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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인애 (호 0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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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인애(호 4:1-10)

만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땅 위에 어떤 사람이 세(貰)들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전혀 세도 내지 않고 또 지킬 의무도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소송을 해서 강제로 내어 쫓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시는 내용입니다.

4장 처음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쟁변한다’고 하는 것은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거민들’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이 땅을 점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들이 해야 할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 그들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내리신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그 문제를 법정에 끌고 가서 그들의 불법성을 밝히신 후에 그들을 이 땅에서 영구적으로 추방하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무엇이며, 그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해야 할 특권이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송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소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대개 땅 주인이 세든 사람들을 고소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세를 제대로 내지 않거나 그들이 빌린 땅을 크게 훼손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소하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절하-2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불만을 가지고 계신 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실과 인애가 없다고 불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인애였습니다.

여기서 진실과 인애는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관계 보다는 참과 거짓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것을 인정하면 자기에게 손해가 돌아온다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더욱이 ‘인애’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중 하나입니다. 다른 말은 몰라도 ‘인애’라는 말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헤쎄드’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그냥 ‘사랑’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도 강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책임지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예 중에서 여리고를 정탐하던 두 이스라엘 사람이 여리고 사람들에게 발각이 됩니다. 그때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이 두 사람을 숨겨주고 수색하는 자들을 따돌립니다. 그리고 나서 이 두 사람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한 것처럼 당신들도 나의 우리가 가족을 선대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때 ‘선대’라는 말이 바로 이 인애라는 단어입니다. 나에게 손해가 돌아오는 줄 알고 목숨을 걸고 상대방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인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진실이었습니다. 좀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것을 옳다 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 하는 정직을 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번 약속한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책임을 지는 신실한 사랑을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두가지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없어야 할 것들이 이스라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리담은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평범한 질그릇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보배가 담겨져 있는 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자꾸 다른 세상 나라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 나라의 영광은 강한 군사력에 있고 넓은 영토에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영광은 그들 안에 얼마나 진리가 이기고 있으며 얼마나 서로의 관계가 신실하느냐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특별한 나라였습니다. 원래 사람에게는 거짓된 것이 정상입니다. 굳이 남을 해치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거짓말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웬지 진실하려고 하면 온몸이 근지러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진실하려면 진리가 그런 거짓된 본성을 이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가 이기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여기 저기서 진실하지 못하게 하려고 해도 정말 진실한 관계에 있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그런 것을 이겨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부러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책임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은 다 좋다고 하지만 나중에 이것을 결국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하면 슬슬 다 빠져버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인애하려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실과 인애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아무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고 결국은 억울하게 고통을 받은 사람이 있어도 아무도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들입니다. 원래 자기들이 가졌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많은 것을 주시면서 오지 이것만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는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하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더 가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기 것으로 만족하지 남의 것을 가지려고 더 욕심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책임지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자가 있으면 그냥 있지 말고 좀 손해를 보라는 말입니다. 나의 것을 손해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좀 책임을 져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내어야 할 세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은 깨어지거나 물이 새서는 안됩니다. 온전한 그릇이 무엇입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조건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평가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건물이 얼마나 웅장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심히 모이고 있는가?’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서로에게 정직하며 책임지는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는디 그리고 서로에 대하여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인지 그것을 보십니다.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바로 이 부분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많은 군중들이 모였다가 흩어질 뿐입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모르는 것이 낫고 서로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어떻습니까?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전혀 할 필요도 없는데 자기가 어떤 죌르 지었는지 다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고소를 받은 이유입니다.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2절,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저주와 사위’는 여기서 저주는 욕입니다. 그리고 사위는 사기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땅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웃의 가난한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해서 멀리 노예로 팔려갔다가 돌아오면 이웃이 이 사실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땅은 이미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으며, 그 사람은 이 땅을 절대로 내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자입니다. 부자는 이웃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증거를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뇌물을 받고 저주까지 하면서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증거의 신빙성을 위하여 저주까지 해야 하는데, 자기가 저주를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어디에 갔습니까?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양심은 죽여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기에게 득(得)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거래에 떨어지는 것이 있지, 깨끗한 거래는 득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투절’이라는 것은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사용해서 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살인과 간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나운지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속 보복적인 살인이 일어납니다. 이쪽에서 저쪽을 죽이면 저쪽에서도 이쪽을 죽입니다. 그래서 결국 계속 피를 흘리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내가 중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며 그들도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두가 단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삶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고 싶고 다 자기의 것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만 보면 안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으며, 그들에게는 다 소중한 남편이요 아내입니다. 감히 내 욕심을 위하여 그들의 행복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나처럼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한번 욕심을 부리면 그 욕심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을 탐욕스럽게 만들어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한쪽에는 진실과 인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저주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과 복수의 복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시내로 비유하면 상류가 진실과 인애라면 하류는 저주와 사위와 투절과 간음과 살인과 복수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가만히 두면 저절로 그런 나쁜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특별히 나빠지려고 해서 그렇게 나빠진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으니까 아래로 떠내려가서 결국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죄를 진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고 사랑을 위하여 특별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차가지로 오늘 우리도 진리를 특별히 사랑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세상 욕심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악한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나의 생각과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거스려 올라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똑같이 범하게 됩니다.

2. 이스라엘의 특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다른 데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1절 끝에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는 이 부분을 더 확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 버리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자기 자신을 이들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추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어 주셔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한 신학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직접 하나님을 겪어서 아는 것이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성을 가지고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 그 사람에 대하여 하는 것과 그 사람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나는 그 사람을 알지만 그 사람은 나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설사 서로 안다고 하더라도 친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이름은 알고 있고 얼굴은 알지만 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도 나를 아십니다. 그런데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서로 깊이 사귀어 가는 것입니다. 아마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만나면 상당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누구시더라’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님을 보자 말자 바로 알아보고 기뻐하면서 ‘주여 매일 주님과 동행을 했는데 이제 눈으로 보니까 너무나도 좋습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은 부귀와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알아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가까이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버리고 객관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가 존귀해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내 영혼이 영화로워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이 많아야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내면까지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은 모두 죄가 심어놓은 자존심입니다. 남보다 못하기 때문에 더 치장하고, 남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하는 자존심입니다. 이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잃게 만들고 더 거짓되게 만들며 더 복수심에 불타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참된 우리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도 나를 가까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임할 때 우리 마음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 우리에게 임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우리는 그 말씀만큼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이 가지는 거룩함처럼 거룩하게 되며, 그 말씀이 가지는 정결함을 입게 되고, 그 말씀처럼 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게 된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힘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 놀라운 특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알아봐야 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을 듣고 전하며 또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면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먹고 살아야 합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 존전이 우리의 위치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그곳이 우리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것을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택하면 다른 많은 부분은 손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력을 다 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택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손해보고 잃어버리며 또 그런 취급당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택하면 하나님께 가까운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6절 끝“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기억력이 너무나 나빠서 율법을 잊어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들을 하나님께 잡아매는 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끈을 슬그머니 놓아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제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구속되기 싫어서 스스로 해방을 선언하고 프리랜서(free lancer)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단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드시 파괴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미련하게 되어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 올 때 그들은 모든 축복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위치가 바로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경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상태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3절,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의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은 그들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노력했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잘 한다고 해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못한다고 해서 망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하시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느냐 안도우시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진실과 인애가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형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잘못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는데 고통을 받기는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물고기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철저하게 거두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공중의 새나 들짐승들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그 땅이 철저하게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나 들짐승들이 숨는 곳이 있어야 사람들도 피할 곳이 있을텐데 숲이 없어지면 사람은 피할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4절,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들은 바로 잡으려고 하면 거기에 불복종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툰다’는 말도 이주 중요한 히브리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고를 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반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사람들도 제사장이 충고하면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일단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는 받아 들일 때 그들은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도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하면서 대어 들면 그때에는 제사장과 다투는 자가 되며 제사장이 죄 용서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어야 요서가 될텐데 제사장과 싸우면 치료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신약 시대에 이것을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을 훼방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깨닫게 회개하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성령을 훼방하면 고칠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있기를 원치 않았을 때 그들은 안팎이 다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거칠대로 거칠어져 있었고 땅도 그만큼 황폐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거칠어지고 황폐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집에 돈이 많고 생활이 편하다고 해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성격이 거칠어지고 있다면 이것은 무서운 경고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내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입니다.

4. 선지자와 제사장의 잘못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단순한 무지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거짓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불신앙에 용기를 주고 더욱 더 자신있게 하나님을 떠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이었습니다.

5절,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고 말씀하고, 8절에는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의 기능은 주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율법의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그들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깨우침으로 바른 방향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선지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기차로 말하면 모두 가는 철로가 있는데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지금 그런 식으로 살면 결국 어디가 정착역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벡성들의 죄를 예방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거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설교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벙어리 개와 같았습니다. 개가 짖을 때는 짖어야 하는데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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