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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욥 3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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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욥의 친구 엘리후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한정된 이성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온전히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부분에 한해서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리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생각할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시며 그 지능이 무궁하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를 통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무엇이나 그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하나님은 무법자와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절대로 불의를 행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혼란하게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이 우주가 혼란한 것을 보셨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유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사람의 경우 흔히 무엇을 좀 가지고 있으면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없는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깔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집안이 좋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알아주지 아니합니다. 힘이 센 사람은 약한 사람을 억압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일을 보시면서 웃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있다면 얼마나 있고, 강하다면 얼마나 강하고, 안다면 얼마나 알고, 좋다면 얼마나 좋고, 가졌다면 얼마나 가졌기에 저렇게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고, 얕보고, 무시하고, 학대하는가? 아니 그보다도 그들이 가진 것, 있는 것, 아는 것이 누가 준 것인데 어떻게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을까?”하고 한심스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욥이 고통이 심할 때 하나님께 대하여 오해한 듯한 표현을 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가령 욥기 10장 3절 이하에 보면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했습니다.
19장 7절 이하에 보면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했습니다.
23장 13절 이하에 보면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 하셨음이니라”고도 했습니다.
욥이 너무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다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학대하고 멸시하고 포학을 당하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가로막는 것처럼 여겨졌고 첩경에 흑암을 두고 영광을 벗기고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고 사면으로 헐어 죽게 만들고 소망을 뿌리째 뽑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여기 욥에게 한 말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변명합니다. 하나님은 욥이 생각하고 말한 바와는 반대로 아무도 멸시하는 법이 없으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세상적으로 가장 비천한 사람들까지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높은 데 계신 분이면서도 낮은 데 있는 사람을 존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들의 주장이나 권리를 결코 경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권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이시고 보살핌의 손을 펴시기에 가치가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잊지 않고 계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야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시겠느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크고 높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낮고 작은 데까지 하나님의 관심은 한결 같으십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의 생명과 다른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의 운영을 가만히 살펴볼 때 이 우주는 정말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는 말씀에 대한 증거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대한 증거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겸양과 보살핌에 대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느 생물학자가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연구하다가 그 조수에게 장갑을 가져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장갑을 가져오라 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여보게, 나는 이 엄청난 사실이 너무 놀라와서 장갑을 끼지 않고는 볼 수가 없어. 너무 이 사실이 경건해. 이처럼 현미경으로 겨우 볼 수 있는 데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저 놀라울 뿐이야”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먼고우 파크라는 사람은 쓸쓸하고 적막한 아프리카 사막에 있는 작은 이끼를 보고서 “나는 이 세상의 이 황량한 곳에 아무런 중요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 식물을 심으시고 그것에 물을 주시고 그것을 완전히 성장케 하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의 상황과 고난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으리라고 절대로 생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그 어느 것도 그 누구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이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그 사건 자체가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 8편 4절에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본문 5절에 “그 지능이 무궁하사” 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힘과 지혜가 무궁하시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앞의 구절과의 병행구로서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온유하심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실 뿐더러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에게 폭군이나 위협자가 아니시라 아버지요 친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경과 경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이 운영되어 나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지혜 앞에 그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크시다는 사실 앞에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증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에 대한 증인이기도 합니다.

1.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2. 숲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후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 하나님은 세상을 권능과 지혜로 지으셨는데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6절을 보세요.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시며”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언제나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에 결국은 파멸시켜 버리고 맙니다. 노아의 홍수 때를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보세요. 애굽왕 바로를 보세요. 그런 예를 들자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입니다.

로마서 9장 17-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처럼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한 사람을 악한 대로 내버려두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이 회개할 여유를 주기 위해서 그러실 때도 있습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로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셔서 어떻게 하든지 멸망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6절 하반절에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가련한 자들에게 권리를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련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처한 환경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애굽에서 바로의 압제 밑에서 고생하며 눈물 흘리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어 “내가 너희 눈물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시편 140편 12절에도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이다” 했습니다.

엘리후의 “고난받는 자를 위하여 신원하시며”란 말은 욥에게 뿐만 아니라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십시다.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계속적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의인이 하나님에게서 잊혀지고 버림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의인들 위에 그 시선이 머물러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34편 15절에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도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인을 높이 들어올리십니다.

본문에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 존귀하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땅위에서도 의인들이 종종 큰 시련의 자리에서 큰 위엄과 존귀의 자리로 높이 들리움 받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전도서 4장 14절에 보면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만인 중에서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되게 했으니 높임을 받는다면 이보다 더 높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은 의인이 잘못될 때 바르게 고쳐 주십니다. 8-10절에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 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했습니다(11-12절).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먼저, 의로운 사람도 잘못 될 수가 있으므로 그것을 알면 고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육신을 쓰고 사는 사람 치고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에 병들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아를 보세요. 아브라함을 보세요. 다윗을 보세요. 솔로몬을 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누구나 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죄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 죄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도록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은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죄를 범한 대가로 형벌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디엔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욥을, 의로운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해석하기에 따라서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의 다른 친구와는 정반대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도록 우리의 죄를 기억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행과 허물을 보이사” 했습니다. 왜요? 우리는 다 부족해서 실수로 잘못을 범하고도 잘못인 줄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죄를 범하고도 죄인 줄 생각 못했습니다. 보통, 한 나라의 왕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예사로 생각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통해서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 가를 보여 주고 알게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 다윗은 자기의 한 일이 얼마나 죄악된 일인가를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악인은 죄악을 깨닫게 해주면 오히려 알게 해 준 사람을 해칩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종내는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끝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그들의 죄를 회개할 경우 그 징계는 곧 즐거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징계, 고난과 시련 뒤에는 풍성한 축복이 따릅니다.
시편 94편 12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호세아 2장 14-15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버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고생하던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을 허락하시고 그곳으로 가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내 인도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광야 40년의 길을 지냈고 크고 견고한 성 여리고를 기적적으로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 중에 아간이란 한 사람이 욕심을 부려 실수를 하여 하나님이 잠시 떠나게 되었고 아이 성에서의 전투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실패를 하고 망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장군의 간절한 기도와 아간을 처치함으로 다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고 허락하신 약 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아간을 죽인 곳입니다. 회개의 골짜기입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아골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은 소망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온유하셔서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보살피십니다. 우리가 잘못될 때 고쳐 주시려 애쓰시고 죄를 회개하면 한없는 축복으로 안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1.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2.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3. 한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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