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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가지 복된 명령 (사 6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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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행기장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하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활주로로 돌아오게 되고 이륙을 하는 과정에 승객들이 큰 불안에 떨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이륙을 하지 않으면 결코 항로를 날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활주로에서 애를 써도 비행기는 이륙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고도에 진입하고 유유히 항로를 따라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륙을 하지 못하는 비행기의 불안한 모습은 변명할 수 없는 위험한 일입니다.
마치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이륙을 하지 못하고 활주로를 빙빙 도는 비행기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가끔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자꾸만 갈등구조에 빠지고 의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신앙생활의 형식은 다 갖추고 있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영적인 이륙현상이 일어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부조화들을 극복하기 위한 복된 명령을 주고 계십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내재된 조화가 있는 메시지입니다. 경책이 있는가 하면 위로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있는가 하면 소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60장에서 62장은 특히 구약의 신약이라고도 할만큼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복된 명령을 주십니다. 이 명령 안에 살아가면서 신령한 축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절망에서 일어나라

첫번째 주신 명령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은 여러 가지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상황이 있는데 하나는 절망과 위기에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이 때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최대 위기를 맞이한 때입니다. 바벨론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것보다 더 큰 위기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은 전쟁에서 패배하면 말로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버렸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기다려지는 것은 무시무시한 포로생활의 공포뿐입니다.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패배 가운데서 일어나라, 좌절 가운데서 일어나라, 너희들의 그 위기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라는 말씀을 자주 애용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장례행렬을 멈추고 그 청년의 관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죽은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돌무덤에 갇힌 지 나흘 되었던 나사로를 향하여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는 준엄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명령 앞에 나사로는 일어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예수님은 '자는 자여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명령은 제한이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은 그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습니다. 창조주의 명령 앞에는 죽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안 풀리던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 명령을 우리가 듣고 있는 것입니다. 위기와 절망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라

두번째는 지금 당장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현재형입니다. 그리고 계속형입니다. 지금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일어나려고 하다가 주저앉지 말고 일어설 때까지 계속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계속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내 방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왔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 교회에 지나가다가 오는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동전을 주면 감사하다며 돌아갑니다. 그런데 얻어먹는데 이골이 난 사람은 목양실로 바로 옵니다. 아주 정중하게 '당회장 목사님, 제가 때를 굶어서 배가 고파서 목사님께 식사 한 끼 도움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렇게 오면 갈비탕 한 그릇 값을 염두해 두고 갈비탕 한 그릇 값을 줄 테니 받아 가라고 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사람은 또 절을 하면서 '두 그릇 값만 주십시오.' 이 때에는 돈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색을 하면서 '이봐, 지금 한 그릇 값 받아가겠나? 다음에 두 그릇 값 받아가겠나?' 그 사람도 눈치는 있어서 '목사님, 지금 한 그릇 값 주십시오' 합니다. '다음에' 라는 말은 기한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다음에 일어나지 마세요. 다음이라고 다짐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십시오, 지금 당장 일어나십시오.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나쁜 습관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는 것은 행동의 첫 단계입니다. 일어나지 않고는 행동하지 못합니다. 주저앉아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드러누워서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일어나야만 다음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향하여 너무 비전만 걸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소원을 너무 크게 갖지 마십시오. 큰 소원은 늦게 이루어집니다.
제가 오래 전에 어느 기도원에 집회 인도를 갔었는데 헌금이 많이 들어왔는데 소원기도 헌금입니다. 주최측에서 저에게 축복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방법대로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찬양대에서 찬양을 하는 동안에 봉투에 적혀 있는 소원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한 봉투에는 한 달에 삼백만 원의 십일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소원이 적혀있었습니다. 그 때가 91년도쯤 되는 때 십일조 삼백만 원은 고액입니다. 요즘 천만 원의 십일조 보다 더 많은 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성도의 소원이지만 제 속으로 이런 감정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십일조라도 바로 하라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십일조를 십이조로 할 수 있는 믿음이라야 삼백만원의 십일조도 거뜬히 할 수 있지, 지금의 작은 십일조에도 아까워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삼백만 원의 십일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인들은 꿈을 가지는 것은 좋은데 너무 멀리 가지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순종할 것부터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 명령을 먼저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빛을 발하라

빛을 발하라는 명령은 일어나라는 명령과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일어나라는 것은 빛을 발하기 위해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저앉아서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드러누워서는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명령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캄캄한 데서는 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나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을 발하면 내가 여기 서 있구나,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맨홀에 빠진 사나이에 대해서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12월 28일 한 사나이가 송년회에 갔다가 술에 취해서 어느 학교 앞 맨홀에 빠진 것입니다. 술도 취했고 기절을 해 버렸습니다. 맨홀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관리하는 사람이 뚜껑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 밑에서 한참만에 술에서 깨어나 보니 도무지 캄캄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도무지 출구를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8일 하고 3시간, 9일만에 이 사람이 구출되었습니다. 맨홀에서 최고로 오래 갇혀 있었던 사람입니다. 횟수로 2년째입니다. 12월 28일에 갇혔다가 1월 5일에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빛이 없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사는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을 확인하십시오. 내가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을 확인하십시오. 왜 사는지 의미를 날마다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빛은 발광체가 있고 반사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은 1장 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사람에게 비취는 빛'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는 발광체이십니다. 그 예수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는 반사체로서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태양은 발광체이지만 달은 반사체입니다. 빛을 발하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네 빛을 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비취도록 네 자신을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밝히는 전구에 불과합니다. 빛 자체가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우리 자신을 비췰 때에 가치와 존재와 삶의 목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동스런 한 성도의 성공담입니다. 이 분은 사업을 잘 하고 제법 자리도 잡힌 사람인데 친구의 보증문제로 하루아침에 낭패를 당했습니다. 사업장과 집을 처분하여 빚을 청산하고 나니까 변두리 오두막 집 한 채 밖에 안 남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그저 그렇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들 부부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외면했던 새벽기도를 나가에 되고 자기들 운명 속에는 철야기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 알았는데 철야기도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는데 자꾸 이런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한 번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기어코 일어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한 번 보여주게 하옵소서.' 나를 한 번 일으켜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 주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반복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무엇인가 하기는 해야겠다 싶어 자기가 살고 있는 집 한 모퉁이를 골목쪽으로 헐어서 한평 남짓한 공간에 가게를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배추머리 인형이 유행하던 때에 아무리 해도 할 만한 것이 없어서 그 인형가게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이나 교인들 중 아무도 거기에다가 인형가게를 해 가지고 무슨 장사가 될 수 있겠느냐며 좋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혀 안될 것 같았던 인형가게에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 때 배추머리 인형이 유행을 했습니다. 그것이 왜 유행이 되었는지 심리적인 분석이 있습니다. 배추머리 인형은 참 못난 인형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못났습니다. 못난 인형을 보면 내가 아무리 보아도 이 인형보다 잘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긍심이 생긴다는 심리적인 효력이 생긴답니다.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실적 때문에 총판권을 얻어서 거기서 모은 돈과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자리에 가게를 확장했습니다. 몇 년 동안에 이 집사님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공한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집사님에게 별명이 하나 붙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배추머리 인형이 유행한 것은 저 집사님의 기도 덕분이다' 라고 할만큼 이 사람이 영적인 몫도 찾고 잃어버린 재물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이 자꾸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구역을 맡아 봉사하면 구역이 부흥을 합니다. 그를 통하여 불신 친구가 전도를 받아서 믿게 됩니다. 그를 통하여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떨어졌습니까? 실패를 했습니까? 좌절을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야 하고 빛을 발해야 합니다. 망가졌으면 망가진 자기 모습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망가진 자기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건강한 모습으로 사십니까? 그 건강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빛을 가지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의미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빛은 우리 안에 없는 빛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빛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나 자신이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십시오.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복음으로 사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 앞에 보게 하십시오. 내가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감사의 모습을 빛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야만 그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열광적인 연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피아니스트가 친 피아노가 영창인가? 삼익인가?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피아니스트에 대한 욕이고 저주입니다. '야, 저 피아니스트가 친 피아노가 근사하다. 최고다.' 그런 찬사를 한다면 피아니스트에 대한 모독입니다. 피아노를 평하기 위한 연주회가 아니고 피아니스트에게 찬사를 보내야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피아노입니다. 이 피아노의 부속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여야 됩니다. 그 분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 분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의 빛이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바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바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왜 자꾸 피아노에만 집착을 하고 있습니까? 피아니스트를 기쁘게 하는 그런 관객으로서 연주회에 참석을 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주체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빛을 발해야 됩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세번째 명령은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는 것입니다.
4, 5절에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일어나 빛을 발한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일어났습니까? 빛을 발했습니까? 이제는 그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4,5절에 나오는 중요한 동사적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다'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을 보라는 것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한 결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모여 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메시지에서 대단히 의미 깊은 어법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내가 받은 내 은혜를 내가 먼저 보아야 남들도 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내 복을 내가 보아야 남들도 내가 받은 복을 바로 보게 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사면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받은 축복의 세계를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면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부어주신 축복의 세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어느 성도가 주일에도 영업을 하다가 가게문을 닫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일날 장사를 하는 것에 미련을 떨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이들이 신령의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전에 교회를 봉사하지 못하던 몫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평일날 손님들이 몰려와서 사업이 아주 흥왕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일날 문을 닫고 영적인 기쁨도 되찾고 돈도 버는 중에 주일날 예배 드리고 마치면 시간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게문을 열 수 없고 이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노는 것도 한 두 번이고 이 사람이 주일날 오후 예배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가게를 열지 않는 대신 내가 이것을 해야겠구나 했던 것이 전도입니다. 교회에서 전도운동을 할 때마다 아직 이 사람이 한번도 전도를 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 이 남는 시간에 전도를 해야겠다'고 교회 전도지를 가지고 매주마다 주일 오후에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읍시다' 외지에서 놀러온 사람에게까지 무조건 전도지를 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자 사장으로 변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를 통해 믿는 자들이 생겨나는 간증이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유원지에 놀러 왔던 사람들이 전도지를 받고 예수를 믿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일어납시다. 빛을 발합시다. 눈을 들어 사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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