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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잘못된 연애 (호 0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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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잘못된 연애 (호 2:2-13)

만일 결혼한 어떤 여성이 자기 남편 외에 다른 남자로부터 어떤 물질적인 도움이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남편에 대한 배신이 됩니다. 물론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결혼한 여성들이 직장생활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남편보다 더 수입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남편 외에 다른 남자로부터 물질적인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것은 바른 사랑일 수 없고 그런 물질적인 도움도 바른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음행의 값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주 시끄럽게 시작됩니다. 어느 한 남자가 몇 명의 자식들을 두고서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것은 그 어미의 간음에 대하여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의 어미가 어떻게 할 것인지 따져 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더러운 여자를 벌거벗겨서 쫓아내겠다고 소리지릅니다. 세상에 이런 일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가 어디 있습니까? 한 남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자 더욱 더 소리를 높입니다. ‘글세 말입니다. 이 여자가 어떤 남자와 연애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자가 자기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다른 모든 것을 준다고 하면서 자꾸 더러운 짓을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런 여자는 벌거벗겨서 들판으로 쫓아내어 목말라 죽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여자의 더러운 자식들도 모두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사람들은 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마디에 그들의 안색이 변하고 맙니다. 그것은 이 여자가 연애하던 자가 ‘바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바알신에게 연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한 종교를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의 다른 종교는 모두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앙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이 나의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필요나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만 공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는 이것이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와는 달리 가나안 땅에서 얻는 농산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농사해서 수확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땀을 흘려서 거두었는데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서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가 시험을 쳐서 직장을 얻었고 내가 번 돈을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만약 누가 병들었는데 열심히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쟁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또 실력으로 직장을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것이고 이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 죄를 드러내라.

한 남자가 너무나도 답답해서 자기 자식을 붙들고 소리를 칩니다.

2절,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여기서 ‘쟁론하고 쟁론하라’는 말은 대단히 강조된 표현입니다. 한번 끝까지 따져보라는 뜻입니다. 네 어미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고 그의 비행을 철저하게 다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보통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고, ‘유방’ 또는 ‘가슴’이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밀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모든 숨은 죄들을 너는 다 알고 있을테니까 모두 다 들추어내라는 것입니다.

‘쟁론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죄를 드러내어 책망하고 따지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에 대하여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으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반드시 그 죄를 들추어내서 따져야 합니다.

사실 본문을 보면 바보 같은 한 남자가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자식들에게 ‘네 어미가 지은 모든 죄를 다 들추어내라.’고 따지는 것 같지만, 실상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스스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잘못된 부분들을 다 들추어내어서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대충대충 하는 식으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따지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겉으로 드러나서 누구나 다 아는 문제들만이 아니라 속으로 깊이 감추어져 있고 서로 이런 부분은 피차 건드리지 않기로 묵계가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다 들추어내서 따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아주 잘 아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이렇다.’라고 지적하고 책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쟁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를 보살펴 주고 지켜 준 사회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고요한 호수 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정신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죄가 숨어 있는 고요는 고요가 아니며 하나님을 떠난 상태의 평안은 결코 평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정신나간 사람의 역할을 해서라도 지금 이 거짓된 평안을 깨뜨리고 죄를 들추어내라는 것입니다. 웃고 있는 그들로 하여금 얼굴을 찡그리게 하고,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로 하여금 분노로 화를 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3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어떤 여자에 대하여 이런 표현을 한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하게 하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벌거벗기는데 나던 날처럼 벌거벗기겠다고 합니다. 처음 태어나던 날이 어떻습니까? 이것은 정말 하나의 핏덩어리입니다. 뻘겋고 쪼글쪼글하고 아무 볼품이 없습니다. 여자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은 정말 그에게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없도록 가장 비참하게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겠다고 합니다. 여자가 오아시스 같아야지 광야 같고 마른 땅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그 자식들에 대해서도 4절에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미는 무엇이며 그 자식들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아마도 ‘어미’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현상은 어느 한 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 전체적인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는 것은 어느 한 두 사람이 자기 개인의 욕심 때문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의 신앙이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잘 믿는지 못 믿는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가게 됩니다.

이런 집단적인 배교는 구약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나라는 구약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멸망한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나 히브리서를 받아본 어떤 공동체도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경우에 해당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보는 모습이 바로 이런 현상입니다. 한 두 사람이 시험을 당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은 교회 전체에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못하게 막음으로 교회 전체를 삼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고 신앙이 도매금으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럴 때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어미와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자기를 지켜주고 자기를 사랑해준 바로 그 집단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오늘 마귀가 하는 것은 한 두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를 속이고 그리고 그 전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살 수 있는 길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긍휼을 베푸시지 않을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배교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5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이런 음행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면 이러이러한 것을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면 ‘내 떡’, ‘내 물’, ‘내 양털’, ‘내 삼’, ‘내 기름’, ‘내 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내 것을 가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모두 내 것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내 떡’은 이해가 되는데 ‘내 물’은 또 무엇입니까? 물까지도 내 것이 있어야 하고 네 것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 표현을 보면 너무나도 철없는 한 철부지 여자를 보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하게 컸기 때문에 이제는 모두 내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이런 것을 내 것이 되도록 해 주겠다는 말만 듣고 따라나섭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교회 전체가 변질된 것은 바로 물질적인 욕심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물질적인 욕심입니까? 그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 보니까 너무나도 다른 세계였습니다. 마치 시골 농촌에 살다가 도시에 와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유목생활은 단순합니다. 그들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뻔했습니다. 그들에게 떡이 어디 있으며 물이 어디 있습니까? 삼이 어디 있으며 기름과 술이 어디 있습니까? 특히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이 공동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까 우선 생활 자체가 풍요로웠고 그들이 전에 먹거나 입어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더 이런 것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생활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완전히 내 것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내 떡, 내 물, 내 양털, 내 삼, 내 기름, 내 술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양털 같은 것은 유목민이 더 많이 가지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 유목민들은 가난합니다. 그들은 양털 옷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농사짓는 자들이 가진 것입니다. 요즘 좋은 생선이나 좋은 농산물은 다 도시인들이 먹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들은 눈이 번쩍 뜨인 것입니다. 이렇게 풍요롭고 이렇게 잘 사는 생활이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너무 쓸데없는 고생만 많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나와 사십년동안 떨어지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무나도 풍요롭고 전에 맛보지 못한 안정된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생활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자기들이 농사해서 거두어들이고 장사해서 수익을 올리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그 연애하는 자는 가나안의 신인 바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잘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예전에 가난하지 않았던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었습니까? 우리는 이 사회요 이 세상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이 사회에서 얻지 않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취직되었고, 여기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여기서 내가 기회를 잘 잡았기 때문에 잘 살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연단 때문에 하나님을 더 멀리하게 된 것 같습니다. 6-7절,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외도를 막으셨습니다. 여기서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쌓아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그들이 바알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힘들게 하고 더 궁핍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잘되는 것은 바알의 탓이라고 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바알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이 모든 일이 힘든 이유는 내 모든 불신앙때문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좋아, 지금은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만 기회가 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달아나고 말거야.’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이 바알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 ‘그래 잘 가라. 그리고 또 다시 생각이 나면 내게로 돌아와.’ 이런 식으로 신사적으로 대하셨다면 그들이 덜 기를 쓰고 도망을 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막으시니까 그들은 더 기를 쓰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내가 본 남편에게 돌아가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희망 사항이요 선지자의 희망 사항이지, 실제로 그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돌아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돌아오는 것은 놀랍게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택하셔서 새 이스라엘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우리는 원래 상태와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입니다.

3. 하나님의 보응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이 상황이 변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신을 두고 다른 방법으로 사는 길을 택할 때 그들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

9절,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새로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목민인데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거기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유목 생활 할 때나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지금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만큼은 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던 것이 가나안 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공급되는 차이는 있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이 주는 풍성한 생활과 하나님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 나름대로 다른 원리를 따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도로 빼앗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은 가나안 땅이 주는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선물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나안이라는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하여 무역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광야에서는 광야의 생활방식이 있고 가나안 땅의 정착 사회에는 또 가나안의 문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의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렇게 변화되려고 하지 말고 너희는 그대로 있으면서 오히려 그 사회를 변화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가나안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을 도로 빼앗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것은 그들의 놀라운 생활을 그곳에서도 열매맺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으로 만들어내는 생활은 너무나도 귀한 열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율법의 삶이 가나안 땅에서 더 아름답게 열매맺기를 바라신 것이지, 자기들만 거기서 잘 적응해서 살라고 그곳에 옮기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할 때 말씀대로 살았다면 부요하게 되었을 때에는 더 많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할 때에는 이런 겸손한 모습을 잘 갖출 수 있는데, 부자가 되고 유식하게 되면 여전히 아름답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좀 더 잘 살게 되었을 때 더욱 더 그와 같이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잘 해서 부자가 되었건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더 많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10절 이하에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던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10-12절)

그 모든 절기를 없앤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에 풍성한 감사의 예배가 함께 했던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가나안 땅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평화로운 상태가 자기 소유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누워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이 귀한 은혜와 축복을 거두어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은밀하게 귀고리와 패물을 장식하고 몰래 바알에게 가서 향을 살라 바알을 섬긴 시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다는 이 사실이 오늘 우리 교회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습니까? 갑자기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위와 재산을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된다는 뜻일까요? 오히려 그러면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신 계속 자신의 부를 누리고 거짓스러운 종교생활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참된 은혜를 제거하실 것이며 그들에게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리고 발에 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있기는 한데 이 세상에 대하여 하는 역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교회가 먼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외적인 규모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 안에 유력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 지 그것으로 말해서도 안됩니다. ‘이 도시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원래의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는가?’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 도시사회가 주는 풍요로운 삶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 대한 시험입니다. 과연 이것을 바르게 사용하는지 그리고 가난할 때에는 없어서 남을 돕지 못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풍성하게 해주면 그 말이 핑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시간과 풍성한 물질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달아보고 계십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정말 내 것인 것처럼 생각해서 생활을 바꾸고 더 부자가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서 끊어지고 맙니다. 돈이 있을 때 더 주의해야 하고, 무엇인가 뜻대로 잘 되고 있을 때 더 삼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신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바알은 바로 오늘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자들이 바로 부정한 어미의 자식이요, 그런 방식으로 나가는 교회가 음란한 아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죄많은 이 세상에서 결국 자기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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