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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중요한 질문 (욥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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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질문(욥기 9:1-2)

우리가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질문을 잘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주제를 놓고 연구를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핵심을 집어내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꼭 이런 학생이 있습니다. 수업을 다 마칠 때쯤 되면 선생님이 '질문 있는 사람은 해보아라' 합니다. 이때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연애 결혼하셨어요? 중매 결혼 하셨어요?' 그래서 공연히 매를 버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줄 아는 능력,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자가 병을 앓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즘 일본의 직장인들 사이에 '오테마치'라는 피부병이 유행한다고 하는데, 이 '오테마치' 라는 단어는 도쿄에 있는 금융 중심가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왜 피부병 이름을 '오테마치'라고 붙였는가 하면 이 피부병의 원인이 엉뚱하게도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직장생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부에 심한 가려움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병은 어떤 피부병 약으로도 낫지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치료해야 낫는 병입니다. 의사에게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집어내는 능력이 요구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 핵심을 볼 줄 아는 능력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제가 홍콩에 살면서 하나 좋은 것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TV를 보든지, 라디오를 듣든지, 신문을 보든지, 맨 모르는 소리뿐이니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퉁치화가 인기가 떨어졌다거나, 장관이 누가 바뀌었다거나, 어디서 불이 났다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몇 명 죽었다거나, 이런 것은 모르고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중에 다 소문으로 듣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TV 보느라고 귀를 곤두세우고 애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알면 머리만 아픕니다. 그냥 비디오나 빌려다 보세요.
그런데 가끔 한국에 갈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일간신문부터 시작해서 주간잡지, 월간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문과 잡지들이 거리에 널려 있고 24시간 TV가 나옵니다. 거기다가 신문이든 TV든 읽고 보는 것이 100% 전부 이해가 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어떻게 발전되어 나갈 것인가? 우리 나라에 또 다시 제 2의 경제위기가 올 것인가? 대우자동차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회창 총재는 국회로 들어올 것인가? 우리 나라는 올림픽에서 몇 등을 차지할 것인가?' 이런 것뿐만 아니라 '올 가을에는 어떤 패션이 유행할 것인가? 오늘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별의 별 걱정을 다 하게 만듭니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오히려 우리를 혼란하게 만들어서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구분해 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일들은 전부 다,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일들입니다. 정치 문제를 보십시오.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입니다. 여당과 야당, 정치인과 국민들 사이의 문제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부와 기업, 기업과 국민 사이의 문제입니다.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의사들의 파업도 결국은 정부와 의사들, 의사와 약사, 의사와 국민들과의 문제입니다. 이외에도 외교문제, 교육문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향해 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천당 이야기만 하지 말고 정치 이야기도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면 교회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문제에 뛰어들었습니다. 무슨 '연합'이라든가 '공동체'라는 단어를 내걸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찾아보았더니 참 재미있었습니다, 별의별 단체가 다 있더라구요. '연합'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단체들에는 경제정의 실천연합,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한국 유권자 운동연합, 겨레 하나되기 운동연합, 신 사회 공동선운동연합, 그린 훼밀리 운동연합, 건설교통문화 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 자전거 타기 운동연합, 이런 단체들이 있습니다. 또 '공동체'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단체들을 보면 민주 공동체회의, 새 교육 공동체 위원회, 공동체 사회포럼, 밥상 공동체, 최근에는 사이버 공동체까지 나왔습니다. 거기다가 '모임'이라는 단어도 유행인데 소비자 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 이런 것까지 있습니다. '교회를 걱정하는 모임' 이런 것이 없는 게 다행입니다.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앉아서 걱정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이런 사회 단체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독교인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문제, 정치문제에 뛰어들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교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걱정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여러분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셔야 합니다. '남북이 언제 통일 될 것인가?'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가?' '경제위기가 다시 한번 닥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여러분에게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여러분에게 당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 질문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면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피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 도망가든, 땅 속으로 도망가든, 언젠가는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됩니다.
'나는 앞으로도 30년, 40년은 더 살 것인데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이렇게 미루지 마십시오. 인생이란 참으로 짧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렸을 때 부모님들은 지금 여러분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그렇게 흐르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생이 결코 길지 않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말씀했습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을 때에는 안개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입니다. 아침해가 돋는 즉시 안개는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인생이 다 내 것이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잠깐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 짧은 인생이 지나고 나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게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런 칭찬을 받을 것이요,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나를 떠나라'는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까?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까? 이것은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질문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무엇을 근거로 해서 '나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대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다'고 말합니다. 중세기 수도원에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산골짜기 수도원에 들어가서 결혼도 안하고 평생을 경건하고 거룩하게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기에 유명한 수도사 성 이냐시오라는 사람이 쓴 '영신수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에는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극도로 절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면 '죄를 범할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그것에 저항하고 또 다시 거듭 거듭 생각이 들어오면 그 생각이 굴복될 때까지 계속해서 저항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온 마음이 먹는 것에 있어서도 안되고 식욕 때문에 빨리 먹어서도 안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은 상당히 지키기 어려운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행을 강조하는데 '가장 적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고행은 근육에만 아픔을 느끼게 하고 뼈에까지는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육신을 과히 쇠약하지 않게 하고 아프게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 깊이 상처를 내지 않고 외부만 아프게 하는, 마디에 매듭이 있는 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경건하고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9장 20절을 보십시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만큼 의롭게 산 사람이 없습니다. 욥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이 생일 잔치를 하고 나면 혹시라도 잔치 분위기에 들떠서 실수를 하였을까봐 무조건 번제를 드렸습니다. 짓지 아니한 죄까지도, 혹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가리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욥도 자신을 정죄합니다.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의롭게 살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의롭다고 해도 나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제를 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았다 해도 우리 속에 있는 감시자, 우리의 양심이 나를 스스로 죄인이라고 정죄합니다. 내가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하실 리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말씀이 있습니다. 3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어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하루는 자동차를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교통순경에게 걸렸습니다. 그래서 한번만 봐 달라고 했습니다. 'One time you see me' '한번만 봐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교통순경이 'No soup' 그러더랍니다. '국물도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래도 흥정이 있고 봐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면 그 즉시로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반은 어둡고 반은 밝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 때 상황이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한번만 봐주세요' 이런 변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도,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나설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서서 변명하는 것도 용납이 안되고, 그러면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설 수 있다는 것입니까?
33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이 말은 하나님의 어깨와 내 어깨 사이에 손을 얹고 중재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없구나'라는 말은 그런 중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욥은 욥기 19장에서 '내가 알기로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없구나' 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왜 빨리 나타나시지 않느냐' 하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자기편을 들어 줄 그런 중보자가 계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어서 와주시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병원에서 X-Ray를 찍으실 것입니다. 아무리 예쁘게 생긴 사람도 X-Ray를 찍어놓으면 다 똑같습니다. 어떤 분은 X-Ray 찍으러 가서 '예쁘게 찍어주세요, 칼라로 찍어주세요' 우기는 분이 계신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뼈를 모아놓은 것뿐입니다.
저는 X-Ray를 찍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X-Ray는 그저 몸 속을 들여다 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옷이 있다면, 그 옷을 입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들여다보셔도 그 속에 있는 것을 다 감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옷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은 흰옷을 입는 자는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7장 9절은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그랬습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전부 흰옷을 입습니다. 흰옷을 입으면 모든 죄가 감추어지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흰옷은 어디서 난 옷입니까? 요한계시록 7장 14절의 말씀입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앞에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김을 받았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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