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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라라 (시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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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상상하지도 않았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며 분노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보복하려고 합니다. 더욱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억울하게 당했을 경우엔 더더욱 분노하고 보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보복하시고 보응하셨다면 아무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한 없는 긍휼과 자비와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 험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를 나누기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전의 좋았던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과 같은 시절을 지나가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발견하며 찾아가며 주 앞에서 회복되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사방이 막힌 것 같이 보이지만 주님 앞에 있는 자는 희망이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맑은 시냇물에 가서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선하고 맛있는 풀이 옆에 있을지라도 사슴은 물을 찾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수 많은 사람이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고뇌 때문에 인생을 방황하며 삽니다. 나름대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공허와 허무를 느끼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삶에 평안과 기쁨, 감사 대신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시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주님을 잘 믿는 것 같지만, 우리 안에 공허가 있고 허망함이 있다면 한 번도 갈급하게 주님을 찾아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갈급함을 해결하십시오. 주님이 아니면 절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아니면 나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간절히 간구하십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것보다 주님이 더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내가 이 자리에 내 발로 온 것 같지만 사실 주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보다 주님은 우리를 찾기에 갈급하신 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우리는 이 사실을 알지만 주님을 향한 발걸음을 주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이 세상이 더 좋아지는 이유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이 있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활을 하면서 불쑥 불쑥 욕심이 튀어나옵니다. 너무 많은 욕심이 튀어나와서 어떻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함께 찬양하며 예배드리다가도 다른 사람이 더 잘하는 것 같이 느낄 때는 어느 틈엔가 그 사람과 경쟁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욕심이 주님을 찾는 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 보다 더 관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포기하십시오.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사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우리는 ‘만사형통케 해주시면 주님 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지만, 우리가 잘 되면 너무 바빠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옛 정을 생각해서 교회에 한 번 나오고, 봉사 한 번 하면서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가장 갈급하게 찾는 때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될 때가 아닙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막혀있는, 하늘도 막혀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을 갈급하게 찾습니다. 왜냐하면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요, 나의 산성이요, 나의 도움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필요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같으면 ‘지금까지 내 말을 듣지 않았으니 한 번 고생해봐라’라고 할 텐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말썽 부리고 주님께 가슴 아픈 일을 오랫동안 하고 돌아와도 ‘잘 왔다. 내가 너를 기다렸다’ 라며 따듯하게 맞아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의 기간이 길어진다 하더라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마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지금 이 시간도 우리를 도우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며 손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려고 할 때에 이미 우리 곁으로 달려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를 그렇게 갈망합니다.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내 마음에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시고, 주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감격하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는 모든 고난과 시련, 공허와 허망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만 해결됩니다.
현대인의 부족함은 능력, 부함, 권력, 명예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 하나님과 세상을 동일하게 찾아도 상관없다는 착각, 죄와 거룩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착각, 겸손과 교만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착각이 신기루를 좇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더 이상 헛된 것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만 집중하고 하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라
 
2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시편 기자도 부족함 투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안에서 세상의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뜨겁고, 찬송가 한 소절만 불러도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부족한 것 투성이었지만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른 모든 부족함은 느끼지 못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으로 무너졌습니다. 고난이 길어지면 우리는 갈등합니다. 특별히 억울하게 당하면 더더욱 의심과 불안의 늪에 빠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 내 생명을 주님을 위해 다 드리겠습니다’라고 얼마나 많이 고백했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조금만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 같으면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순간은 좋은데 문 밖에만 나가면 달라집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고 나누고는 주차장에 가서 화를 냅니다. 문 밖만 나가면 세상이 되어 세상의 법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니 고민과 갈등은 눈감을 때만 해결되고 눈뜰 때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눈을 감을 때 주께서 응답해주시는 것 같은데 눈뜨면 현실이 눈앞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항상 교회에서만 만나려하고 과거에 만났던 하나님으로 오늘을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 만나는 하나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제 만난 하나님이나 내일 만날 것 같은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님을 만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은혜의 통로
 
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나님을 따라가며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따라가는 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하나님을 따라가면 세상의 법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슬픔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슬퍼했습니다. 자기의 삶을 통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과 긍휼이 믿지 않는 이에게 흘러 넘치지 않았기에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슬퍼해야 할 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가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기가 막힌 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때가 아닙니다. 나의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 되지 못할 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세상 사람에게 흘러 넘치지 못할 때에 그 때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 슬퍼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야 할 소금과 빛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길 원합니다. 이 땅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악해지는 이유는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정, 직장, 온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온 땅에 흘러 넘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 땅을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 도다
 
시편 기자는 과거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섬겼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때를 생각하고 지금의 형편을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만사형통의 삶’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고통 받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이 하나님의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탐을 갔다가 그 땅의 족속들을 보고 겁을 먹었습니다. ‘우리보다 한 배 반이 더 크니 정복할 수 없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서 모세에게 ‘내가 이들을 전염병으로 다 쳐서 멸하고 네게 더 크고 강한 민족을 세우게 하겠다’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모세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베풉니다. 하루를 1년으로, 40일을 계산해 40년을 광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면 저주인 것 같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사실 고난의 시간이었고 어려움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좋았던 때만을 생각하고 지금의 어려움 때문에 갈등하지 마십시오. 문제와 고난을 묵상하면 원망과 불평만 더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실수투성이, 모순투성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절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섬기다가 혹 어려움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그 힘들고 어려운 짐을 들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살아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위로자요 치료자이십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낙망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주님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수천, 수만 번을 들어서 알지만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은 나를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아 보입니다. 열심히 기도했고 나름대로 주님을 향해 최선을 다해 산 것 같았는데, 주님이 또 나를 외면하신 것 같을 때 우리는 낙망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한 번도 그들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도우셨습니다. 배고프다면 만나를 주시고, 고기를 먹고 싶다면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목마르다면 반석을 쳐서 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도대체 왜 우리를 여기에 데려와 이 고생을 시킵니까?’ 라며 틈만 나면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했을 때 주님께서 채워주셨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했을 때, 사업을 위해, 가정의 복음 전파를 위해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내 길로 갔습니다. 나 스스로 잘못 하고서는 ‘주님께서 내게 어려움을 주셨다’고 주님을 원망하며 또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낙망하고 절망하게 합니까?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제일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낙망하거나 아무리 미래가 어려워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자녀 된 우리를 낙망하고 절망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는 절망과 낙망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절대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주님께 소망을 두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소망은 믿는 자만이 누리는 복입니다. 소망은 절망과 좌절을 이기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됩니다.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와 복을 베푸셔서 우리를 이 땅 가운데서 복된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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