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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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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의 평화의기도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프란체스코의 결단과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위로받고 사랑받는 것이 필요 없다거나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먼저라고 말할 수도 없겠군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위로는 받기도 하고 하기도 해야 할 터인데, 위로는 가만히 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지요. 심한 슬픔과 고통에 처한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절망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구원의 행위입니다.

며칠 전에 TV 3의 뉴스 진행자 존 캠벨이 택시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고 위로해주었다는 사실이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뉴질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인 존 캠벨은 이 사건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슴에 안고 함께 아파하며 위로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가치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 동시에 또한 위로해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흔히 1-39장을 제1이사야, 40-66장을 제2이사야라고 부를 만큼 성격과 내용이 구별됩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 시대의 선지자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들 중 몇 안 되는 훌륭하고 신실한 왕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기록한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는 매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머지않아 왕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비록 히스기야의 시대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겠지만, 왕국의 멸망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로 이사야서의 전반부가 끝이 납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종말이 다가왔으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 그럴 수 있을까요? 비록 현실은 안전하고 편안할지라도 다가오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위태롭다면, 현실 역시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한 백성처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이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이방인의 노예가 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40장이 시작되면서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큰 잘못을 저질러서 징계를 당하게 되었지만,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한 그 백성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자기 백성의 가슴 속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들을 주신 것이 너무나 놀랍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을 키우면서 매를 때리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할 때가 있잖아요? 아무리 자식이 잘못했다 해도 매를 때려놓고 기분이 좋을 부모가 세상에 있을까요? 매를 맞고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 가슴이 아리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다시 회복되고 우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는 위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슬픔과 고통이 끝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계 21:4). 그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위로이겠지만, 그러한 위로를 약속받은 것도 놀라운 위로가 아닐 수 없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에 힙입어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께서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구원의 근거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위로를 또한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십니다. 우리가 죄의 무거운 짐과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할 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이 위로받은 인생이라면, 이제 위로하는 인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는데, 이 명령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요?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서 하나님의 심장으로 위로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가서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처럼, 위로를 경험한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역할은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칭송받아야 할 사람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 내려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을 피해 다닐 능력이 없어요. 며칠 전 뉴스에 보니까 한 재벌가의 딸이 사랑 때문에 자살을 했더군요.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위로가 필요 없는 인생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악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있고, 가난 때문에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람 잘못 만나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육신의 질병으로 울부짖는 인생, 웬일인지 모를 끝없는 불행 속에 갇혀 사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들을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늘 우리 교회의 사명과 우리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는 하나님의 손길로 쓰임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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