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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형편 (호 0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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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형편(호 4:11-19)

최근 우리 사회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문제 중 하나가 초등학교에 세웠던 단군상이 목이 잘린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군상을 우상으로 봅니다. 그래서 단군상이 학교에 세워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며 이런 것은 기드온이 했던 것처럼 밤에 몰래 가서라도 목을 잘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단군상을 우상이 아니라 세종 대왕처럼 민족 정신의 함양이며 홍익인간의 사상을 나타내는 순수한 민족주의 정신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단군상의 목을 자른 것을 경솔한 종교적인 열광주의의 소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민족주의라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요즘은 전 세계가 다시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일본은 다시 일장기를 만들고 일본 국가를 부르며 내각 각료들이 일제히 일본 신사를 방문해서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질새라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상 건립이 여기 저기에서 추진되다가 결국 초등학교에 세운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는 과거에 불교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문화재라는 것이 거의 대개 절이라든지 불교와 관계되는 것들입니다. 한국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불교와 관계되는 문헌이나 혹은 무속적인 풍습에 대하여 깊이 연구를 해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해서는 안되는 우상 숭배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것을 보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전통 문화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우상 숭배인 것 같은 것이 매우 많습니다.

사실 제사 제도 하나만 보더라도 어떻게 보면 조상의 덕을 기리므로 온 가족이 하나되게 하는 미풍양속인가 하면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죽은 조상에게 돌리는 조상 숭배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 보는 모든 것을 다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우리 나라처럼 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곳이 잎이 무성한 나무를 보면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나무에 빌면 어떤 축복을 받을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이 나무에 복을 빌면 큰복을 받게 된다고 하면 특별한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런 말에 귀가 솔깃하게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그 나무는 무엇입니까? 그냥 하나의 나무일뿐입니다. 신기한 것도 아니고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나무 한 그루를 크게 자라도록 만드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졌느냐 하는데 따라서 나무 한 그루나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전적으로 다른 눈으로 보게 되어 있고 다른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동화사의 부처를 구경하러 간다고 해서 그 자체가 죄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어야 하는데 그 돈을 내었다고 해서 우상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처가 무엇인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생활과 신앙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생활은 별개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은 반드시 어떤 사상과 결부되게 되어 있고 결국은 그런 노선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11절,“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음행이고 다른 하나는 포도주인데 하나는 새 포도주이고 다른 하나는 묵은 포도주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음행과 포도주였습니다.

음행과 포도주는 빠져들면 들수록 판단력이 흐려져서 한번 거기에 빠져버리면 그 뒤에는 스스로는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생각만 바르게 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감정이요 의지인 것입니다.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음행을 하는 사람 중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끄러운 음행을 하다가 들통 났을 때 고개를 쳐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감정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미 감정이 음행의 노예가 되어버려서 마치 기계처럼 저절로 움직이게 됩니다. 로봇과 같습니다. 술은 어떻습니까? 술은 더 심하게 사람을 통제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행동하게 합니다. 차분하게 말하려고 해도 소리를 지르게 되고 바로 걸으려고 했는데 자꾸 길이 올라왔다 내려 갔다 하기 때문에 바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포도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포도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귀한 열매였고 그곳의 포도는 당도가 높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으로 팔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 농사와 관계 되는 것이 음행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나안 사람들은 포도 농사가 잘 되게 하려면 바알 신을 잘 섬겨야 하는데 바알을 잘 섬기는 것은 섹스를 많이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소에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말도 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바알의 제사를 드리는 잎이 푸른 나무 밑에 가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는 특히 나무가 귀했습니다. 그런데 잎이 아주 울창한 나무 밑에 가면 무엇인가 신통력이 있는 것 같고 거기서 빌면 포도 농사가 잘 될 것 같은 기대심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포도 농사를 위해서 음행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포도 농사와 포도주 생산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었을 때 어느 한 순간 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어 음행도 해 보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보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포도 농사를 보면 어떻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농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포도주를 만들어서 팔 수도 있고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 농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친 짓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능했을 뿐 아니라 유행을 했더라는 것입니다.

12절,“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가 그들에게 대답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것들을 나무나 막대기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나무는 바로 아세라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나무라고 하고 막대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하면 결국 신앙을 다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명한 기준을 세워놓아야 합니다. 특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손을 대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헤렘’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공격할 때 여리고성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헤렘’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거기에 있는 것들을 건드리면 반드시 돌에 쳐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간이 거기에 있는 물건을 훔쳤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적인 범죄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성적인 죄는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나안 족속들이 성행위가 의식이라고 주장해도 그런 것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란한 성행위는 영원히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절을 하거나 혹은 죽은 영혼을 불러들이는 그런 일은 저주받은 일입니다. 절대로 그런 분위기에게는 휩쓸려서도 안될뿐더러 구경하기 위해서도 거기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영화나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성경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성 관계는 묘사하는 일에는 관계해서는 안됩니다. 점을 치거나 운명을 알아내거나 혹은 전생을 알아내는 이런 일에는 아예 관계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며 무조건 그런 것은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화 중에서도 죽은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 안에 들어가거나 혹는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이 환생하여 요새 나타나는 이런 것은 이미 ‘헤렘’입니다. 과학 연구에 있어서도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연구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창한 나무 밑에 가서 ‘야, 이 나무는 참 크구나. 이 밑에서 도시락이나 까먹자’라고 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서 가나안 사람들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듣고 무엇인가 신비로운 것을 보듯이 볼 때 이미 그들은 스스로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어려운 일도 우리의 믿음과 용기로 다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절대로 미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파고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보다 더 분명하고 명확한 것은 없습니다.

2. 죄의 보편화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기를 주시되 이 절기를 구원과 연결시키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봄에 모맥을 거두는 맥추절을 율법을 주는 시기와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모맥 추수를 마치는 것도 유월절과 연결시키고 가을의 추수 감사절도 장막절과 연결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먹고사는데 민감하기 때문에 결국 추수 그 자체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먹고 사는 것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부산물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구원의 선물로 결혼도 하게 하시고 직장도 주시고 아이들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는 것 그 자체에 빠지게 되었을 때 결국 완전히 가나안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3절,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작은 죄가 용납이 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중에 이런 음행이 온 가족들에게 다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딸도 행음을 하고 며느리들도 행음을 하게 되었습니다.

14절,“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도대체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면 이 세상에서도 풍성한 삶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세상으로 넘어가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삶을 구할 때 그때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계가 급속도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산꼭대기나 제사를 드리고 딸이나 며느리들도 아무와 성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죄가 보편화되어서 아무도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이지만 죄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하나는 오늘 시대의 직업문화입니다. 아직도 우리 나라는 직업상의 중요한 거래나 교제가 술집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거래는 여자가 있는 술집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직업상 술을 마시고 요정같은데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인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정말 술이 세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자진해서 술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여가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여가를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우리도 거의 대부분을 텔레비젼(TV)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지요. 그러나 텔레비젼은 정말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하루 저녁이 지나 갑니다.

특히 영화나 컴퓨터 프로그램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한번 생각한 것을 모두 다 실제화시키려고 합니다. 사람은 아무 것이나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 설사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영화감독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것을 어떤 기법을 사용해서라도 표현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컴퓨터는 가상 현실을 실제처럼 만들어냅니다.

사람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마 호세아가 오늘날 있었더라면 TV나 컴퓨터 화면을 궤짝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궤짝에게 묻고 큰 천이 대답한다고 할 것입니다. 큰 천은 영화 스크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느 시각에서 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지요. 지극히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눈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시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엑스레이(X-ray)처럼 우리 안을 깊이 비추어서 이 세상의 추악한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하나 하나 다시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포도 농사를 잘 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포도를 연구해서 농사를 잘 짓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따라가는 것은 스스로 망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선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원리는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 방식으로 살지라도 나의 삶의 원리는 다릅니다.어떻게 다릅니까?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나의 삶의 원리는 이런 것이다.’라는 식의 백과사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운 원리를 하나씩 하나씩 적용해 가면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기업 윤리를 만들고 나의 여가 시간 방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 내가 생각해서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인생 프로그램을 그저 넘겨주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씩 하나씩 말씀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생각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기 싫어서 쉽게 세상의 방식으로 잘 살려고 할 때 그들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세상 방식으로 쉽게 살려고 할 때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결국 세상에 먹히고 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에 삼키우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자들, 이 세상의 그 흔한 방식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단받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복된 것이 지난날의 실수와 허물이 용서되고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새로워질 수 있고 새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포기.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십니다. 이 진단은 ‘이스라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술하기 위하여 배를 열었다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어서 다시 덮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행음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스라엘은 치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절대로 그런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신신부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두 개의 이스라엘 교회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자기 교회는 이미 회복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유다에 대해서는 절대로 그런 것을 배우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길갈과 벧아웬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길갈과 벧아웬에 무엇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벧아웬이 벧엘일 것으로 주장합니다. 원래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데 거기에 우상이 있었기 때문에 우상의 집이라는 뜻으로 벧아웬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길갈과 벧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에 있어서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할례를 행했던 곳이고 벧엘은 야곱이 성전의 환상을 보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유명한 두 역사적인 곳이 우상의 전으로 변해 있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끝임 없는 우상 신앙의 신학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두 곳에는 계속 집회가 열리면서 거기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가나안화 된 이 엉터리 신앙은 전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도 사람들은 서울에 올라가면 사람들이 가만 많이 모이는 유명한 교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선전되고 있으면 그것은 한 순간에 다른 교회에 퍼지게 됩니다.

길갈과 벧엘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하나님은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번영의 신학이라고 하고 암소로 상징되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잘된다고 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음란하고 우상에 절을 해도 절대로 책망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곳이라면 길갈 같은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죄스럽게 잘 사는 것보다는 그런 생활을 다 청산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부르짖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길갈과 벧아웬의 신학에는 절대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탄은 다른 것을 점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복해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바른 말씀의 선포가 없으면 이미 음부의 권세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 젊은 목사가 있는데 그 교회에 가장 큰 힘을 가진 장로가 죄를 지었는데 그와 관계 있는 설교를 하지 못한다면 이미 진 것입니다. 물론 표현 방식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절대로 죄인을 축복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언제나 사람을 기죽이고 회개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죄에 지면 안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아서 감당을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16절,“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고집스러운 암소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리 줄을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자기 먹을 것을 찾아서 가는 암소의 모습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들을 바른 진리 가운데로 끌려고 해도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양들의 목자이지 완강한 암소의 목자는 아닙니다. 한번도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암소는 모든 것이 제멋대로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 해버립니다. 그런 암소는 양처럼 키울 수는 없고 코를 뚫어서 줄로 당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우리는 길은 말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도 포기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현재 우상과 완전히 연합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17절,“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여기서 ‘연합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이 좋고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인데 이런 잘못된 신앙에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연합하여 하나님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잘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적응도 잘 되지 않고 집안에도 어려움이 있고 무엇인가 갈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완전히 이 세상과 연합한 사람, 이 세상이 너무나도 좋고 하루 하루가 꿈같은 사람,그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대책이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과 연합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셨는데 땅에서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이것이 완전히 재미있고 좋은 일은 아닙니다.

원래 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많은 결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후 땅은 점점 더 지력(地力)을 잃어 가며서 인간과 갈등관계가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래야 그의 마음 속에 말씀이 파고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만일 직장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고 이상적이며 직장에 가있기만 해도 천국에 와있는 것 같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직장과 연합한 것입니다.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남편과 여자 사이에 갈등관계를 주셨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고 또 아내는 남편을 사모하게 하셨는데 여기서 사모한다는 말은 남편을 지배하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남편과의 사이에 힘겨루기 게임이 시작되며 그래서 틈이 있게 됩니다. 그 틈으로 복음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과의 사이에 틈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일치되어 있었고 절대적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18절,“저희가 마시기를 다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특히 이런 문제를 지도자들이 지적을 해 주어야 하는데 지도자들이 한 술 더 떠서 자기들이 먼저 그런 수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복입니다. 지도자들은 언제나 자기 도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며 남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안에 있는 문제를 보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생활을 조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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