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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언약 (호 0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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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IMF라는 사태가 터지기 전에 다른 나라 여러 경제 전문 기관에서는 우리에게 경고의 싸인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관리들 중에서 그런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우리 나라 경제가 무너지게 되어서 수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수많은 실업자들이 거리에 나 앉게 된 후에야 비로소 나라는 청문회를 하니 다른 나라에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니 난리를 피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이것은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망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잘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고집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확신에 대하여 여러번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기기 전까지는 실제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 모든 백성들은 죽든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절망과 두려움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1. 광야에서의 설득

14절,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이 말씀을 보면 호세아가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부정한 아내 고멜을 아무도 없는 들판으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설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장면은 이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던 모든 가나안의 혜택을 다 잃어버리고 다시 다른 나라의 포로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광야’라는 것은 실제적인 광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상태를 의미합니다.

‘개유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꾄다’ 또는 ‘유혹한다’는 뜻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나갈 때 일단 그들을 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가 그들이 완전히 망한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설득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된 믿음은 너무나도 그 껍질이 단단해서 현재 상태로는 도저히 고쳐질 수 없고 결국 그들은 갈 때까지 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로는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마음속에 확신이 있고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어버리고 최종적으로 갈 때까지 다 간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이며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멸로 가기까지 그들을 놓지 않았던 잘못된 신앙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여호와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바알로서의 하나님이었습니다.

16-1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다시는 하나님을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여호와와 바알, 그리고 남편과 정부(情夫)의 대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남편처럼 생각했어야 하는데 정부처럼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정부와 남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정부가 더 잘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여자를 이용하는 자이며 여자도 정부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책임이 없는 사이요 진실한 사이가 아닙니다. 단지 욕망에 따라 결합한 관계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은 참으로 신실해야 하며 신뢰관계라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의 정욕에 따라서 얼마든지 대상을 바꿀 수 있고, 자기 필요에 따라 순종할 수도 있고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알로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한 것은 신실한 부부 관계같은 헌신된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헌신하시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된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정부를 대하듯이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맹점입니다. 우리는 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과연 신실한 부부 사이의 관계처럼 정직과 헌신의 관계인지 아니면 단지 나의 유익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인지의 분별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무너지기까지는 깨닫기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것입니다.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역겨워하시며 결국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의 맹점을 알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축복을 잃어버리는 것은 짧은 관점으로는 분명히 엄청난 손실이고 비극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면 이것은 결코 비극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마치 남편이 속상한 아내를 달래고 위로하듯이 그들을 달래 주시고 위로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한 신앙의 역사를 우리 앞에 보여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들도 그런 경향이 있기 땜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께 대한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면서 나에게 필요한 것만 받아내려는 거짓된 신앙도 참 신앙인 것처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한 역사를 보여 주시면서 참으로 헌신되지 않은 이런 이기적인 신앙은 결과가 이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생길 때는 언제였습니까? 완전히 망했을 때입니다. 더 이상 아무런 인간적인 모략이나 꾀가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거친 들’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는 도무지 ‘거친 들’이 아니면 신앙훈련이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조금이라도 할 일이 있고 인간적인 방법이 있으면 바로 바알의 종교로 달려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리에서 바알의 정욕적인 거짓 신앙이 씻겨지는데는 너무나도 오랜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자신들에게는 자랑하거나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그들은 들판에 버려진 상태로 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굳이 그렇게 된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되어 간 곳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위로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15절,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준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장소적인 이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가나안 땅이 되도록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든지 그들이 있는 그곳에서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때에 반드시 거기가 약속의 땅이며 가나안 땅이 된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가장 귀한 나무가 포도나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있을 때 그들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포도원을 준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종노릇하면서 살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귀에 들리고 주님께서 말씀으로 위로하실 때에는 거기가 바로 우리의 가나안 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기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가나안의 모든 풍성한 삶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으로 이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곳이 바로 우리의 포도원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리니” ‘아골’이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가장 처음으로 놀랐던 곳이 바로 아이성의 패배인데 거기서 그들은 너무나도 절망했고 낙심했으며 모든 소망을 다 잃었습니다. 나중에 그 패배의 원인이 아간의 욕심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좌우간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패배했을 때 너무나도 두려워했고 절망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너무 나쁘게 나오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거기가 바로 아골 골짜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의 문이 열리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절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은 소망의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하는 이유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보시기 때문에 길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거기에 절대적인 절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새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금방 죽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새 사람처럼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가장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장가를 들겠다는 것입니다. 19-20절, “내가 네가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들겠다’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하십니다. 이처럼 장가들겠다는 말을 세 번씩이나 하시는 것은 이 말 자체가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가드신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과 진짜 결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는 더 이상 죄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합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 위에 임하실 때 그리고 그 영이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임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장가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런 연합에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선 첫째로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다시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가 쪼개어지지 않습니다. 깨어진 모세의 두 돌비와는 달리 이 새로운 언약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믿음에 서 있는 자들을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복음의 시대에는 더욱 더 견고하게 자기 백성들과 연합하셔서 절대로 이 관계가 끊어지거나 파괴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한번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겼다면 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버림받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멸망의 자식이었던 사람뿐입니다.

두 번째로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이 심겨지게 됩니다. ‘의와 공변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은총과 긍휼히 여김’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성품들을 결혼선물로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심기워진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들입니다.

‘의와 공변됨’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움과 공평함’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실제로 의롭게 하시고 또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십니다. 죄와 하나님은 상극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유해서는 안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죄이고 자기가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앉는 것이 죄이고 자기가 생각해서는 안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 물건이 아닌 것을 탐내서 가지면 그 물건의 소유자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소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서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의롭게 살게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드십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는 한 번의 은혜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악한 죄성이 있어서 자꾸자꾸 악한 것을 생각하고 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메마르면 우리는 금방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새롭게 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자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새로워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 기분이 나빴으면 오늘도 기분 나쁜 상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까지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갑자기 좋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좋아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새롭습니다. 늘 성령으로 새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일일이 갚으시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일시적으로 닫히지만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는 늘 새로워집니다.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더 이상 과거의 죄로 인하여 고통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이 우리의 재산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이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없으면 그의 신앙은 파산한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로는 더 깊이 깊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앙입니다. 20절을 보면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진실하게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아무 것도 감추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독점적으로 온전히 나타내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누릴 축복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미국의 이민국에는 가짜 부부가 시민권을 얻기 위하여 진짜 부부인 것처럼 해서 시험을 칩니다.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부모님의 이름은 무엇이며 서로의 특징이 무엇인지 열심히 외워서 시험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짜이지요. 진짜 부부는 그런 것을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새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외워서 시험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은 금방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직감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귀한 성품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산다는 것,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성품은 참으로 악하고 고약합니다. 못된 근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악하고 더러운 욕망이 있습니다. 이 더러운 본성을 누르고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를 지배할 수 있으려면 자꾸 이 거룩한 성품을 사용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옛날의 기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옛날의 기질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나’다운 그것이 바로 나의 본성입니다. 그것이 이기면 안됩니다. 그것이 사용되면 사용될수록 우리의 재산은 마이너스(-)가 됩니다. 자꾸 하나님의 기질을 사용하십시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의 순자산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새 언약의 범위

하나님께서 새 언약의 백성을 택하실 때 그 언약의 범위는 모든 백성들과 모든 공중의 새와 짐승과 땅의 곤충까지 포함되는 놀라운 것이 될 것입니다.

23절,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우선 새 언약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들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원래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면서 이 언약에 포함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소망이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있다는 뜻입니다.

이 새로운 언약의 범위는 옛 노아의 언약을 생각하게 합니다. 18절,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며 저주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범죄한 후 피조물 전체와 인간의 관계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인간을 원수되게 하셨습니다. 사실 피조계를 동원하여 인간들을 공격하게 하셨더라면 애굽의 바로처럼 망했을 것입니다. 설사 공격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피차 이 사실을 느끼고 있었고 피조계는 애매한 고통을 숱하게 당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나무들이 다 베어지고 불탈 때에는 새나 들짐승들은 있을 곳이 없어졌습니다.

옛날부터 들짐승이나 새들에게 가장 심한 피해를 주는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전쟁만 일어나면 숲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들짐승이나 새들과 언약하여 다시는 그들의 거처를 파괴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말씀은 다시는 전쟁이 없게 하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즉 다시는 인간 안에 진정한 의미의 적대감이 없어지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서로 원수된 미움과 증오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평화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미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면 사람의 미움이나 의심은 그렇게 결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엽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실을 감추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알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반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한 개방적이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자기 안에 하나님의 용서가 임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죄와 상처가 치유되었기 때문에 굳이 감추고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개방적이 됩니다. 아직도 자기의 것을 많이 감추고 남의 것을 알려고 하는 분이 있으면 ‘아, 나는 아직 죄 용서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십시요.

새 언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1-2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지금까지 가나안 땅은 아무리 울부짖어도 응답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늘도 반응이 없고 땅도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이나 포도나무나 감람나무등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르엘 평지는 황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습니까? 그들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하늘도 응답합니다. 땅도 반응이 있습니다. 곡식도 포도주도 기름도 대답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십니다. 마치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늘이 응답했던 것처럼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안에서 구할 때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대답하십니다.

새 언약의 범위는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 신앙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 전체를 치료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병든 육체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격을 치료하고 습관을 치료하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치료하며 직업을 치료하며 가정을 치료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주적인 치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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