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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하나님 (옵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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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에돔은 아주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마음속에 교만이 들어서 자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나라가 감히 우리 나라를 넘볼 수 있겠느냐”며 대단히 콧대가 높아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하고 괴롭게 할 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지금은 강대국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아주 미약하게 하시고, 약하고 보잘 것 없고 천한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누구한테 멸시를 받게 되었습니까? 2절에 있는 말로 대답해보십시오. “열국.” 하나님께서 미약하게 하시므로 이제는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게 에돔은 전혀 위협적인 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멸시와 천대를 받는 백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 버리시면 사람들에게도 멸시받는 하찮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미천하고 작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면 사람들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존재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연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감히 깔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에돔 나라는 스스로를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미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열국들에게조차도 멸시받는 미약한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 에돔이 그렇게 미약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교만입니다. 교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럼 에돔이 그렇게 교만하게 되었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3절을 보세요. 에돔이 어디에 거한다고 했습니까? “바위 틈에 거하며.” 에돔은 산악지대에 위치합니다. 곳곳에 절벽이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드만은 에돔의 한 도시입니다. 욥의 세 친구 중에 데만에서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였습니다. 드만과 데만은 같은 지역입니다. 엘리바스는 에돔 출신입니다. “에서의 산의 거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에돔은 산악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의 8절에도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구절을 한번 읽어보십시다.

아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비둘기가 바위 틈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에 바위 틈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바위 틈에 거하며.” 지리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높은 곳에 거하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에돔은 산악지대에 자리잡고 있다고 했는데 해발 약 1500m 정도 되는 고지에 살고 있습니다. 도봉산이 해발 몇 m정도가 될까요? 대전에 있는 계룡산은 해발 600m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에돔이 얼마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에돔의 북쪽은 모압과 경계가 됩니다. 세렛 시내라는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북쪽에서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왼쪽은 아라바 광야가 좍 펼쳐져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철의 요새입니다. 동남쪽에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양 사방에서 어떤 나라도 침략할 수 없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3절을 보세요.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지리적인 조건은 천혜적입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서 잘사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돈 좀 많다고 해서 뻐기고 으스대고 남을 멸시하고 하는 마음의 태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에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적인 조건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생각했나 보십시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나라도 나를 땅에 끌어내릴 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에돔은 교만에 찬 나머지 잘못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누가 끌어내린다고 했습니까?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에돔을 끌어내린다고 말씀하십니다. 3절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보십시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지금 에돔의 중심은 교만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이 에돔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 옛날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속였던 것과 같습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이렇게 속인 것처럼 지금 에돔 중심의 교만함이 에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독수리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높이 올라가는 것을 상징합니다. 3절에 어디서부터 시작을 했습니까? 바위 틈에서 시작했습니다.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가서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아”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더 올라가서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더 높이 올라가서 어디까지 가게 되었습니까? “별 사이에”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깃들인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둥지를 틀고 거기에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말입니다. 바위 틈에서, 높은 곳으로, 독수리처럼 더 높이, 별 사이에 깃들인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어떻게 되고 맙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우리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하면 안되요. “주여,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옵소서!” 이러한 자세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옵소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절의 맨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한 구절만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미 6:7­8입니다. 미 6:7­8,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는 “오직 공의를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도 굽게 살지 말고 공의롭게,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바르게 정직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는 “인자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인자하십니까? 예수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어질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도우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는 겸손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사랑해주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앞세우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저는 따라하겠습니다!”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행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시는 복된 하루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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