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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름이 걷힐 때가 옵니다 (욥 37: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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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2장부터 37장까지 무려 여섯 장에 걸쳐서 엘리후가 한 말을 기록했습니다. 욥의 다른 세 친구는 욥이 환난을 겪는 것은 그가 범한 죄 때문이라고 지적해서 오히려 욥에게 괴로움을 더해 주었고 위로가 아니라 마음을 격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견해는 다른 친구들과 같지 아니하고 욥이 당하는 시련은 하나님이 욥을 사랑하셔서 그의 믿음을 더욱 든든히 하며 더 많은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한 시련의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비교적 길게 한 말은 오늘 생각하게 되는 37장에서 결론을 맺게 됩니다.

엘리후는 천체와 기상의 모든 변화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계속하여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런 변화를 보고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며 그것을 최선으로 활용한다고 할 것이면 우리의 형편과 처지의 다른 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까지는 천둥과 번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천둥과 번개는 보통 함께 일어나는데 하나는 귀에 들리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입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 권능과 두려움에 대한 표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번개 빛을 보고 천둥소리를 들을 때, 과학자들이 그 까닭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자연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하지만 번개와 천둥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잠자고 있는 인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각성시켜서 그들 인간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과 귀는 두 개의 배우는 감각 기관입니다. 눈으로 보아서 배우고 귀로 들어서 배웁니다. 우리가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며 산과 들, 나무와 숲, 꽃과 열매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와 조화 그리고 아름다운 솜씨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보다 보면 사람의 감각이 그 방면에 둔해져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심에 감동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느낌 없이 지내는 때가 많기 때문에, 번개와 뇌성 같은 강한 자극을 통해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며 천둥소리로 사람들의 귀에 자극을 주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게 합니다.

시내산 위에서도 그랬듯이 이들 천둥과 번개는 주의와 경외심을 끌기에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엘리후가 천둥과 번개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그것들을 가지고 욥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애쓴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나로서는 내 마음이 그로 인하여 떨립니다. 내가 비록 자주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흔히 보아왔음에도 아직 여전히 그것들은 내게 두려우며 나의 온 마디가 떨리도록 만들어서 내 마음은 마치 자기 처소에서 떠날 듯이 고동을 칩니다.”

옛날부터 번개와 천둥은 악인들에게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전에 칼리굴라 황제는 죄를 많이 범한 사람이었는데, 번개와 천둥이 나면 무서워서 오금을 못 쓰고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든지 침상 아래 달려가 숨었다고 합니다. 우리말에서, 나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하고 나쁜 일을 “벼락 맞을 일”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에 의해 망했다고 했는데 다른 말로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는 벼락에 맞아 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죄 많은 세상에 대해서 무엇을 하실 수가 있으며 마지막 날에 예비해 두신 불에 의해서 어떻게 행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는 본보기입니다.
사실 우리도 번개와 천둥을 보고 들을 때마다 엘리후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뇌성 벽력에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19편 120절에 보면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엘리후도 욥에게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 했습니다. 시편 29편 3절에 보아도 “여호와의 소리가 물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위에 계시도다” 했는데, 뇌성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뇌성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벽력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뇌성이 울리면 온 하늘 아래 퍼져 원근에 들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경보는 온 땅에 울려 퍼집니다. 그 순서는 번개가 먼저 그 길을 가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합니다.
3-4절을 보세요. “그 소리를 천하에 퍼치시며 번개 빛으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위엄의 울리는 음성을 내시고는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물에 있는 구름 속에서 만들어진 번개와 뇌성은 실제로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빛은 소리보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우리는 천둥소리를 듣기 한참 전에 번개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천둥을 “하나님의 위엄의 소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권능과 위대하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68편 33절에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습니다. 하나님은 번개 빛을 금치 아니하십니다. 그것을 막거나 억제할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보통 천둥 후에는 소나기가 따라 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게 위대하시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십니다. 하나님이 펴시는 섭리는 우리의 반대나 대항이 도무지 문제가 안 될 만큼 너무 강하고 너무 크십니다. 우리가 나무라거나 언쟁할 수 없이 크고 깊은 데가 있습니다.

금년 여름에는 특별히 여러 번 태풍이 지나가면서 많은 수해를 입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해도 그 무서운 태풍을 막을 길이 있으며 그 방향을 돌릴 힘이 있습니까? 쏟아지고 퍼붓는 그 많은 비를 멎게 할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력 앞에 우리는 너무 무력함을 절감합니다.
아마 금년 여름처럼 일기예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덥든 춥든 기상의 변화와 극단적인 일기는 우리의 많은 일상 화제나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일기를 통하여 그의 권능을 보여 주시고 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번개나 천둥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바뀌는 일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그 같이 내리게 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눈과 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번개와 천둥은 보통 여름에 생기지만, 겨울철에는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십니다. 눈이 어디에 내리게 하시며, 얼마를 내리게 하시고, 얼마 동안 쌓여 있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지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시행됩니다. “빛이 있으라”고 해서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고 하십니다. 말과 행동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항이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는 말씀과 시행이 하나입니다. 그가 말씀하시면 그가 원하시는 대로 “작은 비”가 내리고, “큰 비”가 쏟아집니다.
봄에 땅을 적시는 가는 비도 내리게 하시지만 온 땅을 휩쓸고 가는 큰 비도 내리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한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과 비를 내리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오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앞을 가릴 수 없이 쏟아지는 비나 추운 날씨의 폭설은 우리의 활동을 제한합니다. 7절에 “그가 각 사람의 손을 봉하시나니” 했습니다. 사람의 손을 묶어 놓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됩니다. 그런 때 그것을 곰곰이 생각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하던 일에서 손을 떼게 될 때는 한가하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 말고 경건과 헌신하는 일에 우리의 남은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손이 봉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열려야 하며, 어느 때든지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적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그 말씀 읽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남방 밀실에서는 광풍이 이르고 북방에서는 찬 기운이 이르며” 했습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땅에서는 더위와 추위가 계속됩니다.
태양에 그 지역의 상황이 달려 있습니다. 남극이나 북극은 추위가 가장 심하고 반대로 적도 근처에는 더위가 심합니다.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반면에 극지대의 찬 공기는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중간 지대는 이처럼 밀려온 찬 공기에 의해서 바람이 불고 추워집니다.
서리와 얼음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10절에 “하나님의 부시는 기운에 얼음이 얼고 물의 넓이가 줄어지느니라” 했습니다.

더위와 추위, 여름과 겨울의 변화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인데 이 지구가 태양을 돌 때 지구의 축이 수직으로부터 23도 기울어져서 돌기 때문에 사계절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교훈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자연의 학교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교훈들을 많이 배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온 우주를 바라볼 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기억하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주를 바라볼 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은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11-12절에 보면 “그가 습기로 빽빽한 구름 위에 실으시고 번개 빛의 구름을 널리 펴신즉 구름이 인도하시는 대로 두루 행하나니 이는 무릇 그의 명하시는 것을 세계상에 이루려 함이라” 했습니다.
21절 이하를 보십시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 했습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는 종종 하늘에 구름이 있어서 밝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짙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얼굴빛을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근심과 걱정, 눈물과 한숨, 좌절과 실망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없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답답합니까?

욥기 10장 3절 이하에도 욥이 안타깝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19장 7절에 보면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했습니다.

짙은 구름이 하나님을 가리울 때,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 알고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성도들이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숨어 버린 것 같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지금 욥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속에 있어도 누구 하나 위로해 주는 이 없고 아내도 친구도 모두 마음에 부담만 더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으로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갈 때도 그랬습니다. 요셉과 그 형제들을 잃은 것 같았을 때, 야곱의 마음이 그랬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을 때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을 치고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시글락에 있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굴 속에 갇혀 있을 때, 그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도 날은 어둡고 흐렸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지금 우리가 당하는 것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둡습니다. 캄캄합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그 구름 뒤에는 밝은 빛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 구름 뒤에 숨어 있는 밝은 빛을 보지 못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지금은 태양을 볼 수 없을지라도 태양은 여전히 구름 저 너머에 있습니다.
구름이 하나님을 가려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그 길을 가리울지라도 세 가지 강한 빛이 우리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의 빛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했습니다. 이사야 54장 10절에 “산들은 떠나가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사랑)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을 옮기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맺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입니다. 사무엘하 23장 5절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위에 있는 이 구름이 사라질 때가 반드시 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구름을 몰아 냅니다.” 다윗은 암흑의 시기에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편 42편 5절에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했고 8절에는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하심을 베푸실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 선지는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했습니다(미 7:8).

모리아 산에 있던 아브라함에게서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새로운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요셉에게서도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애굽의 보좌에 앉아 있는 바로의 다음 자리에 앉아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으며 그 중에는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모세에게서도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났던 산에서 그들과 함께 예배 드렸습니다. 다윗에게서도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울의 보좌에 앉아서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 수가 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욥에게서도 이 검은 구름이 걷히고 그의 소유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의 사랑과 그의 이웃들의 존경에 있어서도 전보다 훨씬 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지금 우리를 덮고 있는 이 검은 구름, 하나님을 볼 수 없이 답답하게 하는 이 먹구름이 걷힐 때가 올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고, 하나님의 뜻에 인내로써 복종하며, 아무리 어두운 때에도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끝으로 22-24절 말씀은 엘리후의 결론입니다. “북방에서는 금 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측량할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마음에 지혜롭다 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엘리후는 전도서 기자가 그의 강론을 끝마치는 것처럼 그의 말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면 결국 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주인에 대해 두려워 떨고 있는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훌륭한 부모에 대한 사랑스런 자식의 경외심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린애가 바닷가 모래에다 구멍을 파고 조개 껍질로 모든 바닷물을 그 구멍 속에 담으려고 하는 노력과 같다”고 했습니다.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우리의 삶에 폭풍이 사납게 불고, 구름이 낮게 깔리고, 천둥이 무섭게 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폭풍이 지난 후에는 고요하고 청명한 하늘이 옵니다. 바람은 구름을 몰아 낼 것입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가져다주는 북풍처럼 성도에게는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그 북풍은 지나갑니다. 통곡이 하룻밤 동안 지속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가고 아침의 기쁨이 옵니다.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먹구름이 걷힐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맙시다.
박조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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