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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얼굴에 철판을 까신 하나님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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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철판을 까신 하나님 (사 50:4-9)

이 구절은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과 자신의 형편을 그렇게 노래했지만, 사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한 것이었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이 이사야 선지자의 노래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이 고난당하는 종의 노래를 분석하고 강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고난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메시야의 고난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6절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수백년 후에 메시야에게 일어날 일을 묘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사야의 이 시를 읽었던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할 수 없었겠지만, 이것이 메시야에게서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본 후에는 이 시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자신은 600년 후에 오실 메시야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알았을까요? 아니면 몰랐을까요? 선지자들이 장래 일어날 일들을 예언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 될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단지 그 예언의 최초 발설자이신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마이크와 스피커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자기 뜻을 알려주시고, 그래서 선지자가 그 내용을 알고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사야는 이것이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메시야에 대한 그의 이해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은 이 예언의 성취가 시간적으로 많은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라는 것이 커다란 장애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령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오심을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여기서처럼 고난의 종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영광의 왕, 정복자와 심판주로 묘사됩니다. 어떻게 동일한 메시야가 고난의 종임과 동시에 영광의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메시야에 대한 이해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고난의 종으로 메시야가 오셨을 때 영광의 왕이신 메시야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처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시간의 장애 때문입니다. 우리가 멀리 있는 산을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산봉우리 뒤에 또 하나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이것이 하나의 산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서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개의 사건과 그 시간적 간격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두 개의 산봉우리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 있고 하나는 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건을 혼동할 염려가 없지요.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더 많이 그리고 더 가까이 접근해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사야만큼 메시야 예언을 분명하게, 또 많이 언급한 선지자가 없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몇 개 더 있습니다. 모두 메시야 예언이지요. 여자의 몸에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을 말한 것도 이사야입니다. 그래서 만일 자기가 예언하고 노래하는 내용처럼 메시야께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알고 이 노래를 지은 것이라면, 이사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 메시야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고난을 회피하고 편안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이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오늘 우리에게 그 메시야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 이것은 복음의 요구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디모데에게 명합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고 어떤 고난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사업하다가 망해가지고 도망다니며 고난을 받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격입니까? 죽을 병에 걸려 고난을 당해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까?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메시야의 고난을 생각해 봅시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정확하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주먹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는 것, 왕이라고 놀리는 로마의 군인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무리들... 그런데 여러분, 그 순간 우리 주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옷이 찢겨지고 채찍에 살이 터져 피가 흐르는 순간, 마치 극악무도한 죄인과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 그 순간에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시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닙니다. 그 육체적인 고통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 그것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던 이스라엘에 의해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이방인의 손에 넘기워 조롱을 당해야 했다면,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군중이 환호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군중 앞에서 채찍을 맞아야 하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말입니다.

6절이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사실적인 묘사라면, 7절은 고난당하는 메시야의 내적 정신세계입니다. 그렇게 수모와 고통을 당하던 순간에 주님이 어떤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부싯돌과 같이 굳게 하였다... 우리말로 하자면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 치욕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 주님이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했습니까?

부모들은 자식들 먹여살리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수가 많습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더러워서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직장생활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참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자식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부모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들을 서울로 유학보낸 아버지는 못배우고 가난한 게 한이 되어 아들만이라도 훌륭하게 키워보겠다고 논팔고 소팔아서 아들 등록금을 댑니다. 하루는 그 아들이 보고 싶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아들 자취방에 가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슬슬 눈치를 살피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물었습니다. '자기, 저 영감 누구야?' 그러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응, 시골 우리집에서 일하는 머슴 아저씨야.'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얼굴에 철판 깔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아버지보다 체면이 더 중요했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님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깔면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명령을 순종했던가요? 아니면 철판 깔기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척했던가요?

우리가 지난 주 홈그룹에서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속옷을 뺏어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누가 오른편 뺨 맞고 왼편 뺨까지 돌려댈 수 있습니까? 오직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내 등을 맡겼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안 맡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이 세상에서 제 수염을 잡아당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아이린 뿐입니다. 그 외에 누구든지 제 수염을 잡아당기면 제가 그대로 두겠어요? 피하든지 싸우든지, 최소한 저항이라도 할 것입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수염을 뽑는다는 것은 극단적인 모욕행위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가깝게 지내던 암몬 왕이 죽자 신복 몇 명을 조문객으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새로 왕위에 오른 하눈은 다윗이 조문을 핑계삼아 정탐꾼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이 사람들의 수염 절반을 깎아서 보냈습니다. 다윗의 신복들은 그 꼴이 너무 부끄러워 왕에게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사람들의 수염이 다시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래, 수염 뽑아라...' 하시면서 조롱하는 자들의 손에 자기 얼굴을 맡기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하더라도 침 뱉음을 당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치욕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예 마음먹고 그 치욕을 조금도 남김없이 다 당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당하셨던 고난과 그 치욕을 되새겨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모습을 그려보면서 슬퍼하기 위해서입니까? 그 치욕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고난을 당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입니까? 물론 그래야지요. 그것도 모른다면 그리스도인 이전에 인간도 아니지요.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 의미하는 것은 또 다른 특별한 것입니다. 그 고난이 바로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그리스도의 것만으로 묶어두고 그것을 슬퍼하고 그것을 감사하는 한, 우리는 그 고난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얼굴에 철판을 까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얼굴에 철판을 깔면서 그 고난과 수치를 당할 수 있게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이 고난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얼굴에 철판을 까셨다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얼굴에 철판 깔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도 나는 못하겠다. 내 오른편 뺨을 때리는 놈은 오히려 오른편 왼편 양쪽 뺨을 다 때려주어야 속이 시원하겠다. 그렇지요.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우리에게 왼쪽 뺨마져 돌려대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녀들을 위해 부모가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렇게 얼굴에 철판을 까셨겠습니까? 우리가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바보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원수들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처럼, 내 오른편 뺨을 때리며 달려드는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왼편 뺨을 돌려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님의 고난을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저 슬퍼하기 위해 생각하는 고난,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고난주간이라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며 한끼 금식을 한다, 오락을 금한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사실 웃기는 얘기 아닌가요?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고난을 논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주님 가셨던 길을 돌아보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 한 주간뿐만 아니라 1년 365일, 매 순간마다 얼굴에 철판을 까셨던 우리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의 고난을 내 것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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