 때 사람들이 박장하며 비소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그에게 복수할 것입니다. 잠언 11장 10절에 보면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했습니다.
그가 아첨을 받고 찬미를 받던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비웃음을 당할 것이요 그의 유골이 짓밟힐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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