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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청년의 결단 (애 03: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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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민족과 사회를 보면서 우리 청년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결단이 바로 설 때 우리 민족의 앞날은 밝을 것이요, 기독청년의 사명을 감당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국이 멸망해 가는 참상을 눈으로 보면서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 서 부르짖는 20대의 청년 예레미야의 심정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청년의 때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멍에를 메는 것이 복됩니다. 그 멍에를 메우는자가 사람이 아니라 우리 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청년은 이 민족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위해 주님께서 멍에를 메어 주시고 인도하실 때 불평하거나 불만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비겁하지 않고 순종할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용기와 결단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가 걸어가는 그 숭고한 걸음을 동행하지 못했 습니다. 우리는 슬픈 기색을 띠며 뒤돌아가는 비굴한 청년을 성경 가운데서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l9장l6-22절에,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새 한 청년 달려와서 ?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 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하다 일컫느냐 ?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가지부 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서 구원을 얻고 돌아갔는데 이 청년은 왜 이토록 슬픈 기색을 하고 떠나갔는지 심각한 교훈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과 대화한 시간은 불과 십분을 넘기지 못한 짧은 시간이었는데 이 청년이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생각하였기에 이토록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낙심하고 돌아가야만 하였을까요? 나는 목사로서 이 청년을 가리켜 오범 청년이라고 분명히 말합니 다. 청년회에 가입도 않고 교회 학교 교사는 죽어도 못한다며 주일날이면 등산이나 가는 청년들에게 비하면 천국에는 선착순으로 꼴 인해야 할 청년인데 예수님께서는 왜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서 반쪽 신앙을 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공리적인 심정으로 계명을 지키는 종교인은 되었으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되지 못하였고 복 받는 율법은 알았으나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헌신하는 제자의 길을 부정했습니다. 자 기를 위하여서는 철야할 수 있는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과 그 이름을 위하여서는 손발을 쓸 수 없는 반신불수의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서양인이 한국 교회를 평한 대로 일요일 예수는 믿으나 월요일의 예수는 모른다. 부활하신 예수는 잘 알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청년이 이기주의적인 심정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율법을 지켜왔으나 그리스도가 메우는 멍에를 멜 수 있는 결단이 없었다는데 비극이 있었고 슬픈 기색을 띠며 돌아가야 만 했던 것입니다.

첫째, 자기를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자 기를 포기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기독청년들에게 자기를 부정하는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없었습니다. 신앙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 청년들이 역사에 ?을 남기는 숭고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안일과 허탄한 세속의 명예를 버리고 그리스도 의 십자가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콘스탄틴 황제로부터 권력의 맛 을 본 사도들의 후계자들은 머리에 가시관 대신에 금관을 쓰고 세상 의 약한 자들을 위한 봉사자로서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 했으며 권세자들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선교에는 큰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결국은 자기를 부정하지 못한 데서 세상에 이용되는 속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럽보서 3장8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모 든 것을 잃어버리려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말했읍퍼다. 위대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부정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기 위해서 부귀와 영화와 안일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결단을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날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학문과 익힌 무술 을 귀히 여기지 않았고, 바로 왕국의 권세가 눈 앞에 온것도 포기하 고 맨 주먹으로 바로의 궁궐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런 발걸음으로 40년이 지난 어느 날 호렙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읍니 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이는 철저한 자기 부정의 순간이었읍 니다. 모세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겪는 고난을 애굽 의 모든 보화보다 크게 여겼습니다. 자기 부정의 길이란 좁은 길이 요. 포기하는 길이요, 희생의 길입니다.

20세기 교회 혁신을 일으킨 예언자이며, 독일 교회 순교자인 본 회퍼는 철저하게 자기 부정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매스컴을 이용하려고도 않았습니다. 그가 히 틀러 정권에 항거하고 독일적 그리스도인 운동을 거부하고 고백 교 회에 가담하여 그 교회가 경영하는 비공식 신학교에서 20여명의 목사 후보생들을 가르치면서 같이 살고 있었을 때입니다. 하루는 학생들 수 명이 와서 말하기를 국가 교회 밖에서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방법으로는 소극적인 것이니 약간 타협을 하는 척하고 큰강단을 점령하여 그의 영향력을 넓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대답하기를 '복종하는 하나의 행동이 백개의 설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천 년 교회사를 볼 때 수 많은 심령들을 통곡하게 만들고 미치게 만들던 설교가들의 소리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피로 걸어간 순교자의 소리는 강하고 길게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공자의 천 마디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 외치던 한 마디는 우리의 가슴을 찢고 흔을 흔들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를 포기하고 행동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의 초대 교회 수천 군중의 소리는 사라졌어도 소수의카타콤에서 신 앙을 지킨 성도들의 눈물과 자취가 지금까지 길이 남아 있습니다.

본회퍼는 그 시대에 대중을 얻는 것이 성공하는 길인데도 인기 없는 소수의 목사 후보생들의 작은 써클에 집중하게 된 것은 그리 스도가 걸어간 길이며 또 자기가 걸어야 되는 것으료 알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산 신앙의 사람이며, 현실을 앞서서 산 사람이요, 유리한 모든 길을 포기하고 좁은 길 죽음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 선택 때문에 그는 학문적 지위의 문이 닫혔고, 설교의 길이 막혔고, 저술의 길이 막혔으며 (자유가 박탈당했음), 그의 친구들과 대화의 길마저 막혔습니다. 또 아름다운 약혼녀 베데마이어의 불타는 사랑의 기대를 저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이 세상을 떠나간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네 소유를 팔라'고 한 그리스도의 명령에 아멘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 바울, 본회퍼의 아멘하는 음성을 들읍시다. 베트게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누군가 완전한 희생을 한다면 역사는 일미리미터 전진한다:' 땅 위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비겁한 자의 소리가 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런 에덴 동산 선악과의 유혹이 있으나 역사가 흘러가면 물거품 마냥 다 사라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간 자들의 소수의 소리가 살아서 들려올 뿐입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지금 살아서 말합니다. 가인은 살아서 큰소리쳤으나 죽음과 함께 그의 음성은 영영 사라졌습니다.

둘째, 행동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하는 부정적인 사람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청년처럼 어렸을 때부터 주일 학교를 다니고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였다고 하면서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봉사와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생활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삶을 고난 에 있는 자들과 나누어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기 위하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슈바이처 박사는 말하기를,'이 역 사상에 영광을 누린 사람들은 그만치 삶을 주고 간 사람들이었다:'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찾는 것이 부자로서의 사명이라고 하 시며 본문에 나오는 부자 청년을 향하여 네가 물질을 많이 가진 것 은 너 혼자 창고를 짓고 배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의 창자에 채워주고 나누어 먹기 위하여 준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필요한 곳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처한 가난, 즉 양심과 정의,자유와 물질에 가 난한 자들이 있는 곳을 찾으십시요 옛날 모르드개의 말대로 오늘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렇게 살아있 는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고 한대로 이 시대 에 살면서 사명을 아는 자에게는 하늘이 준 ?은 때일 것입니다. 청 년들이여, 이 불덩이가 다 연소되기 전에 이 민족의 가난이 있는곳 을 찾아 가십시오. 그리고 삶을 나누어 주십시오. 슈바이쳐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아프리카를 찾아갔습니다. 간디는 인도를 위하여 자 기 생을 주고 갔습니다. 수유동 4 ,l9묘지에 잠든 젊은 꽃들은 이 민족이 자유당 독재로 인권과 자유와 양심이 깊이 썩어갈 때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생을 민주 제단에 주고 갔습니다. 지금도 수없는 정의의 사람들이 수난의 길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다미엔은 하와이 나병환자들을 찾아 갔습니다 '최 용신은 경기도 샘골에 들어가 상록수의 일생을 걸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앉아서 기다리는 자들이 되지 말고 일어서서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기도하실 때 그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핏 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생사를 결단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가 끝나자 ?세마네 동산에 앉아 기 다린 것이 아니라, 일어나 제물이 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발걸음 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세 제자에게 u일어나 함께 가자H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나를 제물삼아 구원의 역사를 이 룰 곳이 어디냐?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의 신음 소리는 방 방 곡곡에서 들려오고 있으니 일어나 함께 걸어가자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 이 민족이 신음할 때 슬슬 피하여가는 한국 교회의 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되지 말고 상처를 싸매주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리고 도상에서 신음하는 자는 저 유 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거리요 신음 하고 있는 삶의 역사현장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민족을 구원하시려고 지친 걸음을 옮기시며 삶을 나누어 줄 자를 찾아가고 계십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이 물음이 베드로만의 물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서울 거리를 피해가는 우리들 때문에 서울을 향하 여 들어오시는 주님을 향해서 우리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는다면 '나는 너희들이 피해가는 민족의 고난의 십자가에 두번 죽으러가노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몇년 전에 가난한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젊음을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한 후배가 편지하기를 '형님, 십자가는 서서 구경하는 것 보다 지고 가는 자가 되어 야겠더군요'라고 한 말이 감명 깊게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충성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바치라는 것 입니다. 전적인 헌신을 그리스도는 요구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옛날이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명령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딴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데 많은 귀한 것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자의로 바쳤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생명을 거는 모험을 하였으며,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 져져야 했고, 다니엘은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끓는 용광로 속에 던져져야 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는 순교자의 죽음을 감수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데 자기 소유를 포기하지 못하고 슬픈 기색으로 돌아섰습니다.

2천년 교회사를 돌아볼 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면서 그들의 비지땀도 감격의 눈물도 생명의 피도 아낌없이 쏟으면서도 아쉬움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사자 밥이 되고 불기둥에 달려서도 찬송을 부르고 환 회에 넘쳤던 그 신앙 전통이 어디로 사라졌기에 오늘날 우리는 곰탕을 먹어야 찬양을 하는 앵무새가 되어 감격도 눈물도 없을까요? 그리스도를 이렇게 혹평한 분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천재이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그 댓가로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청춘을 빼앗고 있다.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는 결국 미치게 만들고 가죽을 벗기고 생명을 빼앗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하기를 천국은 우리들에게 바라는 소망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 때문 에 그토록 열광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에게는 천국 이상이 있었고 그들을 그토록 미치게 만들고 감격하게 만든 것은 타산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I5-l4절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이 사랑 때문에 바울이 미친 듯이 순교의 제물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극악한 살인강도와 함께 낙원에 갈 수 있었으나 회색의 바리새인은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정통주의나 신학상의 논쟁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행방불명이 되어 신의 죽음을 뇌까리는 신학자들에게는 신앙인의 감격이나 눈물은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전생을 걸고 헌신하고 죽도록 충성하며 생 을 마칠 때까지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모셔 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을 사랑하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친 사람들의 기록을 우리는 성서에서 많이 읽고 있습니다. 삼손은 데릴라를 사랑하다가 머리를 깎이 1.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렸습니다.

프랑스의 어느 시인의 고백입니다. 그 시인은 so세에 딸을 하나 두었습니다. 이 딸이야말로 그의 생명과 같은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20세가 되던 어느 날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기도하는 중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신앙 생활을 격려하고 그 결정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딸 없이는 아버지는 살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딸아. 네가 예수를 믿는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너는 선하고 가장 고상한 결단을 하였구나. 그러나 딸아, 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가려므나.' 하였습니다. 그러나 딸은 기도하고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곁을 떠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떠나야 합니다' 딸은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습니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는 딸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난간에 기대서서 '2천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가 나에게서 심장 과 생명을 도려가는구나. 그대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죽은 사람인가 산 사람인가. 그대는 내 품에서 생명같은 나의 딸을 빼앗아 가는 자여, 생명의 약탈자여, 사랑의 약탈자여'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생명과 사랑을 약탈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약탈이 아니요, 진정한 사랑의 고백일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 우리의 생명과 사랑을 약탈당하는 믿음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고 사랑과 생명을 약 탈해 가는 주님으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생명을 약탈당하고 사랑을 약탈당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무엇을 빼앗긴 것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젊음을 빼앗겼습니까? 김일엽 스님은 부처 때문에 삭발하고 스님이 될 때 청춘을 불살랐다고 하였는데 여러분도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청춘을 불살랐습니까? 예수님때문에 직업을 빼앗겼던가요, 불란서의 어느 시인처럼 하나밖에 없는 딸을 빼앗아 가시던가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나에게 있는 소유를 다 빼앗기는 길입니다. 많이 빼앗긴 자는 그만큼 그리스도를 진실로 따른 자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 것도 빼앗겨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여러분에게 있는 재능, 지식, 정열, 눈물, 피 그리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빼앗기는 삶이 되십시오. 하늘의 보화와 생명의 면류관은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 히 후회함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는 결단에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자 청년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고 돌아간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머리 속에 상상해 볼 때 비참한 한 인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나사로를 외면하던 그 부자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지금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부자 청년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 오늘 교회 안에 있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오늘 부자 청년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 앞에 새로운 결단으로 신앙을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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