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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끗하게 삽시다 (욥 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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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 31장에서는 욥이 자신의 결백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의 생활의 결백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속에 선한 생활의 원칙이 근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악을 피하는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이 그의 의와 사랑에 근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예로써 1-4절과 9-12절에 음행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많은 사람이 가장 걸리기 쉬운 치명적인 돌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1장 1절을 보세요.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어학자 트렌취는 이것을 “음욕을 일으키기 위하여 여자를 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행위 이전에 마음이 중요합니다. 첫째가 마음이고, 그 다음이 육체입니다. 이 순서는 정당한 부부 관계에서나 범죄의 경우에나 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본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창조하시고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여서 사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배후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같이 하시는 것을 우리는 믿기 때문에 가정을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서로가 의지하고 상대방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하며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사는 생활이 바로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로 비교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신부라고 불렀습니다. 가정은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답고 깨끗한 가정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기본 단위입니다. 가정은 사회질서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문란하거나 파괴되면 사회는 결국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저 왕성하던 로마가 성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문화를 주름 잡던 헬라의 영화도 간음 때문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찬란하던 폼페이 도성이 간음 때문에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두 가지 강력한 욕구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식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다른 하나는 성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산하며 자기의 대를 잇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범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본능적인 욕구에 대해서 정당한 즐거움을 느꼈으며 상당한 제재를 가해서 그들의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욕구를 부패시켜서 이것은 결국 위험스러운 욕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허영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은 인간의 몸 안에 있는 불발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적인 문제에 대한 몇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가령 어떤 이는 “성을 억제하라”고 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대답입니다. 폭탄을 폭발시키지 않는 확실한 방법은 이 폭탄을 땅속 깊은 곳에 파묻는 것입니다. 강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면 둑을 만들어 물이 흐르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것이 확실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어떤 경우에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둑에 쌓인 강물은 그 둑이 터질 때까지 굉장한 압력을 가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둑을 터뜨리고 맙니다.
억제와 제재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재란 수문이 있어서 물이 운하로 흘러 내려가도록 건설적으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억제하는 것은 물이 흐르는 데다 둑을 가로막아서 물이 아예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억제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거의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에 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을 개방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극단적인 해결책입니다. 오늘날 이 방법을 좋게 생각해서 그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합니다. “본능에 맡겨라. 물이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라. 그러면 제 길을 찾을 것이다. 자신을 억제해서 개성을 감추지 말라. 자유를 즐기라. 아무도 너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게 하라. 누구와도 형편이 닿는 대로 데이트하라. 그리고 새로운 도덕관을 가지고 살아라. 옛날 빅토리아 여왕 때의 청교도적인 도덕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성을 만끽하라.”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에 찬동하는지 모릅니다. 거기에 정말 사람이 살아가는 맛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얼마 못살다 가고 말면 그만인 세상 마음대로 즐기자는 철학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탕한 자리에 빠지는지 아십니까? 극단적인 예로 미국에는 웬만큼 큰 도시에는 소위 스와핑 클럽(Swapping Club)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회원들은 모임이 있을 때 부부가 동반해서 갑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이 모임은, 거기에 가서는 남의 아내와 남의 남편과 정식으로 합의를 해서 일 개월 내외로 같이 살다가 기한이 되면 본 남편과 아내를 찾아가는 비윤리적인 모임입니다. 그 결과 이혼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분별없는 자유와 무책임한 진보들은 인간의 자유라는 깃발 아래서 우리의 고귀한 자유를 방종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유가 방종이 되고 음탕하게 되어 버릴 때 인류 사회는 자멸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격이 완전한 자유를 허용하기에는 너무나 죄지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법을 정하신 것입니다. 이미 고대 로마의 시세로도 “법이 없는 자유는 무질서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로마와 헬라 그리고 고린도의 멸망을 살펴보세요.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그런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위하여 경계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3천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전 10:8).

여러분, 성을 완전히 개방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사회에 대한 원시적인 대답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인간의 도덕이란 자연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위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 행위가 옳은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생활은 천성적인 본능에 기초를 둡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도덕관이 자연법에 기초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기초를 둡니다. 한 남자가 하나 이상의 여자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도덕이란 개인의 욕구나 쾌락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당하거나 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도덕적인 사람이란 자기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치를 즐기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흔하다는 것이 그의 사치가 옳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덕이란 지역 사회의 표준에 기초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우리 나라의 경우 열 가정 중에 여덟 가정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이 그들의 행위는 될지 몰라도 도의심의 기초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서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확실한 근거 위에 있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이란 합리화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에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도덕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그 행위가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도덕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양심입니다. 어떤 행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취일 때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한 우리의 도덕관은 기초부터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깨끗하게 바로 살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길입니다. 성 문제에 대해, 성을 억압하거나 개방하지 말고 승화시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폭탄을 땅에 묻지도 말고, 터뜨리지도 말고 조심스레 해체해서 폭발의 가능성이 있는 힘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수문이 없는 뚝만 쌓아도 위험합니다. 메마른 사막에 물을 댈 수 있으며 쓸모 없는 모래땅을 비옥한 농토로 변경시킬 수 있는 관개 시설이 될 수 있도록 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십계명을 존중한 나라들은 서양 문명이라고 하는 큰 문명을 창조했습니다. 일부일처의 결혼 제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품는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을 쓰고 살며 본능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어떤 자극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석이 아니라면 다 같을 것입니다. 더구나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이런 감정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품지 않아야 합니다.

욥은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했습니다. 한 번 보는 것은 잘못 없습니다. 그러나 주목하는 것은 눈이 언제나 거기에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잠언 6장 마지막 부분과 7장을 한 번 기회 있는 대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는데 조심하지 아니하면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흔히 “성적 방황의 시대,” “성 개방의 시대”라고 합니다. “성의 제 3혁명의 시대”고도 합니다. 한때는 소위 “상황 윤리”라는 이론이 나와서, 상황에 따라 우리의 윤리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서 상황에 따라서 음행까지도 용납하고 합리화하려고 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이비 이단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교묘하게 원리에 이용해서 많은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그가 분주할 때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가한 때 그만 더러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남자나 여자가 이와 같은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한가한 것은 금물입니다. 바쁘게 사셔야 합니다. 바쁘시다 보면 시험에 들 시간도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문명의 발전으로 점점 더 한가하게 살 수 있게끔 되어 갑니다. 더구나 부인들의 경우 그렇습니다. 옛날하고 얼마나 많이 생활 양식이 달라졌습니까? 얼마나 편하게 되어 갑니까? 이 한가해지는 시간을 주의 사업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시는 일에 힘쓰셔야 합니다. 봉사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느 날이나 아침이든 저녁이든 교회에 나오셔서 성경을 배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누구나 나오시면 됩니다. 그래서 한가해지고 마음이 허전해지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한 것으로 가득 채우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말씀 배우고 기도해서 아예 더러운 것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 듣는 것, 읽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 5장에 보면 “내 아들들아 네 길을 음녀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했습니다. 남녀 관계는 조심해야 합니다. 건전한 장소에서 경건한 교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심나는 곳에서 교제하지 맙시다. 남의 의혹을 사도록 교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건덕(健德)스럽지 못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소문이란 다 바른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내려오는 말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심스럽게 남에게 의혹을 살 만한 교제는 절대로 삼가야 합니다. 깨끗한 교제를 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거 좀 속된 표현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남녀는 전기로 말하면 양극과 음극, +,-와 같아서 서로 가까이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리게 되고 뜻하지 않았던 일이 생기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나는 동안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남편 있는 내가, 아내 있는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빠져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조심해야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범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남녀 교제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역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성자된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조심하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기회를 갖지 않도록 서로가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잠언 5장 18절에 보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했습니다. 남편 된 사람은 “세상에서 내 아내가 제일이지”하고 생각하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내 남편이 최고지” 해야 하며 다른 남자보고 침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아무리 이 시대가 변하고 사회 환경이 바뀐다고 해도 가정 생활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결혼 전에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남녀는 깨끗한 결혼을 할 수 없고, 깨끗한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흔히 프리섹스니 시험 결혼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둘째, 결혼 후에 남녀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깨끗한 가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흔히 어떤 사람은 가정을 떠난 생활을, 식당에 나가서 외식을 하는 것처럼, 합리화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가정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셋째, 깨끗한 가정에서라야 자녀 교육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신성함이 깨어질 때 가정의 자녀 교육은 실패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신앙으로 사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힘쓰지 아니하면 자동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힘써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전에 요셉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 그 집주인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타국에서 외롭게 지낼 때였습니다. 다른 상대가 아니고 주인의 아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강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요셉으로 하여금 정절을 지키게 했습니까? 신앙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 악한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한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할 수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이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전입니다. 아무쪼록 깨끗이 간수해서 가정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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