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조적인 죄 (호 05:1-7)

첨부 1



구조적인 죄 (호 5:1-7)

어리석은 여성들 중에서 외간 남자와 불륜의 관계에 빠진 후 그 약점 때문에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계속 협박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나 불장난하는 심정으로 한번 좋지 못한 관계를 가졌는데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계속 돈을 뜯기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빠져 나오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각오를 하고 남편에게 알리고 경찰에 고발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처음에 별 생각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출신학교를 속이거나 신분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후에는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거짓말이 산더미같이 커져버려서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런 거짓말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 그렇게 크게 비화되기 전에 수치를 당할 생각을 하고 처음에 자기가 한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다른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될지 몰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태는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번 거짓말 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짓말에 거짓말을 낳고 남을 한번 속인 후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또 증인들을 죽이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체면이나 다른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실 그대로 시인하면 다시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두 번째 행동을 취하면 하나님은 용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1. 미스바와 다볼에서 있은 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미스바와 다볼에서 있은 일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결코 용서하지 못하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미스바와 다볼에서 있은 일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들을 호출을 하시는데 삼중적으로 호출을 하십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깨달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들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분명히 미스바와 다볼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거기에 관계 되는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고 제사장과 일반 백성들과 왕족들이 함께 관계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미스바와 다볼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다시 말해서 미스바와 다볼에서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족들이 공모에서 무죄한 자들을 살육하는 끔찍한 죄를 지절렀다는 뜻입니다.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며’ 성경에서 ‘패역자’라는 말은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른 반역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함게 공모를 해 가지고 미스바와 다볼에서 여러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속임수를 써서 죽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올무과 그물을 쳐서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얼마든지 추론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스바와 다볼이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특히 이 두 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미스바는 사무엘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압박을 받다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온 곳입니다.그들이 블레셋의 압박을 받은 것은 우상때문이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그들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회개했으며 그 때 처음으로 블레셋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다볼은 여(女)사사 드보라가 일어나서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철병거를 부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회복한 곳입니다. 그래서 미스바와 다볼, 이 두 곳은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참된 신앙을 되찾는 부흥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곳에서 올무와 그물을 쳐서 사람들을 살륙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분명히 이스라엘 사회 안에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제사장이나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족들이 이스라엘의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미스바와 다볼에 모여서 회개운동을 벌이자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좋아하지요. 아마도 빠짐없이 다 모였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몽땅 잡아서 죽인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골치 아픈 사람들이니까요?

이 사건은 성경 어느 곳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제사장들과 족장들과 왕족들이 공모하여 참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꾀어내어 집단적으로 암살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것은 이미 제사장과 왕족과 지도자들의 공모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조직적인 배교요 이탈입니다.

지도자가 한 번 잘못되면 그 지도자를 바꾸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평민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잘못된 지도자를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까지 공조해버리면 개인은 전혀 힘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공모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자들을 암살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에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작을 때 두들겨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커지면 세력을 가지기 시작해서 결국은 의로운 세력을 영원히 침묵시키기 위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범인이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망을 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살인자를 목격자까지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두 사람을 죽이게 되고 두 사람을 죽이면 세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한번 거짓말하고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과장되게 말했다고 시인하면 끝나는 것을 자꾸 핑계를 대기 때문에 거짓말이 자꾸 눈덩이처럼 커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우선 하나는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백성과 왕족이 공모를 해서 이런 엄청난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신정국가의 모순입니다. 국교가 종교인 나라는 이상적일 때는 아주 이상적일 수 있지만 일단 한번 타락하면 더 이상 상식이 통하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입니다. 여호와의 종교가 국교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대로 잘 통치될 때에는 상관이 없는데 한번 타락하게 되면 종교보다 더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인들은 특히 조심을 해야 하는데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아주 순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썩은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썩는 것입니다. 생선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 신선하든지 아니면 아주 상해서 비린내가 진동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타락을 해버리면 아무도 정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은 만약 미스바와 다볼에서 이런 살육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악이 일어나게 방치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모두 의로룬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로운 사람들을 악인의 손에 주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악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까? 바로 이것이 하박국t선지의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악한 자이며 누가 의로운 자인 줄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악이 의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지켜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가끔 전혀 예기치 못한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악한 사람에게 걸려 들어서 굉장히 큰 고통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게 하실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결코 평안한 천국이 아니라 죄와 의가 싸우는 전쟁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결코 피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악이 날뛰더라도 하나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어느 정도 악이 이기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하여 악의 더럽고 치사한 속성을 다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한 후 한 순간에 악을 내리치셔서 성도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사람들은 죄의 이런 악마적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죄를 두둔하려고 합니다. 한 번쯤 누구든지 죄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악마적인 모습을 보기 전까지 사람들은 히틀러를 옹호했습니다. 살인마 스탈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 참된 진상을 알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 악마적인 세력과 협상하려고 무던히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진상을 바로 알고 나면 이런 세력들과 협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들과는 무조건 싸워야 하고 그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악의 세력을 깨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사탄의 근본적인 지배를 분쇄시켜 놓은 대승리입니다. 왜 사탄이 우리는 지배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단 한 명의 사람도 지배할 자격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기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죄에 계속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가 거기서 나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기 위하여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이런 악의 세력에 걸려들지 말아야지요. 그러나 이런 악은 자기를 절대로 악이라고 선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라고 선전합니까? 미스바와 다볼에서 회개운동을 하자고 선전합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함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나타나는 표어의 유창함이나 주장의 아름다움만 믿고 따라가면 함정에 걸려 들게 됩니다. 그 중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기도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사탄은 반드시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보면 한번은 실수로 그 마각(馬脚)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나의 길을 이유없이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막히는 것이 좋습니다.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대로 서 있어야 합니다. 전진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맙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즘 신자들은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어느 것이 더 편하고 어느 것이 더 실속이 있느냐?’하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작은 것은 믿어도 큰 것을 잃어버립니다. 악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악의 세력에 걸려 들었다면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거기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악은 자신에게 잡힌 자를 절대로 곱게 내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빠져 나오려면 마치 야음도주하듯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몸만 빠져 나와야 합니다. 거기서 손해 보지 않으려다가 결국 목숨을 잃게 됩니다. 해방되고 나서 북한 땅에 공산당이 들어섰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재산과 논밭을 다 버리고 몸만 가지고 넘어 왔습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2. 사상적인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그것은 사상적인 이유였습니다.

3절,“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행음하였고 이스라엘이 이미 더러웠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일단 하나님의 백성의 죄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감추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완전 범죄를 했다가 안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를 본 사람들이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목격자가 한 명도 살아 있지 않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고 계신 이상 이 세상의 완전 범죄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다른 점은 죄가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은폐를 합니다. 그래서 일단 본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계기를 통해서 그들의 끔찍한 죄를 폭로시키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끔 신문에 보면 ‘무슨 리스트’ 또 ‘무슨 리스트’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어느 특정 기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사람의 명단을 말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돈을 준 사람쪽에서 명단을 발표해 버리면 꼼짝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죄가 영원히 감추어질 수 있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직도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눈물 콧물 다 흐리면서 자기 죄를 자백합니다. 일단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 용서가 됩니다. 아무리 그 죄가 무서운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주 작은 것까지도 다 들추어내어서 온 세상을 폭로시킬 떼가 옵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자기 안에 있는 수은 죄들을 다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죄 용서를 받는 사람입니다.

4절,“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사람이 한번 죄를 지으면 그 죄가 미끼가 되어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죄가 미끼가 되어서 협박을 당해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람이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하여 감각이 무감각해집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존심이 높아져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누군가가 지적하는 말을 하면 화를 냅니다. 깡패같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더욱 더 외모를 치장합니다.

그러면 저희 행위가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다고 하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년을 위하여 바알의 제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상의 제사에 한번이라도 참석하면 회개를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면 윤리적으로 급격하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한번 기회가 주어지면 불이 붙어버립니다.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면 세상의 모든 명예나 체면이나 불의하게 얻은 재산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계속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죄를 부인하게 되면 계속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스워집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야 회개하게 될텐데 하나님이 우스워지니까 망할 때까지 그대로 죄짓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라고 하는 것은 아예 마음속에 이런 음란한 사상이 완전히 새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 속에 이런 음란한 사고가 완전히 자리 잡고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스컴이나 잡지등에서 음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을 읽는 것을 왜 조심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것이 우리 마음에 찍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문화는 섹스문화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입니다. 물론 어른들은 자라는 아이들이 이런 문화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자식들도 빠져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마치 성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욕망을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음란한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도저히 동시에 같은 장소에 함께 자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음란한 마음이 나가야 하고, 음란한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가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이 음란한 문화가 우리들에게 아무 저항없이 들락거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생각 안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985168;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나가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억지로 음란한 손님을 끌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음란한 사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가지는 허구성입니다. 마치 이것이 실제이고 사실인 것처럼 실제적이지 않는 많은 생각을 우리 안에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사실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사실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허구를 거부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니면서 사실인 것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운 상상에 빠져드는 것은 우상이요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허풍을 가장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즐기지 않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사실적인 사고, 이것이 우리 마음에 허황된 교만과 음란한 상상을 막을 것입니다.

3. 제사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죄는 많은 제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6절,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양떼를 끌고 소떼를 끌고 하나님의 성전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자기들의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겠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고 하는 것은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외모만 보면 그를 몰라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짓는 것이 죄인 줄 모르고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지금 마음에 고통을 주시고 회개하도록 지적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더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버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물이 아닙니다. 정직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소나 양을 끌고 가는 것은 자기 정성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제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예수 믿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행하는 것이 잘못인 줄 알고 죄를 지을 때 그리고 성령께서 양심에 고통을 주시는데 참고 있으면 그는 회개할 기회가 없어집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고통을 주실 때에는 다른 모든 일들을 다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에 빠진 것은 실수나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거역하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을 알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한두번 유혹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정조를 잃었고 사생아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면 돌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을 근심하게 합니다. 이것이 분명히 죄인 줄 알지만 우리가 연약하여 육신의 소욕에 넘어가서 양심을 고통스럽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마음을 악하게 만들어서 스스로 죄를 합리화시키고 즐기면서 죄를 지을 때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그 사람을 떠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연약한 자는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많이 회개해도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하고 스스로 죄를 즐기고 합리화시키면서 죄를 즐기는 자는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다시 어느 한 여자의 예로 돌아갑니다. 이 여자가 어쩔 수 없어서 우연히 범죄했다면 용서할 의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즐기고 사랑했으며 이런 생활의 댓가까지 받았고 자식까지 두었다면 이것은 실수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이고 의도적으로 그런 생활을 원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죄를 실수라고 합니다. 사정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불가피하게 죄를 지었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사정을 파고 들어가보면 전혀 죄를 지을 필요가 없었는데 죄를 즐기기 위하여, 약한 자를 괴롭히기 위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주십니다. 늦기 전에 빨리 하나님께 달려와서 제단의 뿔을 잡아야 합니다. 늦으면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 달’이 되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새 달’은 큰 절기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는 ‘새 달’을 뻬앗아 가버리십니다. 다시는 새로운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축복의 시기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영광된 예배의 기쁨입니다. 모든 새로운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예배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를 빼앗기게 되면 다른 모든 기회도 다 잃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닙니다. 몰라서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기질과 고집때문에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집이 망하게 합니다. 자기 체면때문에 혹은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가 받은 상처때문에 분명히 자기가 틀렸고 옳지 않은 편에 서있으면서도 돌이키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 떠나십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요.“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교만한 마음입니다. 알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틀린 것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나아와서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정조’라는 표현을 쓰시면서 ‘정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순수함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끓어오르는 정욕과 죄악 가운데서도 물들지 않고 그 순수함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고백하고 고침을 받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더럽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자주 빠는 것입니다. 늘 우리의 행실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지고 와서 용서받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가 우울하다고 하거나 너무 자주 운다고 비난하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늘 그 피에 내 죄를 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지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속에 들어 있던 음란한 마음이 물러가고 그 대신 거룩한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