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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구속 (호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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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에는 십대 소녀들의 ‘원족’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족’이라는 것은 십대 소녀들이 컴퓨터 통신으로 만난 사람들과 즉석에서 매춘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십대 소녀들과 성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 중에는 중년 사장들도 있고 심지어는 교직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들이 가출하는 이유로는 가정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부모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또는 용돈이 적어서 혹은 마음대로 즐기고 싶어서 등등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행위를 하는 여학생들에 대하여 걱정하는 이유는 그들의 장래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 당장은 돈도 벌고 재미도 보는 지 모르겠지만 불과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의 삶은 가장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매춘 행위를 하다가 더러운 사기꾼에서 걸려서 완전히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 중에도 거의 쓸모가 없어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폐인이 되어 있는 고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것이 장차 이스라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인기가 있는 것 같고 수입이 좋은 것 같지만 어느 한 순간에 사기꾼 남자에게 걸려들어서 모든 것 다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가 되어 있는 모습이 장차 불과 일이십년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보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가나안 땅의 행복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돈은 정말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참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돈으로 자식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아이 자신이 바른 인격으로 자라기를 바라지요.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돈이 결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가진 것이 다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이며 신뢰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서로에게는 귀중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하고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뢰 관계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가나안 땅이 주는 풍요로운 생활에 마음이 완전히 빼앗겨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로운 생활을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

만약 우리가 앞으로 십년 후 혹은 이십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부모님의 말씀은 죽어라고 듣지 않고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자신의 십년 후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시다. 자기가 악당 두목이 되어서 경찰에 쫓기다가 비참하게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이나 혹은 거지가 되어서 추운 겨울날 길가에 자다가 얼어죽는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아마 그 아이는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시는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어떤 바람둥이를 따라 집을 가출하여 지금 비참하게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고멜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1절 하반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그 동안에 시간이 많이 흘러서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사기꾼이었고 전문적인 인신 매매꾼이었습니다. 고멜은 그 사기꾼에서 걸려들어서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바로 그 고멜을 다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를 따라서 도망을 쳤다가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 이 여자를 데리고 옵니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옛날의 고멜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랐고 얼굴은 형편없이 되어 있습니다. 옛날의 그 오만한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이 가난과 질병으로 찌들대로 찌든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으로의 모습이었습니다.

1절 상반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다시 데려와야 하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지금처럼 아무 말도 듣지도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하는 고집 센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완전히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건포도떡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리는 축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건포도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주신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맛이 거저 그랬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까 곡식이 있었고 포도가 있었습니다. 건포도를 떡 안에 넣은 건포도떡은 가나안 땅의 행복의 대명사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 땅에 있든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까 세상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여기의 생활은 너무나도 안정되어 있었고 모든 것이 풍성했습니다. 더우기 광야처럼 저절로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다 가나안 땅에서 생겼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지어야만 했고 자기들의 머리를 써서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에는 가나안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 살다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가나안이 주는 편안한 삶에 길 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없이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은 하나님이 없으면 당장 만나가 내리지 않고 물을 구할 수 없었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계시든지 안계시든지 상관없었습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혔습니다. 때가 되면 비가 왔습니다. 신앙이 좋든지 안좋든지 상관없었고 오히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이 더 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닌 가나안 땅에서 정상적으로 노력하고 활동해서 얻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축복을 잃지 않기 위하여 더욱 더 가나안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의 축복을 잃지 않기 위하여 더욱 더 가나안 식으로 살고 열심히 가나안의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신도 섬겼고 가나안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이 건포도 떡을 즐겼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은 건포도떡을 자기들이 가나안 신들을 잘 섬긴 댓가로 가나안 신들이 내린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가 어떤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까? 그것은 비참한 노예 고멜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멜은 음행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음행을 할 때마다 남자가 무엇인가 선물을 하나씩 갖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행의 값이었습니다. 그는 아예 그 사람을 따라가면 많은 선물을 줄 것 같아서 어느 날 완전히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사기꾼이었습니다. 고멜을 잡아 두들겨 패고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떨어져서 살고 있었습니다. 노예가 되어서 고생할대로 고생한 고멜의 모습!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도우심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이 탐나서, 무엇인가 더 얻기 위하여 그리고 더 자유스럽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노예 생활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한때 서울에서 잘 사는 집 아이들을 ‘오렌지 족’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방학이 되면 압구정동에 나타나서 영어를 지끌여대면서 돈을 마구 뿌리는 젊은 세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사람들의 부의 상징은 대형 아파트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가용이고 백화점에서 비싼 물건을 마음대로 쇼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집에서 살아서는 안되고 항상 팔공산에서 텐트만 치고 살아야 신앙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냐 아니면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하고 부요한 삶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목표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데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남들에게 빠지지 않고 파출부를 부리면서 전혀 어려움없이 사는 데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풍요로운 삶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좀 잘 살게 되면 마음이 급해져서 더욱 더 세상으로 달려 갑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신앙을 알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해서 시험에 더 잘 붙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좋다고 해서 장사가 더 잘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좋다고 해서 승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살아도 그들은 비참한 죄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비단 옷을 걸치고 있다 하여도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두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게 살 때나 부요하게 살 때나 그것이 하등 중요한 것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가난할 때에도 하나님이 중요하고 부요할 때에도 하나님 만 중요한 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보다 더 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것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셔서 가나안 땅 같은 데는 절대로 들어오시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도 계셨고 그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것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현대 사회 가운데 계시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부하고 몸 바쳐 일하고 양심을 팔아서 일한 댓가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신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보다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시고,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먼저 내가 바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생활이 풍부해도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대한 나의 자세를 바꾸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눈앞에 보이는 것의 가치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은총에 불과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다.’

이렇게 해서 물질이나 평안한 생활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목말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리면 않으면 결국 영혼의 사기꾼인 마귀에게 속아서 가장 소중한 신앙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 사람들은 사는 원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이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의 게임법칙에 따라서 삽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이 주신만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물질에 마음이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신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할 때 그의 결국은 비참한 고멜처럼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겨도 좋고 건포도떡을 바알신을 잘 믿은 댓가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생활을 즐겨도 좋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다른 신을 따라가거나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지금 죄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워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은 포기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온 세상이 다 알 수 있도록 그들을 버리셔서 나라가 망하게 하시고 모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근본 계획 자체를 포기하신 것은 아니십니다. 언젠가는 다시 그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을 되찾아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무조건성과 조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무조건성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으려면 그것을 받을만한 자리에 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축복을 주시는데 엉뚱한 데 서서 왜 축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으로 구호품을 준다고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공짜로 구호품을 준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위치에 가야 그것을 받을 수 있지 엉뚱한 시간에 다른 데 가 있으면서 왜 구호품을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은혜를 받기 원하는 자는 은혜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부흥이 필요하다는 것은 교회가 오래 침체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은 사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엉뚱한 곳으로 떠내려 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고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때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핀 후에 그것을 제거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른 위치에 있지 않으면서 아무리 부흥을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의무적으로 사랑하시고 의무적으로 은혜를 주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시고 은혜받을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이며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을 따라다니시면서 사정 사정해서 억지로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은혜 받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을 갈 데까지 가게 하셔서 바닥에 내리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을 다 빼앗으시고 그들을 가난하고 비참하게 하셔서 결국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시고 그가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감격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만을 꺾기 위하여 우리를 이 세상에서 실패하도록 하시고 우리의 모든 자랑을 빼앗아 가시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으로 훌륭한 부인들 중에서 갑자기 남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이들을 혼자서 키우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 하신 분들을 봅니다. 물론 본인들에게는 엄청난 불행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광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과 화려한 경력 때문에 쩔쩔 매시면서 구원하셔야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구원으로 찬양 받기 원하시며 영광을 거두시기 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감사할 줄도 모르고 감격할 줄도 모르는 자는 구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그를 비참하게 하시고 그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시며,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 감격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도 ‘오냐 오냐’하시고 또 건포도떡을 바알의 선물이라고 하면서 좋아해도 ‘좋다 좋다’하시는 눈먼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비참한 자리로 내동댕이치십니다. 그들의 모든 재물과 땅을 다른 나라에 다 빼앗기게 하시고 그들을 비참한 노예들로 만들어서 자신들의 모습을 똑똑히 보도록 하십니다. 그 후에 그들을 구원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구원에 기뻐하도록 하시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니다.

요즘 우리들의 상태가 불만이 많고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나도 보잘 것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교만해져 있다면 조심하십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반드시 비참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하십니다.

3. 고멜을 구속함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하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했습니다.

2절,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몸값을 주고 다시 사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고멜에게 가서 아무리 입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이제 고멜은 호세아에게 돌아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어 있고 몸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의 몸값을 지불했습니다. 그 값은 그런대로 괜찮은 노예 값인 셈입니다. 사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을 쳐서 비참한 폐인이 되어 있는 고멜에게 지불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돈이지요.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고멜을 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멜을 사서 다른 데에 팔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샀다는 뜻입니다. 이제 고멜은 호세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멜은 호세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구원이 가지는 다양한 표현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적인 개념입니다. 죄 때문에 제물의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너무나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흘려져야 합니다. 한번 피가 흘려지고 나면 우리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개념은 경제적인 개념입니다. 경제적인 개념은 노예된 사람의 몸값을 주고 다시 사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몸값을 주었기 때문에 다시는 옛날 주인이 상관할 수 없습니다. 옛날 주인과는 관계가 끝났고 이제는 오직 새 주인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경제적인 측면은 우리 구원이 가지는 확실성을 보장해 줍니다. 비싼 댓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위하여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지불했기 때문에 고멜은 다시 노예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멜의 상태나 기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고멜은 다시 옛 노예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구속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아주 비싼 댓가가 지불되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비싼 댓가가 지불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바쳐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피가 아닙니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피입니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려면 이만한 댓가가 다시 지불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나 그의 아들들의 피를 다 합쳐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어떤 악한 자가 우리에게 덤벼들어서 우리를 억압하거나 이런 저런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값으로 해방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개념은 양자입양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사회적인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누더기를 벗기고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을 신겼습니다. 이것은 그가 완전한 아들의 지위와 권리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비싼 몸값으로 해방된 자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권리를 얻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에 대하여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은 이 세상의 아들들과 함께 사이좋게 나누어 써야 합니다. 그 대신에 하늘의 모든 신령한 은혜는 얼마든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모든 은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가락에 하나님의 반지가 끼워져 있고 우리의 발에 우리의 귄리를 나타내는 신이 신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것을 구하지 말고 하늘 것을 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 것은 아무리 구해도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구하십시요.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구원의 경제적인 개념입니다. 고멜은 다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댓가를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노예 주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호세아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호세아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됩니다.

4. 시간이 필요하다.

호세아는 돌아오는 길에 고멜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절,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바로 뜨겁게 사랑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좀 시간을 가지고 조용히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한번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호세아를 바로 알고 호세아와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멜은 너무나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중단하고 ‘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호세아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4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너무나도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왕 때문에 바빴고 지도자들 때문에 바빴습니다. 회의하느라고 바빴고 정책을 세운다고 바빴습니다. 수많은 종교의식 때문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조용히 지내도록 하십니다.

이제는 왕도 없습니다. 다른 장관들도 없습니다. 제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포로로 잡혀갔고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상과 에봇과 드라빔이라고 하는 것들은 점치는 기구들이었습니다. 변질된 종교행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믿음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예가 되어서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없는 상태에서 지내다 보니까 발견하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왕들이 있고 장관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참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 너무나도 바쁘게 종교생활을 했고 참된 지도자가 아닌 자들을 너무나도 많이 따라다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에게 참 하나님이 필요하고 참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5절,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참 하나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말씀이 없는 신앙 생활을 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바른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생활이 너무 바쁜 것은 본질을 잃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생활하다 보면 정신이 없습니다. 무슨 모임이니 무슨 봉사니 하면서 정신없이 뛰어 다닙니다. 마치 그런 행위들이 없으면 신앙이 없는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지 생각해 봅시다. 아니 내가 죽었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지 그것부터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상당한 기간동안 아무 일없이 좀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병원에 입원해서 그런 시간을 가집니다. 어떤 분은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한 후에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그런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는 일거리가 있으면 일을 좇아 뛰어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상태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이 복잡한 봉사생활 가운데 참 하나님은 안계셨구나. 나는 나의 신앙을 이끌어 줄 참 목자가 필요했구나’라고 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매일 신앙을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망할 때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많은 종교행사나 봉사로 자신의 모습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한 노예 생활입니다. 그렇게 비참하게 되기 전에 먼저 말씀으로 깨달읍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다.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건강을 잃고 승진할 기회를 잃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겸손하게 되었다면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보다 더 부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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