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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쓰나미의 추억 (욥 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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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성탄절 다음날, 인도양에서 지각변동에 의한 해저 지진이 일어났고, 그 지진은 거대한 지진해일을 발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인도, 스리랑카 등 남부 아시아 지역을 휩쓴 쓰나미로 현재 17만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아직도 행방불명자가 수만 명을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대의 재난 현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재난의 규모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인류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미디어들은 각 종교 지도자들이 “인류는 왜 이런 엄청난 재앙을 당해야 하는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금방 본 비디오 클립은 작년에 개봉된 The Day After Tomorrow라는 영화의 한 부분입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에 의해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유입되면서 갑작스러운 기후의 변화가 발생하고 지구의 북반구는 순식간에 빙하로 뒤덮이는 가상 스토리를 영상화한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크게 주목하지 않았는데, 6,7개월 만에 인류가 맞이하는 최악의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이번의 재난을 예견한 예언자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입니다.

우선 그 재난의 희생자들에게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고, 아직도 고통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땅히 해야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 또 실제로 발생한 재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라도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재난을 올바로 해석하고 거기서 교훈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자연의 힘과 규모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 인간을 발견합니다. 이 쓰나미는 그 속도가 시속 800km에 달한다고 합니다. 제트 비행기의 속도입니다. 그래서 아시아 남쪽에서 발생한 쓰나미가 불과 몇 시간만에 아프리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진앙지인 수마트라 섬은 36미터나 이동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는 사람도 있고, 돈이 좀 있으면 어깨가 당당해지는 것도 인간입니다. 뭐든지 자기보다 못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무시를 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세계 아닙니까?

그렇게 자기 잘난 맛에 행복을 느끼는 인간이 이 거대한 힘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시속 800km의 해일 앞에서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호통을 칠 것입니까? 단지 H2O에 염화나트륨이 첨가된 물질의 움직임을 보며 우리의 철학과 지식을 논할 것입니까? 결국 우리는 매우 미약한 존재라는 고백이 입술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평생 고생해서 이루어 놓은 업적과 재산도 순식간에 파도에 사라져버립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 눈앞에서 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 그 잘나고 똑똑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한반도 크기의 두 배나 되는 섬이 통째로 옮겨지는 실제상황 앞에서 우리가 잘났다고, 똑똑하다고, 돈 좀 있다고 목에 힘주고 사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입니까? 순식간에 십만이 넘는 목숨이 사라져버린 현실 앞에 서로 견제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밟고 올라서는 약육강식의 사회생활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것입니까?

사실 이 해저지진이나 쓰나미는 지구 전체의 스케일로 보면 아주 작은 미동에 불과합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흔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에게는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가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정립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섬이 옮겨졌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입니까? 현란한 말솜씨와 지식으로 서로 변론하던 욥과 세 친구들은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똑똑한 척했던 것과 교만했음을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자연현상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더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떠도는 말 중에 하나는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참사를 당한 지역이 다 이슬람이나 불교권, 또 힌두교의 나라들이거든요. 정말 하나님이 불교와 이슬람교, 히두교 믿는 사람들을 심판하신 걸까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하셨다는 증거가 있기 전에는 이런 얘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인식이 잘못되어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신이 났습니다. 이 몹쓸 인간들, 포악하고 잔인한 이 성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쳐서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기로 하셨다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 멸망시키려던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언제나 니느웨가 멸망하나 기다리던 요나는 이제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들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구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실 줄 알았다구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것이 요나에게는 불만입니다. 사실 요나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죽지 않고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뭐예요?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으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느냐?”

그 하나님께서 십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인도네시아는 아끼지 않으실까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비로 사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이런 재난을 겪을 때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은 말세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 끝나는 준비를 하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나라끼리 싸우고 전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근과 지진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큰 지진이 일어나면 마치 종말이 다가온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태입니다. 이번에도 쓰나미가 지나간 후에 인터넷에서는 종말론 카페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웅장하게 서 있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에 놀란 제자들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지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 예수님의 말씀은 대부분의 예언이 그렇듯이 임박한 예루살렘의 함락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종말을 내포하는 이중의 예언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기근, 지진이 항상 종말의 징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 종말을 알게 해 줄 징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거든요.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주님의 다시 오시는 날도 우리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1988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가 일어난다고 그렇게 설레발을 치다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잖아요.

오늘 우리는 말세를 살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이나 모레 세상이 끝나는 것이 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살아 있는 제자들이 당하게 될 말세를 말씀하셨고, 또 주님이 다시 오실 말세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신학에서는 말세를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이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이 현재까지 이천년이 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를 산다는 것은 당장 오늘 밤에라도 주님이 오실지 모르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은 바빠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못하지만 나중에는 잘하겠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말세를 말씀하시면서 전쟁이나 기근, 지진을 언급하신 것은 그러므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우리에게 그런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실 그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종말 아닙니까?

말세를 산다는 것은 날짜를 정해 놓고 시한부 인생처럼 긴장과 공포 속에서 사는 그런 종말론에 휘둘리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이 오히려 올바른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쓰나미로 재난을 당한 이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답게 말세를 사는 모습은 그 재난의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장 주님이 오신다 하더라도 주님이 보고 싶어하시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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