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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무 (전 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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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전 1:1-11)

한국이 작다고 하지만, 못 가본 곳이 더 많습니다. 또 큰 줄 알고 가봤더니 끝이랍니다. 이것이 양면성입니다. 인생이 굉장한 것 같다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양면성입니다. 결국 인생은 보기 나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를 보며 삽시다.

한 사람이 인생의 허무를 느꼈어요. 왜 사나 싶어서 자살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한강 다리 난간에 올라섰습니다. 막 뛰어내리려고 하는 순간 행인이 말립니다. 그래서 그 행인과 얘기가 되었어요. 자기가 왜 죽어야 되는지를 설명했어요. 행인은 그 사람이 왜 살아야 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둘이 같이 뛰어내려 죽었답니다. 설득할 자신 없으면 그냥 가야합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1.살아야 하는 이유를 좀더 설득력 있게 말해줄 사람을 못 만났다는 아쉬움입니다.

2.인생을 살다가 보면 죽어야 되는 인생의 허무함이 만만하지 않다는 겁니다.

전 정말 이해 못하는 것이 참 많아요, 우울한 사람, 못자는 사람, 돈 못버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환경이 잘못되서 그렇구나.” 환경을 의도적으로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날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그렇게 살으니 어떻게 시집을 가겠습니까? 우울한 환경을 만들면 우울해져요.즐거운 환경을 만들면 즐거워 집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에는 세가지 근본 문제가 있는데 “인생의 허무를 인생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 죄 문제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 내세를 인생의 노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60세 된 할아버지가 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언덕을 넘어갑니다. 중간 쯤오니까 힘이 부치는 거예요. 한 소년이 도와줍니다. 그리고 언덕에 올라 같이 앉았습니다. 소년이 “할아버지, 이렇게 더운데 왜 일을 하세요?”라고 묻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년은 계속 묻습니다.“할아버지 뭐하려고 먹고 사세요?” 할아버지가 대답을 하려고 하니 마땅한 대답이 없어” 수레 끌려고 먹고산다 “ 그랬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팔월의 삼복더위에 수레나 끌기 위해서 사는가? 오늘 여러분은 왜 사십니까? 내가 직장 다니기 위해서 사는게 아닌데, 직장 다니는 것 처럼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린 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쇼펜하우어도 그렇고, 지금 지혜의 왕 솔로몬도 똑같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지혜가 굉장했고, 최고로 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저는 중학교때 수학여행 안가고 그 돈으로 돼지를 사서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돼지가 죽었습니다. 예방주사를 안맞혀서 죽었습니다. 그때 제 꿈이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서 허무함이 찾아 왔어요.“인생이 뭐냐?”

유명하고 잘 나가던 기업가가 원치 않는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감옥속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잠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말합니다.“목사님 제가 잠언을 일찍 읽었더라면 내 인생을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딱 들으면서 “그래 어렸을 때 성경을 읽혀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주 훌륭한 스님들이 염불하다 마지막으로 쓰는 한자가 “無”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허무를 일찍 깨닫게 해주어 허무하지 않는 삶을 찾게 해줍니다.

첫째, 허무는 대개 나이와 삶이 안정될때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지나가는 과정입니다.나이가 어리고, 먹고 살기 바쁘면 허무가 없습니다. 어린나이에는 허무가 아닌, 충격 때문에 자살합니다. 또, 아프리카 빈민은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게 낫겠다” 싶어도 자살 안합니다.

어떤 분이 “많은 청중들이 목사님 말씀에 열광하는데, 끝나고 나면 허전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그래서 제가 대답합니다.“저는 뿌듯합니다. 내 안에는 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함과 공허함이 물밀 듯 밀려 올때 사람들은 엉뚱한짓을 하고,탈선을 하고,몸부림을 치고 발악을 합니다.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나사로는 비록 얻어 먹으면서도 평온함이 흐르고, 부자는 점점 밀려오는 지옥의 공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매일같이 잔치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예전에 그랬어요. “야 경동아 너는 뭔 재미로 사냐?” “ 아버지는 뭔 재미로 사십니까?” “나는 술 재미로 산다” “저는 성령 충만한 재미로 삽니다”

두 번째, 허무는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입니다. 시편 144편 4절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 야고보서 4장 14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인생을 길이로만 생각하지말고 무게도 생각을 하십시요 쓸데없는 일에 시간 다 보내고 바쁘게 살지말고 뭔가 의미있고 보람된 일, 주를 위한 일, 이웃을 위한 일을 하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세 번째, 허무는 인생이 비워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피조물로도 채울수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위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천하보다 큽니다. 우리를 만족시키려면 천하보다 큰이,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절대, 수양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결론입니다.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세상 것 같고는 안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전도서 12장 13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 인생의 허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해라. 요즘말로 말하면 “예수 잘 믿어라” 2)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살아라. 삶 속에 밀려오는 허무가 혹시 없습니까? 그 허무 때문에 바로 주님이 들어오셔야 할 자리가 마련 된 것입니다. /장경동 목사 (대전중문교회)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지혜(전 3:1∼11)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심사가 현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자녀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현재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는 또한 미래를 낳는 모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현재를 만드시고 또한 현재 일하셔서 우리의 미래를 만드십니다.

창세기 37장 이하에 보면 요셉은 부유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으며 귀히 자랐습니다. 그러나 이복 형제들의 시기로 하루아침에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종살이하는 동안 그는 과거의 일에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맡겨진 일에 충실히 살았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자기를 종으로 팔아먹은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정치계는 '과거사'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과거의 아버지 때 저지른 일들까지도 용서하려하지 않고 단죄하려고 합니다.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축하객인 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십시오'
거의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톱밥을 켜본 사람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에 켤 수 없습니다,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싸우고,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거나 용기를 잃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톱밥을 켜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입니다.

과거는 잘했건 못했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지금 없는 것입니다. 잘했으면 한번 자축하고 지워 버릴 일이요 잘못했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한번 명심하고 불에 태워 버릴 일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인생의 여정에 어떠한 집착도 금기입니다. 바람에 몰려가는 구름을 보고 이 지혜를 받아들이세요 지나간 영광의 시간에 너무 오래 취해 있거나 흘러간 고통의 시간에 너무 오래 갇혀 있으면, 미래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며, 지나간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교훈뿐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과거에 얽매이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잭 하일스는 그의 책에서 “향수병은 미래를 설계하고 현재와 미래를 즐기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뒤를 돌아보고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걸림돌이 됩니다. 애굽을 잊어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세상을 잊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잊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완전히 잊고 노예 근성을 버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기간이 40년이란 말입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과거에 발목이 묶여 있는 사람은 미래가 없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롯의 처는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 14)

아무도 원치 않는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1986년 펠리카노호는 공해상에 떠도는 배가되었습니다.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버뮤다 제도, 도미니카 공화국, 네덜란드, 온두라스 이 모든 나라가 이 배를 거절했습니다. 문제는 이 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배는 비록 녹이 슬고, 때는 끼었지만 화물선으로 아직 쓸만한 배입니다. 배의 주인도 문제가 없습니다. 배의 소유증서도 이상이 없습니다. 배의 세금 영수증도 다 첨부되어 있습니다. 선원들도 모두 자격이 있습니다. 이 배는 이런 모두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수년동안 이 배가 공해상에 떠돈 이유는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배에는 자그마치 1만5천 톤의 쓰레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1986년 여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수거한 쓰레기입니다. 이 때 시의 직원들이 파업을 하였습니다. 도시의 쓰레기는 날이 갈수록 쌓여갑니다. 펠리카노호는 쉽게 돈벌 궁리를 하였습니다. 쓰레기를 소각하고 남은 재를 처리해주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쓰레기 때문에 이 배는 오랫동안 공해상에 떠 있어야 했고 이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보았습니다. 쓰레기를 실은 채로 다른 사람에게 가지 못합니다. 쓰레기를 실은 배는 누구 하나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 때문입니다. 옛 것을 버리기 전에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옛 것을 버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리 외모가 그럴듯해도 속이 더러워져 있으면 누구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속에 가득 차 있는 쓰레기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현재 것을 즐길 수 없고 미래로 진보할 수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과거를 빨리 잊어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가 불평 투성이가 되고, 미래를 포기하게 됩니다.

과거를 떠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과거를 떠나라는 말은 모든 과거를 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과거를 온전히 잊을 만큼 전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과거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어리석음이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과거에 시도해본 일 가운데 잘 되지 않은 일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죽은 말 위에서는 빨리 내려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죽은 말을 타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이 타본 말 가운데 죽은 말이 있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그 죽은 말에서 내려오십시오. 과거는 죽은 말과 같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죽은 말과 같습니다. 죽은 말에는 머무를수록 손해입니다.

과거에 시도해본 일 가운데 잘 되었던 일에 집중하십시오. 잘할 수 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세요. 장점을 강화하십시오. 잘할 수 있는 일을 새롭게 시도하십시오. 창조적으로 시도하세요. 더욱 탁월하게 시도하세요. 새날을 맞이하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돌아보세요. 과거를 잠시 돌아보며 과거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배우세요. 그 배움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배우십시오. 그렇다고 과거의 성공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과거의 성공에 오래 안주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머지않아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거나 몰입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과거의 승리에 집착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움이 멈출 때 성장도 멈춥니다. 성장이 멈추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더 이상의 승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은 항구에 매여 있는 배와 같은 사람입니다.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항구에 매여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과거로부터 배우되 과거로부터 과감하게 떠나세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 계획을 세우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새날을 시작하십시오

박노해 시집 《겨울이 꽃핀다》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세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칼끝 같은 지적입니다. 과거에 함몰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와 현실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말고 한 순간 한 순간을 경계하며 충실히 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선생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은 사단의 시험과 유혹을 쉽게 이길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응, 사단이 자주 자주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소리칠 때가 있다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 계시는 예수님이 나가셔서 문을 열어 주신 다네. 마귀가 `이 집에 루터가 살고 있지요?'하고 물어오면 예수님은 '과거에는 루터가 살았지, 그러나 지금은 그가 이사를 가고 내가 살고 있어'라고 대답하신 다네. 그러면 마귀는 대경실색해서 도망가 버린다네. 내가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이것이라네.'

인간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간이 있습니다. 현재는 과거의 성적표 같은 것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의 결과가 현재입니다. 지금 본의가 아닌 상황에 처해 있다면 과거에 그렇게 될 만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현재가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과거에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생활 방식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미래는 현재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라는 시간에 전력 투구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결과인 현재의 자기에게 사로잡혀 후회하거나 혹은 나약해지거나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듯합니다. 과거는 먹어버린 밥 같은 것입니다. 이제 와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중국의 속담에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좋은 일을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좋은 일이 돌아온다는 말입니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 나쁜 일을 생각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 결국 우리는 현재에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할 때마다 조건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돈이 생기면”, “인정해준다면”,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인생의 승부는 현재를 무대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도 모든 일을 뒤로 미루어 놓습니다. 이것은 가장 나쁜 태도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 보내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성취한 사람에게 공통된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과를 묻지 않고 현재에 전력 투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의 생각은 내일의 행동을 낳는다. 오늘의 고집은 내일의 증오를 낳는다. 오늘의 질투는 내일의 분노를 낳는다. 오늘의 분노는 내일의 학대를 낳는다. 오늘의 욕망은 내일의 간음을 낳는다. 오늘의 욕심은 내일의 횡령을 낳는다. 오늘의 죄책감은 내일의 두려움을 낳는다”

내일을 위하여 과거를 벗어버리십시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충실하게 사십시오. 현재 눈앞에 있는 작은 어려움 때문에 큰 구원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작은 어려움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비교도 안됩니다. 이미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마침내 하늘나라에 다다르게 합니다. 우여곡절이 있지만 가나안에 무사히 도달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과거에 집착하거나 돌아가려고 하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나뭇가지에 있는 새를 쏘아 총알에 맞은 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만 조금 났을 뿐 살았습니다. 사냥꾼이 새를 들어올렸더니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만일 저를 새장에 가두어 두시면 아저씨의 비밀을 다 이야기할 거예요. 아저씨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아저씨 친구들이 다 알게 되면 큰 일이 아니에요? 그 대신 저를 놓아주시면 아저씨가 성공할 수 있는 지혜 세 가지를 가르쳐 드릴께요. 사냥꾼은 그 말이 신기해서 성공의 비결을 알려줄 것을 조건으로 하여 놓아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마세요. 한번 살펴보고 우선 시험해보세요. 둘째, 능력 이상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실패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실수를 했을 때 그걸 가지고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이 성공의 비결을 들은 사냥꾼은 약속한 그대로 새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때 새는 날개에 힘을 주어 날아올라 맞은편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예요. 저를 놓아주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저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하나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 이것만 있으면 아저씨는 억만 장자가 되고도 남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달려가서 그 가지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는 처음에는 제일 낮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사냥꾼이 가까이 오면 그 다음 윗가지, 그 다음 윗가지로 올라갔습니다. 사냥꾼은 새가 올라가면 같이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나무 끝까지 거의 올라가서 새를 잡으려고 팔을 벌리다가 가지가 부러져서 나무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새는 사냥꾼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예요. 제가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주었는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 그르치고 말았어요.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말라고 했었어요. 제게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을 왜 그대로 믿지요? 둘째, 능력 이상의 일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잡을 수 없는 저를 잡으려고 나무 위를 기어오르세요? 셋째,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지도 말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를 놓아준 다음에 다시 저를 잡아 가두려고 했지요? 참으로 지혜로운 새와 바보 같은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새가 사냥꾼에게 준 이 지혜들을 우리도 명심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부동산을 구입할 때도 미래를 내다보고 구입해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인가는 누구나 죽습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죽음 이후의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세에 대한 아무런 준비가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매튜 헨리가 쓴 성경 주해서는 영어계 주해서로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되어 수세기 동안 많은 독자를 끌고 있는데, 헨리의 청년기에 관해 숨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처가인 매튜가는 유명한 귀족으로 그 집의 무남독녀와 헨리 사이에 혼담이 시작되었을 때 그 여자의 부모는 헨리의 인품에는 만족했으나 그 집안의 배경이 약하다해서 혼사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우리 외동딸을 줄 수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때 당사자인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갈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고, 처녀의 이 말에 감동된 부모는 혼사를 허락하고, 헨리는 매튜 가에 입양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사람이란 어디로 갈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현세적으로도 그렇고 내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을 가리켜 '장래가 촉망됩니다'라고 하는 말은 현세적으로 어디로 갈지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내세적으로 어디로 갈지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땅에 있는 것을 바라보기보다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그 곳을 위해 투자하며 사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세상을 가치 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비전이 있는 사람입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예수님의 비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장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자기의 짧은 생애가 아닌 미래의 영원한 생애를 준비한 것입니다. 썩을 것을 위해서가 아닌 썩지 않은 삶을 위한 헌신은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지혜롭게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믿는 자에게는 찬란하고 영광스럽고 넘치는 은혜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짧은 세월을 살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선택한 사람은 그 미래에 형언할 수 없는 좌절과 절망과 영원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과 유황이 들끓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살면서 미래를 심고 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볼 수 있고, 현재는 숨어서 역사하시나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심은 대로 현재 이루어 주십니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올바른 꿈을 심고 올바른 믿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며 나아간다면 우리의 미래는 너무도 영광스런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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