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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림의 은혜 (애 03: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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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를 사랑하는 총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 위 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를 약속했습니다. 안달이 난 총각이 일찍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처녀는 무슨 이유인지 늦습니다. 총각은 애가 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찰나에 총각에게 하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총각은 기다리는 것이 지겹다고 하면서 원하는 대로 일이 금방금방 이루어졌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소원대로 될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절대로 원상대로는 안된다고 하면서 후회는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총각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소원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장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그랬더니만 행복한 결혼식이 즉시로 거행이 되었습니다. 아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빨리 컸으면 좋겠다. 장가를 갔으면 좋겠다. 손자를 보았으면 좋겠다. 즉시로 붕어빵이 구워지듯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는 늙어서 죽을 날이 임박한 할아버지가 되어있었습니다. 조금 있더니만 죽음의 사자가 데리러 왔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으로 목덜미를 끌고서 갑니다. 발버둥을 치면서 안된다고 소리를 치다가 잠이 깼습니다. 세상이 새롭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총각은 기쁨으로 처녀를 기다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기다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희망을 키워가기도 하고, 그 기다림 속에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구를 기다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기다림조차 없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삭막하고, 얼마나 허전하고,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그러한 기다림이 때로는 간장을 태우듯 온 몸을 녹아 내리게 하고, 뜬눈으로 밤을 설치게도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그래도 기다리며 살 때가 행복 한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멀리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아낙네들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멀리 헤어져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들을 군 문에 내 보내고 그 아들의 휴가를 기다리는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모두 공통점은 바로 그 '기다림 속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저들에게서 그 기다림의 원인이 없어졌다고 상상해 본다면 얼마나 괴롭고 답답하고 쓸쓸하고 허전하겠습니까? 이렇게 인생에게서 기다림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고 또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적 차원에서도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1. 신앙인 이란 고난 중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기다리며 산 민족의 표본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이 택한 구원의 샘플로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 역사를 보면 한마디로 '기다림의 역사'이었습니다. 저들은 수 없는 침략을 당하면서 그리고 생활의 어려운 처지에서도 오로지 예언자들의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저들이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 생각한 것은 진정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는가? 아니면 우리 조상들의 죄 값으로 오늘의 고통이 우리들에게 임하였는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포로기간 동안 슬픔과 좌절 속에서 언제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낙담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이 이사야와 예례미야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기다림 속에서 장차 나타날 메시아를 예언해 줌으로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였습니다.

신앙인 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기다림'으로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이러한 기다림이 헛된 소망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고, 더욱이 '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의 기다림이란, 막연한 허공을 쳐다보는 그러한 기다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의 이단들의 간교한 속임수들을 보면 곧 주님이 재림할 것이기 때문에 모아 놓았던 재물을 다 바치라고 하고,학교도 갈 필요 없으니 주님 맞을 준비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그처럼 허황된 기다림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바로 그것입니다. 즉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의 할 일을 하면서 사과나무를 심으면서 사는 그런 삶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할 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는 뜻은 바로 이렇게 현실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세상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여 탐심과 욕심으로 살아가지만, 우리 신앙인 은 이 세상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란 것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지만, 신앙인 은 이렇게 살다가 죽는 날에는 더 좋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는 그것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인 은 현실의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 참된 신앙인 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투자하지 않고, 동화하지 않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그 나라의 의를 위하여 살아가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그러한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남모르게 청춘을 받쳐 희생하며 봉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들을 위하여 상급이 예비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바울사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2. 신앙인은 이 기다림 속에서 <고통>과 <새로운 날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 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라고.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기다림 속에 고통을 음미하며, 기다림 속에서 새로운 날의 의미를 되새겨 보군 하였습니다.

오늘날 유대인처럼 강인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저들의 강인함이 어디에서부터 기인되었다고 보십니까? 기다림 속에서 고통과 새로운 날의 의미를 되새겨 볼 줄 아는 그런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때때로 지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의 실패이든, 실패한 현실 속에서 다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기다림으로서 사랑을 되찾으라는 말은 정녕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거나, 건강에 실패했거나, 경쟁에서 낙오되었거나, 입학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기다리라는 말은 하나의 고초요, 재난이요, 쑥과 담즙을 마시듯 쓴 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를 방황하며 술취함 속에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이 없이 단순한 기다림으로 버티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탕자의 자기 발견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 어쩌다 내가 이렇게 돼지 우리의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되새겨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아버지의 집을 생각해 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도 많은데...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하고 그 자리에서 비약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삶의 연속이 아니라 비약입니다. 인격의 개선이 아니고 인격의 혁명입니다.

전에 목회 했던 충청도 서천에서 교회 권사님의 아들인 김홍렬 해군 참모총장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 입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살고 행동했습니다. 뇌물을 줄 줄을 모르는 청렴결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심각한 위기가 왔습니다. 그가 소장이었을 때입니다. 진급에서 누락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후배가 먼저 중장으로 진급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옷을 벗을 것인가? 견딜 것인가? 그는 여러 생각에 번민이 되었지만 다음 진급을 기다리며 참았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도 누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기도 요청을 받고서 발표를 기다리다가 얼마나 실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추하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일인데 TK라고 하는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세상의 풍조가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본인의 마음이 아팠겠지만 발표 날이 수요일인데 형님이 위로의 전화를 했는데 조카로부터 교회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는 발표를 듣고 교회를 찾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참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다린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그로부터 얼마 후 뇌물 사건으로 해군 참모총장이 물러나고 소장인 김홍렬 장로가 중장 여섯을 제치고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장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밀하신 지 모릅니다.

3. 신앙인 은 기다림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 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심이라'라고...
바로 그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 깊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소망의 문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절망은 소망의 문을 두드리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에서 부유하게 살기에 영혼의 눈이 가리워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질의 가난히 오히려 더 육신의 욕망을 바라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부해지고, 높아지고, 자랑스러운 마음 속에는 참된 기다림도 없고, 소망의 문도 열려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통 중에서 낮아지고, 생활고의 쓴잔에서 겸손해지고, 병상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고, 도리어 확신과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다림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 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몰랐던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게 될 때, '자고 깨면 새로워지고, 자고 깨면 새로워지는' 매일 매일 그 깊고 오묘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향하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이제는 오히려 쑥과 담즙을 마시듯 고통스러웠던 자리에서 오히려 소망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샘솟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 인생의 고초와 재난과 쑥과 담즙의 쓴 잔을 들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래서 현재 낙심 중에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쳐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왜 거기에 매달려 못을 박혀야 했으며, 그가 누구를 위하여 말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는가를 중심에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인생의 고초와 재난의 쓴 잔을 마시고 있는 심령 속에 찾아오십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선을 베푸신다' 고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의 아픔과, 기다림의 담즙 속에서 오늘도 소망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들으라 기쁜 소리를 구주가 오신다/ 노래를 불러 맞으라 구주가 오신다/갇힌 자 놓아주시고 얽맨 자 풀어서/ 진정한 자유 주시려 구주가 오신다/두꺼운 죄의 장막을 다 활짝 벗기고/ 참 밝은 빛을 주시려 구주가 오신다/슬픈 자 위로 하시고 상한 영 고치며/ 가난한자를 부하게 구주가 오신다/평화의 왕이 오신다 호산나 부르자/ 하늘의 문이 열렸다 구주가 오신다/

바라옵기는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 앞에 원망만 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즉 기다림의 은혜 속에서 찾아오는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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