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이 잘 사는 길 (욥 29:1-17)

첨부 1


지난 시간 생각한 욥기 28장에서는 욥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욥기 29장에서는 욥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여기와 그리고 다음 두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그의 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기회를 주면 지난 날 그들의 빼앗겨 버린 즐거웠던 날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예전에 번영했던 사실이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즐거운 주제가 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인들을 만나면 지난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을 흥이 나서 말을 합니다.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말을 합니다. 북한에 살 때 여유 있게 지내시던 분으로 남한에 피난와서는 정착이 잘 되지 않아 퍽 어렵게 지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북한에서 지낼 때 찬란하게 산 것을 자꾸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과거의 찬란하던 생활을 자꾸 끄집어낸다는 것은 현재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진취적인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지 아니합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은 과거의 아름다웠던 생활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욥도 여기서 그와 같은 분위기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문 2절에 “내가 이전 달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에 지내던 것같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고통스러우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돈도 없고 자녀도 없고 노비도 비웃고 이웃은 멀어지고 건강은 죽기 직전에 이르렀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명예란 것이 없어졌고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병과 고통밖에 없으니, 옛날에 형통하던 일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그때는 좋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구나.” 불행스러운 호소입니다. “내가 그때처럼 훌륭한 지위에 있었으면! 내가 그때처럼 많은 재물과 영예와 낙을 누렸으면!”

이것은 욥이 그의 평안함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하나님에 대한 명성과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욥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다시 형통함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들의 이론을 들어 나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내 친구들을 충분히 침묵시킬 수 있게 되고 나는 영원히 비난을 면케 되련만!”
만일 우리가 생명과 건강과 형통함을 원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거룩한 고백에 대한 신뢰를 구축시켜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데 있다면 그 소망은 당연할 뿐 아니라 영적인 것 일 것입니다. “내가 그때와 같은 영적 상태에 있었으면.”

욥이 지금 왜 어려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숨어 버리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무거워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떠나셨다고 생각될 때처럼 비참하고 기가 막힐 때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때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그의 마음이 큰 위로를 받아 넓어지기를, 그가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큰 자유를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젊은 날 건강하게 지낼 때는 늙고 병들고 약해지는 날을 모르고 살기가 쉽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번영할 때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모르기 쉽습니다.
욥은 하나님 안에서 안위를 받으며 살았었습니다. 이것이 욥을 즐겁게 한 주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움의 원인으로 삼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가 형통한 것은 거기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욥은 그가 형통하는 것을 그의 행운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시편 30편 7절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자기가 건강하고 형통하고 평안하고 재산이 늘어나고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의 보호를 즐거워했습니다.
본문 2절에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날”이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던 날에는 아무런 위험한 처지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지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다윗의 간증처럼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절대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이사야 43장의 말씀을 보세요.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사람도 물 가운데로 지나고 강을 건너고 불 가운데로 지나며 사자굴 속에 던짐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 그의 소유된 백성을 지켜 주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산성으로 방패로 삼았습니다.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인간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을 그의 성읍으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부요를 믿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의 강한 성채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만 참된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평안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주지는 못합니다.

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 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2.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3.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4.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후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2.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절을 보세요. “그때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취었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의 빛을 그에게 비취셨고 그의 사랑의 향기로운 맛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은, 장차 예비되어 있는 축복과 비교하면 등불에 불과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밝게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에 등불이 소용 없을 정도로 밝을 것입니다.

욥은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풍부한 만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광명을 힘입어 어두운 세상에서도 살아 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이 그에게 비쳐 주셨기 때문에 의심 속에서 확신을 얻었고, 슬픔 속에서 위로를 받고, 실패했으나 다시 일어나고, 괴로움 속에서 참게 해 주셨고, 절망 속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불빛을 받는 사람은 눈물 골짜기로 샘의 곳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어두운 세상 길을 걸어가실 때 하나님의 불빛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잘못될 염려가 없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조명될 때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본문 4절에 “그때는 하나님의 우정이 내 장막 위에 있었으며”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서로 흉금을 터놓고 말하는 친구처럼 욥과 더불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는 지금처럼 그렇게 어둡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그 언약 속에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 사랑받은 사람만이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있고 거기서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성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말씀 속에 감추어진 깊고 오묘한 뜻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정이 오고가는 것 아닙니까? 서로 말하지 않고 지내는 친구, 말하지 않고 사는 부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가운데, 말하자면 대화를 하는 가운데 서로의 의견이 교환이 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오해가 풀리게 되고 사랑을 나누고 정이 교환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우정(友情)이 내 장막 위에 있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장막 위에, 그러니까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늘 있어서 하나님과의 우정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숨기고 모르게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가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시고 사자들을 보내서 멸하시게 하실 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하며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시편 25편 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며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아뢰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 속에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우정을 나누심으로 아무리 험하고 힘든 세상이라도 주님과 대화를 나누며 힘있게 살아 나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크고 비밀한 것을 네게 보이시리라”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고 살았습니다.
본문 5절에 “그때는 전능자가 오히려 나와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축복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때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계실 때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계실 때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돈 가지고 못 사고, 권력으로 못 누리며,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모시고 같이 살게 되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려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명령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은 떠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은 무난히 점령했는데 아이 성에서는 크게 패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에서 떠났습니다. 그러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삼손같은 장사가 왜 블레셋 사람에게 잡혔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나니까 하나님이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간 삼손은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말씀 따라 삽시다.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서 마음속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감사와 찬송이 가득한 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능력의 사람이 되어서 마귀들과의 싸움에서 넉넉히 이기는 삶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욥에게는 모든 것이 풍성했었습니다. 그의 자녀 10남매가 그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자녀는 우리에게 울타리입니다. 욥은 그 자녀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축복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욥은 많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풍족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버터가 내 발자취를 씻길” 정도로 그의 농장은 풍족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감람나무 밭은 예상외로 수확이 풍성했기 때문에 마치 “반석이 그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흘려 내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세요. 욥은 그의 재산을 감춰 둔 금과 은으로써 계산한 것이 아니라,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버터와 기름으로 계산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줄 수 없는 재산이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그의 재산을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재물을 모으는 것까지는 할 수 있는데 그 재물을 바로 유익하게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욥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연락하기에 충분했었지만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만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짐승은 본능적으로 그 새끼를 키워서 독립시킵니다. 그러나, 짐승이 이웃을 위해서 무슨 공헌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자식을 키웁니다. 어떤 분은 유산을 남기기 위해서 무척 애를 쓰는데 사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키워서 독립시키면 그것으로 할 의무는 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사회와 국가를 위해 어떤 보탬이 될까? 무슨 공헌을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때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베풀기도 하였었느니라” 했습니다. 욥은 동방 사람들 가운데 방백이었고 사사였으며 장관이었고 권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인격적인 미덕과 탁월한 분별력, 그리고 성실하고 훌륭한 처사에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를 존경했고 어려워했습니다. “나를 보면 소녀들이 숨었다”는 것은 어려워 한 것이고, “노인들은 일어나 섰다”는 것은 존경을 의미합니다. “방백들이 말을 참고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귀인들은 소리를 금했다”고 했는데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 웬만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덕과 경건은 모든 사람의 존경을 요구하며 그것을 얻게 됩니다. 그 사람 자신이 선할 뿐 아니라 선을 행하게 되면 존경을 갑절이나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윗사람에게는 위엄이 필요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순종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어른에게 대한 존경과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욥이 나이가 많아서 존경을 받았고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본문 12절 이하를 보세요. 그가 한 일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이 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었느니라”(12-17절).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까? 흔히 우리 사회에서는 부하게 사는 사람을 잘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하게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릅니다. 부해도 잘 살지 못할 수 있고 가난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 약한 사람을 도와주며 사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잘 살아서 나중에 주님께로부터 칭찬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사십시다.
박조준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