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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 (사 49: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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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내가 점점 더 죄인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그저 막연하게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달아갈수록 점점 더 구체적으로 내가 죄인인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집에서 대청소를 합니다. 전에는 자주 했는데 이제는 하기 싫어서 일년에 몇 번 정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대청소를 하는 날은 온 집안이 난리가 납니다. 집안의 모든 가구를 다 들어내고 청소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소 한번 하는 것이 거의 이사 한번 가는 수준하고 비슷합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깨끗해 보이는 집안도 가구를 다 들어내 놓고 보면 참 더럽습니다. 장롱 밑에도, 피아노 밑에도, 침대 밑에도, 소파 밑에도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들추어내십니다.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들추어내십니다. 그러면 그 밑에 더러운 먼지들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이번에는 경제생활을 들추어내십니다. 그랬더니 거기에도 더러운 먼지들이 쌓여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들을 구석구석 들추어내십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쌓여있는 더러운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낱낱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면 알수록,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나의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가장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사도바울도 역시 같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악된 부분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추어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고치고 싶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고 싶고, 다시는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고 싶고, 다시는 분노하지 않고 온유하고 인내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고 실제로는 여전히 죄를 짓고, 미워하며, 분노하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전혀 앞뒤가 안 맞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이런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너는 멀리서 볼 때는 참 못생겼어,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더 못생겼어.' 그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말이 나와야 됩니까? '그런즉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좇아 살게되었다.' 이렇게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로 인해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해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육신은 죄짓는 일에 가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런즉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 그래야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여전히 '그런즉 또 죄를 짓고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하게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입니다.

저도 한 때는 이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고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엎드리면 기도가 안되곤 했습니다. 기도하겠다고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생각은 세계일주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하는 중에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왔다가 딴전을 피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면서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인정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중간에 하란이라는 곳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책망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너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이번에는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안에 거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아브라함은 그 뜻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역시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야단치신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애굽왕 바로를 혼내 주시고 아브라함을 다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이라는 젊은 여자를 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아브라함이지만 다시 한번 불러주시고 다시 한번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아브라함이 백 세 되던 때에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세상에 대한 염려와 근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채우셨습니다. 모자란 것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들을 바치라.' 는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못난 것과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사랑과 은혜로 덮어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우리의 믿음의 근거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서 물위를 걷다가 자그마한 파도가 이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그만 바다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어서 내 손을 잡고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 없는 대로 빠져 죽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 없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시고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무슨 자격을 갖추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훈련을 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일군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의 못난 모습, 우리의 더러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시고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한 모습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집나간 탕자처럼 불순종하는 못난 모습이지만 거지꼴을 하고서도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절망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고 믿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두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할 계명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는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거나 '바보'라고 욕을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얼마나 욕을 잘하십니까? 말씀대로라면 지옥문이 닳도록 들락날락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교회는 '홍콩 동신 시각 장애인 교회'라고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누가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고 진단서 끊어서 경찰서에 끌고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다 지옥 불에 떨어질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왜 이런 말씀을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드십니까? 거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자기 자신을 깨닫고, 내가 노력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와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나는 여전히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 분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너무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혹한기 훈련이라는 것을 하는데, 두 주일동안 산 속에 들어가서 추위와 싸우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는 절대로 불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냥 자면 얼어죽으니까 얼어붙은 땅을 일 미터쯤 파고 그 속 담요를 깔고 몇 명이 엉켜서 잡니다. 그래야 얼어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주일을 지내고 나면 전부 새까매집니다. 두 주일동안 세수도 안하고 이도 안 닦았으니 전부 다 새까매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엉엉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어떤 어머니가 아들을 부여안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처음 면회를 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니 그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나중에 부대로 돌아와서 그 신병에게 물었습니다. '야, 너의 어머니는 눈도 좋다. 다 새까만데 너를 어떻게 알아보았냐?'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눈에는 제가 한 눈에 보이더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눈에 알아보십니다. 전 세계 인구가 다 한 자리에 모여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한 눈에 구별해 내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중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백 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입니다. 마침내 찾았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아마 잔치를 벌이느라고 소 한 마리는 잡았을 것입니다. 전혀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이 어떻게 합리적입니까?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들보다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합리성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곁에 와 계십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비록 더럽고 추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여러분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곁에 언제나 함께 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이 언제 주신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나 살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도다.' 탄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거역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붙잡아서 톱으로 켜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것을 감히 누가 지우겠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잊으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 믿음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내가 아무리 잘 한 것이 없어도 내가 입을 열어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해 주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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