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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시 107: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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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편 107:1-32)

이런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에 흙으로 빚어 가마에 구워 만드셨는데 처음에는 너무 빨리 꺼내서 덜 구워진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인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너무 태워서 까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흑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적당하게 온도와 시간을 맞추어서 구웠는데 그야 말로 걸작이 나왔습니다. 적당하게 노랗게 구워진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황인종입니다. 누가 인종차별을 하거든 당당하게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종도 다양하고 국적도 다양합니다. 홍콩에서 살면서 재미있는 것은 전부다 옷을 제각각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같은 날씨인데도 추운데서 온 사람은 덥다고 거의 벗고 다니고, 더운 데서 온 사람은 춥다고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세계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각자 자기 편한 대로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종과 국적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사는 모습도 다양합니다. 시원한 에어컨이 들어오는 사무실에 앉아서 넥타이를 매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뙤약볕에 나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에게 못된 짓만 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인종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서로 사는 모습이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인생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간에 누구나 어려운 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공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시험을 잘못 보았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오죽이나 힘들면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자살까지 하는 학생들은 전부 여학생들입니다. 여러분 중에 공부를 잘 못하는 딸을 두신 분이 있으면 오늘 집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십시오. '네가 아무리 공부를 잘못해도 이 다음에 남편 잘 만나면 하루아침에 귀한 사모님이 될 수 있단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밥 잘먹고 잠 잘 자거라' 그러십시오.
어렸을 때는 공부하는 것이 힘들고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성년이 되어서는 이번에는 연애하느라고 고민입니다.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러다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면 이번에는 직장에서 당하는 어려움이 있고, 가족들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 여자들은 자기 아들, 자기 딸만 귀하게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집사람도 자기 아들은 귀하게 여기는데 저는 남의 아들이라고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시어머니들은 자기 딸은 귀하게 여기는데 남의 딸은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딸은 친정에 자주 온다고 좋아하는데 며느리가 친정에 간다고 하면 잔소리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아들, 자기 딸만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고부간의 갈등이 심각한 가정의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보통 때는 다정하게 지내던 부부들이 가끔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당신같이 집에서 할 일 없이 매일 노는 사람이 애를 어떻게 가르쳤냐?' 이러고 아내들은 '내가 어떻게 노는 사람이냐? 당신이 살림을 해보아라. 그리고 애는 내가 혼자 키우냐, 당신도 자녀 교육에 책임을 져라' 이럽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고 어느 책에 보니까 그렇다고 써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점점 들면 이제는 건강이 문제입니다. 허리가 아프다가 좀 괜찮은가 싶으면 이번에는 무릎이 말썽입니다. 그러다가 좀 낫는가 싶으면 이번에는 목이 아픕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시도 근심과 걱정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여러분이 보기에 '저 사람은 아무런 염려와 근심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에게 말못할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을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본문 4-5절은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말씀합니다.
'거할 성을 찾는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안식할 수 있는 든든한 성, 나를 지켜줄 수 있고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성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성은 어떤 성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돈으로 쌓아올린 성입니다.
몇 해전에 홍콩 TV 방송국에서 12월 31일 저녁에 송년 프로그램을 하면서 몇 사람을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해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전부 다 '새해에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답을 했습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나 심지어 대학교수까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소원입니다' 대답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면 '조국이 통일되는 것이 소원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렇게 대답을 하거나 '세계평화가 이루어져서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거창하게 대답을 할텐데 홍콩 사람들은 전부 '돈 많이 버는 것이 소원입니다'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역시 홍콩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는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공연히 옆 사람 눈치보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대답하십시오. 안 그런 척하고 점잖게 앉아 계시지만 대답은 하나입니다. '돈벼락을 맞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소원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돈으로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살아가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돈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에 젊은 남자 교우 한 분이 신장병에 걸렸습니다.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씩 신장투석을 하는 것입니다. 온 몸의 피를 몸밖으로 꺼내서 인공적으로 정화를 시켜서 다시 몸 속으로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너무도 가난해서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또 병원에 갔더니 신장투석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기 때문에 이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게 되면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이 못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도 답답해서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두 번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겨우 두 주일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만 많이 있었다면 살 수 있는 생명이었습니다.
오늘도 돈이 없어서 죽어 가는 생명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돈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도 물질의 필요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돈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이 중요하다고 해서 일생을 돈버는데 목적을 두고 산다면 육신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재미도 있고 성취감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썩어갑니다. 돈 버는 일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돈의 주인이 되는 것은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지배할 수 있으면 돈이 많아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 돈을 벌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시간을 소홀히 하는 사람, 돈을 벌기 위해 내가 맡은 교회의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돈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돈을 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거기에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말씀합니다. 돈으로 육신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가구를 들여놓고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육신은 만족이 있으나 영혼은 점점 더 목마르고 피곤해 집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피곤을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사업도 잘되고 돈도 잘 벌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고독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나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세상을 사는 것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허탈한 마음이 들고 염려와 근심만 쌓여가지 않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주리고 목마르고 그 속에서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 해결책이 있습니다.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까지 세상의 물질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세상의 물질이 나를 지켜줄 줄 알았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점점 더 근심만 쌓이고 내 영혼은 점점 더 목마르고 피곤합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이 시간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든든한 성이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곁에서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내가 필요한 것을 나보다 먼저 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든든한 성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말씀했습니다.
결코 우리를 지켜줄 수 없는 세상의 물질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점점 더 목마르게 만들고 영혼을 피곤하게 만들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고 든든한 성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어두운 곳에 갇혀있는 모습입니다.
본문 10절은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죄악된 삶의 습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친구를 잘 사귀라' 이야기를 합니다. 친구를 잘못 사귀면 나쁜 일에 끌려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즐겨 만나는 친구들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친구들이 여러분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친구들입니까? 아니면 방해가 되는 친구들입니까? 만약 방해가 된다면 지금 그 친구들과의 관계를 당장에 정리할 수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은 쇠사슬에 매여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얽어맵니다. 여러분들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빠져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할 때는 좋았는데 하고 나면 수치와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얽어매는 것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수는 없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오로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 천사처럼 환하게 얼굴이 빛나면서 죽었다고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세상 가운데서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의 오락이나 세상에서 즐기는 것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스톱을 상당히 즐겨 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고스톱을 치는 것을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스톱을 치다가 '기도할 시간이네' 그러고 그만 둘 수 있으면 하십시오. '금요기도회 가야돼' 이러고 일어설 수 있으면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혹시 한판만 더 치면 다음 판에 한꺼번에 딸 수 있을지 몰라' 이런 생각이 들면 그만 두십시오. 이길 수 있으면 하시고 이길 수 없으면 아예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그런 것에 갇혀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여러분을 가두게 만들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매이시고 세상의 것에는 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시고 세상 즐거움의 포로가 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입니다.
이것이 마음대로 안되십니까? 본문 13-14절을 보십시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끊어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세상의 즐거움과 나쁜 습관들, 이런 것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얽은 줄을 끊어 자유롭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낙심하고 피곤에 지쳐서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상실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입니다. 침대에 누워서 음식을 먹는 것도 거부하고 거의 죽음에 문턱에 다가 서있는 모습니다. 아주 낙심하고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분들도 때로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밥 먹는 것도 싫고 그저 낙심해서 앉아있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한국의 어머니들이 일년에 한번씩 앓아 눕는 때가 있습니다. 대학입시 때입니다. 저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가지 않고 보다 큰그릇이 되기 위하여 대성학원으로 가는 학생들이 있는데 정작 그 어머니들은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머리에 물수건을 한 장 얹고 밥도 안 먹고 앓아 눕습니다. 기대가 무너져 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떤 목표를 놓고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수포로 돌아갔던가, 그렇게 믿었던 친구가 배신을 했다던가, 그럴 때에 이렇게 낙심하고 주저앉습니다.
여러분들도 살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서 열심히 하노라고 했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러면 큰일 나는데' 하면서 더 열심히 해보지만 점점 더 기울어 갑니다. 병이 들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낫겠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병이 깊어갑니다. 마음속에 낙심이 됩니다. 조금 있으면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더 안 좋은 소식들뿐입니다. 그 생각만 하면 입맛도 없고 의욕도 없고 온 몸에 맥이 빠집니다.
그러나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9-20절 말씀입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말씀을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위경에서, 즉 죽음에서 건져주십니다. 죽음 일보직전까지 가서 전혀 소망이 없는 상태라 할지라도 건져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될 때, 모든 일이 마음대로 안되고 안타까울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새 힘을 주시고 건져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풍랑 가운데 처해있는 사람입니다.
본문 25-2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 도다. 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자기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나운 풍랑이 이는 바다에 떠있는 한 척의 작은 배처럼 그 인생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갑니다. 위로 높이 솟았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칩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나를 내가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내 행동을 내가 제어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어도 지금까지 내가 한 일들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 다닙니다.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릴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십시오. 미움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을 내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 나를 다스립니다. 미움이 나를 뒤덮어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아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는 더럽고 추한 것들이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본문 28-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여러분들이 자신의 인생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내가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풍랑에 밀려가면서 내 인생이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느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오늘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다 그 인생에 고통이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에 매여 살다가 영혼이 병들어 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쁜 환경과 습관에 갇혀서 살아가는 고통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낙심되어 살맛을 잃어버리는 고통이 있습니다. 또한 내 인생에 큰 풍랑이 불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피할 성을 주시고, 얽은 줄을 끊으시며, 죽음에서 건지시며, 사나운 풍랑을 잠잠케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고통을 만나든지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오늘의 고통과 눈물이 찬송과 감사로 변하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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