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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시 10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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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시편 103:8-14)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니라'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가장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 속 한번 썩인 적이 없다. 언제나 모범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사회에 나와서도 성실하게 일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오히려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계시면 시간낭비하지 말고 그냥 돌아서십시오. '잘 사세요' 그러고 돌아오세요. 그런 사람 한 사람 전도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 열 사람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야고보서 2장 10절을 읽어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부 다 잘 지키다가도 하나만 어기면 전부 어기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상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불효했습니다. 그러면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목숨을 걸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도적질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 빼먹고 골프 치러 가셨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지켜 온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는 백 점 아니면 빵점입니다. 열 가지 계명이니까 그 중에 6개를 지키면 60점, 겨우 합격이다, 이런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은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면서 '미련한 놈' 이런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못해도 자기 닮아서 그런 것은 생각 못하고 '이 미련한 놈아' 그랬지 않습니까? 자식에게도 이런 판인데 이웃들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나 마나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여러분은 지옥에서도 가장 뜨뜻한 아랫목으로 가게되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율법을 만드셨습니까? 어차피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율법이라면 왜 율법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괴로워하게 만드십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주저앉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에는 이런 절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도 안되어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결코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베드로는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옛날처럼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야겠다고 어부의 생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 본문의 헬라어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은 '아가파스 메?'입니다.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무한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필로 세'입니다. '나는 주님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전에는 제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제가 주님을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필로의 사랑, 친구간의 우정정도 밖에는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답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 번이나 안타깝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났지만 그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향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살아왔습니다. 자기 힘으로 열심히 일했고, 자기 힘으로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치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제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삽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살 때에 베드로는 놀라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의 설교로 삼 천명이 회개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주님 앞에 충성된 사도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베드로가 경험했던 그 처절한 절망, 그 절망이 베드로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망이 있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절망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돌이켜보면 결국은 죄 가운데 살아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늘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이런 직분을 맡았고, 이런 일들을 했고, 이제는 내 믿음도 꽤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것밖에 안되는가, 이 정도 시험에 넘어지는가' 이렇게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낙심되고 절망할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는 절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너무도 더럽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살면서 남들이 다 하기에 무심코 따라했던 것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했던 일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내 욕심대로 살아왔던 지난날의 내 모습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절망하십시오. 내 의지로는, 내 능력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방식을 절대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 나는 왜 이 모양입니까?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고 싶지만 내 마음을 언제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알지만 나중에 보면 언제나 내 욕심대로 살아온 것을 보게됩니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힘으로는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3-14절을 다시 읽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우리의 못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이 아들이 처음부터 '내가 기필코 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리라' 이렇게 생각하며 길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원대한 꿈을 안고 떠났습니다. '이제 이 돈을 가지고 열심히 사업을 해서 반드시 성공하리라. 그래서 아버지와 형에게 보란 듯이 금의환향하리라' 이런 꿈을 안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가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돈 있는 젊은이를 가만 놓아두는 법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다가왔습니다. 너무도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꿈같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많던 돈이 다 떨어지고 마침내 돼지먹이를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크게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꿈은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날마다 문간에 서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꿈에 부풀어 집을 떠날 때부터 아버지는 그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가지 못해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을 때에 아버지는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올 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아십니다.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결국은 죄짓는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아십니다. 내가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 결심하지만 어느새 다시 그 자리에 서고야 마는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구인가를 잘 아시기에 우리의 죄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한계를 알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모든 허물을 다 고백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가, 그것도 문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제가 누구인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문제들을 저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본문 8절부터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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