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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 중에서 기쁨을 해산하는 법 (사 3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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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에 어떤 분으로부터 이 메일을 2번이나 받았습니다.
그분은 두 아들을 둔 30대 가장으로 은행에 근무하던 분이었는데 IMF 때 주식투자를 잘못해 빚을 지고 직장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분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빚이었습니다. 97년부터 지금까지 온 가족이 빚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요즘 채권자로부터 빚 독촉이 심해지면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장모님이 시달림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혼을 고려 중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지난 3일간 그분의 메일을 받고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리 하나님 앞에 그분을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이 바로 그런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유다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던 때에 당대의 최대국가인 앗수르 왕 산헤립이 2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견고한 성들을 빼앗고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랍사게라는 장군을 통해서 온갖 조롱을 다 퍼부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라. 나에게 항복하라.'
그때의 절망적인 상황을 히스기야 왕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산모가 해산하지 않으면 산모도 죽고 어린아이도 죽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해산한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러분들이 이런 기가 막힌 상황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이기고 기쁨을 해산할 수 있습니까? 오늘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쁨을 해산하는 몇 가지 원리를 본문을 통해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 존전을 찾아가야 합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히스기야 왕이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화려한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으로 갑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었다는 말은 철저한 회개를 상징하는 행위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찾는 것! 이것은 문제 해결의 기초입니다.
우리에게도 절망적인 상황이 얼마나 많이 찾아옵니까?
얼마 전에는 IMF로 전 나라가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암울한 기억 속에 전 국민은 금 모으기 운동을 하며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들은 술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술 소비량이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반면에 많은 남자들이 성전을 찾았습니다. 교회에 남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만 오면 무엇합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얻게 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이해력과 최선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춤으로 얻어지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업어 인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든든하고, 얼마나 우리를 일으킵니까?
철강왕이자 하나님을 신실하게 붙들었던 카네기의 성공비결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어머니는 항상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God will take care of you)'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절망을 딛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보호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두고 어디서 무엇을 찾습니까?
문제가 생겼거든 교회를 찾고,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만나고, 문제를 계기로 더욱 하나님 안에 있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문제에 관련된 성도들이 하나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히스기야 왕이 굵은 베를 입고 성전으로 가니까 히스기야를 따르던 측근들도 똑같이 굵은 베를 입습니다. 이 원리는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회개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속히 임하게 합니다.
떤 문제를 놓고 남편이 회개하는 자세로 섰는데 아내는 웃고 지냅니다. 반대로 아내는 울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데 남편은 아내 탓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좋은 각오를 하면 같이 보조를 맞춰 주어야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 옆에 어떤 목사님이 새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만나 보니 정말로 깨끗하고 순수하고 훌륭하신 목사님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보험 회사를 다니면서 목사님 일에 전혀 협조하지 않습니다. 사모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목사로 부름을 받았지만 자기는 보험 회사가 좋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겠습니까?
하나됨을 이루기만 한다면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존재가 하나된다는 것은 소중한 일이지만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소중한 일을 위해 서로 십자가를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 문제로 고민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가 부모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지든지
부모가 자녀의 부족한 모습을 이해하려고 스스로를 낮추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다 성숙한 사람이 십자가를 져야 하고, 이에 불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됨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옳습니다. 의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독선과 완고함일 뿐입니다. 의를 위해 자기를 깨뜨릴 수 있어야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 그것에 바로 삶의 의미가 담겨 있고, 감동이 담겨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으면, 감동도 없고, 문제 해결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편한 것을 좋아하지만 한평생 편하게 지내다가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무엇하다 왔느냐고 물으면 '그냥 편하게 지내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고백은 정말 부끄러운 고백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과 희생 속에 진정한 영광이 들어 있게 됩니다. 이제 우리들은 영광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됨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참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 진정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넘칠 것입니다.

3. 셋째,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인도 기도하고 기도 부탁을 해야 합니다.
본문의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전으로 기도하러 가면서 측근 대신들을 이사야에게 보내어 기도를 부탁하게 합니다. 것은 합심기도,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 알아야 할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습보다 기도하는 마음을 더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소중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 하나님은 그 마음을 더욱 살펴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도 제목에 너무 파 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프로 골퍼가 우승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홀에서 마지막 퍼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퍼팅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머리를 숙이고 짤막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퍼팅을 했습니다. 그러자 볼이 반듯하게 홀 컵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결국 우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승을 축하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 아주 가까운 친구가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축하하네. 아까 진지하게 기도하던데, 우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나?'
그러자 그가 대답을 합니다.
'아니, 반대로 기도했네. <하나님! 우승컵 욕심이 없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네.'
이 이야기는 래리 넬슨이라는 유명한 프로 골퍼가 한 이야기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우승하겠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뜻을 이루겠다, 성취하겠다, 한 이름 날리겠다는 마음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받으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앞서는 한 그 사람의 인생은 결코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작품 인생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떼돈 벌려고 하는 마음보다 풍요를 전하려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고, 사업하고, 직장생활하고, 인간관계를 해야 합니다. 돈 버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성과 성실성입니다.
'돈! 돈!'하는 사람은 절대로 돈을 벌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버는 것 같아도 금방 사라지고 행복은 더욱 벌지 못합니다. 사람은 돈만 알면 절대로 돈을 벌지 못합니다.
일 자체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돈이 생기는 것이지 '돈! 돈!'하면 절대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그렇게 조건을 보고 기도하면 기도응답이 막힙니다.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조건적인 사람을 보면 과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어떤 남자가 돈을 잘 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불평이 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의 부자 형제들이 목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내의 얼굴이 환한 보름달이 되었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저는 이 남자가 불쌍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내는 아직 인생에 대해서 한참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인생의 삶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믿는 자녀에게는 그런 모습은 없어야 합니다. 늘날 많은 가정이 깨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주 전에 사랑의 교회 상담 목사로 있었던 목사님과 어떤 분 문제로 통화를 하는데 그 목사님이 가정에 깨지는 이유에 대해서 저에게 한 마디 해 줍니다. 가정이 깨지는 가장 큰 이유는 조건적 사랑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생존을 위해 뛰어가는데 남편은 삶을 그저 취미로 압니다. 남편은 생존을 위해 뛰는데 아내는 삶을 그저 취미로 압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뛰는 당사자는 상대방이 같이 짐을 진다고 생각지 않고 기분에 따라, 조건에 따라 사랑하는 이용거리로 자기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면 생존을 위해서 뛰던 사람은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이혼 소송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특별한 이혼사유도 없습니다. 그저 헤어지고 싶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조건적인 사람이라고 이미 단정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하고 같이 살면 살수록 나는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언제 어디서나 문제는 조건적인 자세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에서도 그런 조건적인 신앙이 문제입니다. 일이 잘되면 자기 혼자 신앙이 있는 것처럼 촐랑거립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찬양해요. 아, 즐거워... 하나님은 좋은 분이야.'
그런데 일이 계속 틀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바뀝니다.
'하나님! 그럴 수가 있어요!'
그렇게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협박까지 하려고 합니다.
'나, 교회에 안나가요. 하나님 안 믿어요. 나 천국에 안 가요.'
전히 하나님을 협박합니다. 그런데 사리에 맞지 않는 협박입니다. 사춘기 아이가 부모님 가슴아프게 하려고 죽겠다는 심리와 똑같습니다. 이제 그렇게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더욱 진득한 사람, 더욱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을 더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앞세우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업이 아무리 소중해도 사업만 쳐다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일 때 그 사업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아무리 소중한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어려움을 만나도 절대로 불평과 원망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 반사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어려움 속에는 분명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을 거야.'
'하나님! 어려운 세대 속에서도 순전함과 정직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오늘 이 시대가 불황이라고 하지만 가장 심각한 불황은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의 불황입니다. 그리고 순수하고 깨끗하게 기도하는 마음의 불황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찌 능력이 부족하시겠습니까? 충분한 능력이 있으셔도 받을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기도의 응답자가 되시고, 신선한 사랑의 향기를 날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4..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측근들이 이사야에게 이르자 이사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먼저 무슨 말을 합니까? 6절 말씀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적진에서 활동하셔서 그들을 돌아가게 할 것이고, 앗수르 왕을 자기 고향 땅에서 칼에 죽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히스기야 왕은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항상 듣고 있어야 할 음성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서 20만명 중에 하룻밤에 18만 5천명을 죽이십니다. 간신히 도망간 산헤립은 자기 신인 니스록의 묘에서 경배하다가 아들들에게 죽습니다. 여기서 무슨 교훈을 얻게 됩니까?
해산할 힘이 없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기쁨을 해산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겁이 나고 무엇이 두렵습니까?
옛날에 화장실 가는 것이 정말 무서울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화장실에 가면서 엄마 아빠를 화장실 문 앞에 있게 하고 바로 앞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때도 있습니다.
비바람에 세차게 몰아치던 때에는 바로 옆에 누가 있어도 두렵습니다. 그리고 악몽을 꾸었을 때에도 엄마 아빠를 만지고 확인해야 합니다. 불안하지만 엄마 아빠 곁에서는 그런 대로 곤히 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폭풍우가 쳐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앞에, 우리 옆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알면 우리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고, 어려움 속에서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조금 안다는 것으로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둡고 한적한 길을 갈 때 그 길을 혼자 가면 두렵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두려움이 많이 감소됩니다.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버지가 손을 잡아 주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꼭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을 꼭 붙잡고
항상 기쁨을 해산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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